169화. 천하제일인, 천하제일미 (2)
그 말에 백리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소 띤 표정으로 말했다.
“현월곡주께서 어찌나 소저 걱정을 하시던지, 그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네. 덕분에 변절한 부하도 처리할 수 있었지.”
“아…….”
“윤이 몰래 나갔던 거였지. 윤이가 미리 알았다면 절대 내가 직접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거든. 덕분에 복귀해서 윤이한테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잘된 일이 아닌가. 소저가 이렇게 무사해서 강호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
이제야 당시에 가졌던 의문이 풀렸다.
한설연이 이윽고 매무새를 단정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백리우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이마가 거의 탁자에 닿을 만큼 공손한 자세였다.
“허허……! 이러지 말지. 어서 자세를 풀고 앉으시게나.”
하지만 한설연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녀가 깊게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눈을 감고 말했다.
“맹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소녀의 목숨을 두 번이나 직접 구해주셨습니다.”
한 번은 방금 전에 말한 상황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청성산에서였다.
“또한 그 사람을 호위로 보내주신 것만으로도 제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주신 셈입니다. 소녀는 요즘 살아 있다는 게 진심으로 행복한데, 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분이 맹주님이십니다.”
“소저의 마음, 알겠네. 그러니 이제는 자세를 풀지. 부담스럽네.”
한설연이 자세를 풀자 백리우가 농담하듯 말했다.
“그리고 아직 내 잔, 비어 있는데.”
“아!”
한설연이 서 있는 상태에서 서둘러 술병을 집어 들자 백리우가 말했다.
“앉아서.”
“예…….”
한설연이 앉아서 백리우의 잔을 채웠다.
백리우가 그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하지는 뜻임을 알고 한설연도 잔을 들었다.
그러자 백리우가 말했다.
“방금 소저가 한 말, 다 그렇다 치지. 하지만 하나는 틀렸네. 소저의 목숨을 절대 보잘것없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 내 앞에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게나.”
감동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미녀의 목숨은 고귀한 거거든. 그게 천하제일미녀라면 더더욱.”
자, 잠깐. 그런 뜻이셨어요?
“푸흡……!”
한설연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자 백리우가 농담하듯 물었다.
“주책인가?”
“아, 아닙니다.”
단유소 생각이 났다. 그도 이런 식이었다.
진지하다가도 갑자기 농담을 섞으며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곤 했었다.
두 사람은 미소 띤 얼굴로 마주 술을 들이켰다.
잔을 채우려 술병을 들어 올린 한설연이 말했다.
“술이 다 떨어졌습니다.”
“윤이와 내 사이에서는 각 일 병씩이 원칙이라네. 물론 이번에도 소저에게는 거부권이 없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설령 거부권이 있다 해도 거부할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좋아.”
“제가 가져올게요.”
한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갈윤의 옷장으로 향했다. 각 일 병씩이 원칙이라더니, 역시나 같은 술이 한 병 더 있었다.
한설연이 술잔을 채울 때 백리우가 말했다.
“흑풍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 옛날 얘기 하나 해줄까?”
“얼마든지요.”
그러자 백리우가 뭔가를 회상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몇 년 전이었을 게야. 무림맹의 외성에서 큰 연회를 개최하고 있을 때였지.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왔기에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나갔지. 당시에 신룡대는 비상이었네. 왜냐하면 천마신교에서 세작을 파견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상태였거든.”
“아.”
“윤이도 내가 직접 행차하는 것을 말렸지. 그냥 성벽 위에서 인파를 환영하라고 하더군. 천마신교의 그 세작들이 암살 목적으로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첩보에 따르면 그 세작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얘기도 있었고.”
자신이 문상이었어도 제갈윤과 같은 조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갔지. 그렇잖은가. 사실이야 어찌 됐건, 나는 당시에도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네. 그런 사람이, 암살이 두렵다 해서, 나를 보고자 온 사람들을 대충 환영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집을 부렸고, 그 순간부터 신룡대에는 특급 경계령이 내려졌지.”
한설연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겉으로는 환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열심히 손을 흔들어줬지만, 속으로는 집중하고 있었네. 신룡대가 비밀리에 호위하고 있고, 나 또한 쉽게 당할 경지는 아니지만, 실력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암살을 시도하면 다칠 수는 있는 거거든.”
“그렇지요.”
“그렇게 만에 하나 살짝 다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모양새가 빠지겠느냔 말이야. 보는 눈도 많은데.”
다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모양새 때문이셨던 겁니까.
맹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재미있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수많은 인파 속에 섞이지 않는 기운들에 집중했지. 그 안에서 한 젊은이를 발견할 수 있었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 경지에서는 느낄 수 있었지. 정말 미약한 마기였네. 그 정도로 마기를 감출 수 있다면 실력도 대단하다는 뜻이 되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설연이 서둘러 묻자 백리우가 대꾸했다.
“그를 향해 웃어줬네. 그러자 그 친구가 크게 당황하더군. 몸이 딱 굳은 게 보일 정도로.”
“그리고요?”
“그게 끝이었네. 신룡대도 그를 잡아내지 못했고, 나 외에는 아무도 그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지. 물론 축제도 아무런 차질 없이 잘 끝났고. 지금도 이 얘기는 윤이와 내 수호위 말고는 아무도 몰라.”
