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천하제일인, 천하제일미 (1)
이에 한설연이 얼른 집무 탁자에서 벗어나 백리우의 맞은편에 섰다. 백리우가 말했다.
“앉지.”
“예…….”
한설연이 자리에 앉자 백리우가 집무 탁자를 일견하더니 말했다.
“저 자리에만 앉으면 누구나 야근을 하는군.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악덕 맹주야.”
한설연이 대꾸했다.
“제가 가만히 보니 맹주님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문상 어른께서 워낙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시라, 문상부의 인원을 확충하지 못해서이지요.”
“허허! 벌써 그런 속사정까지 아는가?”
“예. 어쩌다 보니.”
배시시 웃어 보인 후에 한설연이 물었다.
“한데 이 시간에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아. 그게…….”
백리우가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제갈윤의 집무 탁자 뒤에 있는 옷장으로 향했다.
백리우가 옷장의 문을 열더니 아래쪽의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러더니 그것을 한설연 쪽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술친구가 필요해서 말이지.”
“아…….”
백리우가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술잔 두 개를 들고 다시 응접용 탁자로 돌아왔다.
백리우가 술잔 하나를 한설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소저에게 거부권은 없네.”
그러자 한설연이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설령 거부권이 있다 해도 거부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푸허허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제가 먼저 한 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내가 먼저 따라주겠네. 그게 윤이와 나 사이의 규칙일세. 그리고 지금 소저는 윤이 대신이지.”
“하오시면.”
한설연이 그렇게 말하며 공손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백리우가 마개를 딴 후, 그 잔에 술을 채웠다.
이어서 한설연이 술병을 건네받아 백리우의 잔을 채웠다. 백리우가 흡족한 표정으로 그 잔을 받았다.
백리우가 잔을 들어 올리자 한설연도 잔을 들었고, 두 사람은 건배를 한 후에 술잔을 들이켰다.
“캬아아! 천하제일미녀가 따라준 술이라서 그런지, 술맛 한번 기가 막히는군.”
“맹주님의 잔을 직접 받아보고, 소녀가 더욱 영광입니다.”
한설연이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백리우의 잔을 채웠다. 그 후에 직접 자신의 잔을 채웠다.
백리우가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그래, 갑자기 문상 대행을 하게 되었는데, 힘들지는 않은가?”
“문상 어른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몸소 겪고 있습니다. 자칫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하여 그게 걱정입니다.”
“겸손도 그 정도면 엄살일세. 윤이가 자리를 비웠는데도 맹이 아무런 잡음 없이 돌아간다는 건, 소저가 그만큼 잘해내고 있다는 뜻이지. 그걸 알기에 윤이도 소저에게 이 일을 맡겼을 테고.”
“과찬…… 이십니다.”
문상 제갈윤은 현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다녀올 데가 있다고만 하고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
백리우는 아는 모양인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제갈윤의 소재를 모르는 상태다.
“너무 잘하려는 마음에 무리하지는 말게. 힘든 게 있으면 즉각 내게 말을 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맹주님.”
백리우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술잔을 비웠다. 한설연도 얼른 술잔을 비운 후에 또다시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자 백리우가 입을 열었다.
“그때 술자리에 찾아간 후로, 그 친구와는 잘되고 있는가?”
맹주가 말하는 ‘그 친구’란 바로 단유소였다.
당시에 묵룡조의 회식 장소를 알려준 장본인이 바로 맹주였다. 그때 맹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단유소와의 관계가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자신이 이렇듯 문상부에서 일하며 신룡대의 일을 담당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맹주 덕분이었다. 그때 청성에서 맹주가 화두를 던져준 덕분인 것이다.
“예……. 모든 게 맹주님 덕분이에요.”
한설연의 양 볼에 옅은 홍조가 피어 있었다.
“허허허. 그 친구는 복도 많군. 이런 여인의 사랑을 차지하다니.”
“복이 많은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저예요, 분명히.”
“크아아아! 말도 어쩜 그리 예쁘게 하는지 원!”
백리우가 탄성을 내뱉더니 술을 들이켰다. 한설연도 술을 들이켠 후 또다시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웠다.
백리우가 물었다.
“그 친구, 좀 답답하지는 않던가? 아, 그러니까, 연애 쪽으로 말일세.”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하죠.”
“푸허허! 소저가 잘 이끌어주게나.”
“잘 이끌고 말고 할 필요도 없어요. 약간 어설프긴 하지만 진솔한……, 그런 면이 매력적인 사람이라서…….”
한설연이 부끄러운 듯 그렇게 말하자 백리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허허허허! 아주 콩깍지가 씌었군.”
그 뒤로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백리우는 내내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그런 백리우의 기색을 살피던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편하게 말씀하시게.”
“이런 말씀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맹주님께서 그 사람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히 총애하는 부하를 대하는 느낌 이상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각별히 소중하게 여기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뭔가를 회상하는 듯하던 백리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과거의 인연이 좀 있다네. 그 친구는 모르고 나만 아는.”
“아…….”
“언젠가는 그 친구도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닐세. 그러니 소저도 그렇게 알고 있게나.”
함구하라는 뜻.
한설연이 바로 대꾸했다.
“예, 맹주님.”
맹주와 단유소라.
맹주의 분위기를 봐서는 상당히 깊은 인연인 듯한데, 대체 어떤 인연일지 궁금했다.
그 후로 백리우는 말없이 술을 연거푸 두 잔 들이켰다. 그동안 한설연은 한 잔만 마셨다.
한설연이 백리우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정혼단의 활약으로 인해 온 강호가 무림맹과 맹주님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정혼단이 적의 주요 거점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을 구하고, 벽력탄을 회수하는 등의 활약을 펼친 사실이 강호에 알려졌다.
혈천맹을 상대로 눈에 띄는 성과를 낸 건 처음이라 할 수 있었기에 백도의 사기는 제법 충천한 상태였다.
그 일에 관계된 인물들도 일약 강호의 영웅들로 급부상했다. 정혼단주인 유굉 대사를 비롯하여 제일대주인 왕운석 등, 많은 명숙들의 인지도가 급상승한 상태였다.
특히 알몸으로 발견된 일반인 피해자들을 위해 상의를 탈의한 정혼단의 일화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회자되고 있을 정도였다.
한설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실 법한데도 오늘 소녀가 보니 맹주님의 심기가 편안해 보이지 않으십니다. 무슨 염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백리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보이는가?”
“소녀가 어설프게 넘겨짚은 거였다면……, 송구합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여전히 미소를 띤 상태에서 말했다.
“이 자리는 온갖 사소한 것들까지도 염려하게 만드는 자리지.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나라는 사람 자체가 원래 염려가 많은 성격이라네.”
농담하듯 그렇게 대꾸했지만 명확한 대답은 회피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뜻을 알아들은 한설연이 농담조로 대꾸했다.
“염려가 많은 자리라는 말씀이야 이해가 되지만, 맹주님께서 원래 염려가