“…….”
말 한마디면 처리할 수 있는 적의 실력자를 그냥 보내줬다니.
알면 알수록 특이한 사람이다. 맹주는.
“아, 참! 그에게 전음도 한마디 해줬었네.”
“뭐라 하셨는지요?”
“어려운 발걸음이었을 텐데 마음껏 먹고 가라고 했네. 돌아가서 천마신교주에게 안부도 전해달라 했고.”
“허……!”
말문이 턱 막혔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러자 백리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왜? 내가 잘못 대처한 것 같은가?”
“아, 아닙니다. 다만, 제 예상과는 결말이 너무 달라서요. 만약 저였다면 아마, 그의 존재를 밝혔을 겁니다.”
“그러면 그는 죽었겠지.”
“왜……, 그를 살려주신 겁니까?”
백리우가 대답 대신 술잔을 비웠다.
한설연도 얼른 술잔을 비운 후, 다시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웠다.
백리우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백도인들은 정의를 구현하고 협의를 실천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외치지. 숙적인 천마신교를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그 궁극이라 생각하지. 한데 우리가 추구하는 정과 의와 협이 본디 그런 것이었던가?”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불의에 맞서고, 약자에게 관대하고, 강자로서 스스로 절제하고, 악랄한 자들을 혼내주고. 쉽게 말하면 그런 개념인 건데, 적어도 내가 맹주 자리에 있으면서 봐온 천마신교는 무조건 처단해야 할 정도로 악랄한 짓을 일삼지는 않았다네. 아버지가 맹주일 당시에도 그랬지. 그들은 오히려 우리 눈치를 보면서 움츠리고 사렸네.”
백리우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그들이 언제 또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는 모르지. 그러나 적어도 근 수십 년간 그들이 딱히 우리를 건드리지도 않았고, 우리가 단죄해야 할 만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뭣 하러 그들을 처단한단 말인가.”
백리우가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안에서도 정치하기 좋아했던 우리네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이념 같은 것이지. 그렇게 해야만 본인들이 취할 수 있는 이득 같은 게 있었던 것이고.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자랐던 게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네.”
방금 맹주가 한 말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화두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흑풍대주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인 단유소도 비슷한 개념을 갖고 있는 듯하다. 평소 그의 언행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어쨌거나 이번에 정마협정이 성사된 것도, 맹주의 저런 성향 덕분이었을 것이다. 드러나게 세상을 바꾸는 건 전쟁, 혁명, 혁신 같은 것들이지만, 드러나지 않게 세상을 바꾸는 건 맹주와 같은 마음가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리우가 말했다.
“그로부터 이삼 년 후였나? 멀리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네. 아마도 그는 나를 못 봤겠지만 말이야.”
“맹주님께서 그냥 보냈던 그 첩자 말씀이시죠?”
한설연의 질문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꾸했다.
“그렇지. 그리고 그는 흑풍대주가 되어 있더군.”
한설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그래. 지금도 흑풍대주인, 바로 그 친구일세. 그 얘기를 하려고 옛날 얘기를 꺼냈는데 길어졌군.”
“와아……!”
인연이라는 게 신비롭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웠다.
만약 그때 맹주가 그 첩자를 죽였다면 지금의 흑풍대주 송주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단유소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송주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론을 전제한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청룡에게서 빠져나올 때, 흑풍대가 단유소를 도와줄 일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자신이든 단유소든 둘 중 한 명은 큰일을 당했을 것이다. 당시에 단유소는 뒤에 있는 흑풍대를 믿고 자신을 구했으니까.
“너무 신기해요. 인연이라는 거.”
자신에게도 그런 신기한 인연이 있다.
대상은 역시 단유소.
친한 동생인 양금영이 하필 다쳤고, 그녀의 주선연 자리에 자신이 대신 나갔다. 그곳에서 한심해 보이는 청년 한 명을 만났고, 어이없게도 그가 자신의 첫 강호행에 동행했다.
알고 보니 한심한 그 청년은 그 유명한 묵룡.
그가 자신을 구했다.
그리고 그와 자신은 지금 연인 관계다.
“살다 보면 그런 일들도 생기지. 더 신기한 인연들도 많고.”
백리우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인연을 위하여.”
“위하여.”
두 사람이 또다시 잔을 비웠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백리우가 술을 한 잔 더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
“하북은 황성을 끼고 있지.”
그 말에 한설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너무 뜬금없는 발언이었던 탓이다.
“권력가들이 가장 많은 곳은 황성, 그리고 그다음은 하북일세.”
하북?
요새 문상부의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보고 접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제갈윤도 하북을 잠깐 언급했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적의 주요 거점으로 의심되는 곳이 왜 대부분 하북 방향을 가리키고 있느냐 하는 점이라네.”
그때 제갈윤이 했던 말과 방금 백리우가 했던 말을 곱씹던 한설연이 이윽고 놀란 표정으로 대꾸했다.
“서, 설마 맹주님께서는 지금 혈천맹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일세. 아직 확인된 건 없지.”
백리우는 지금 혈천맹이 정치권력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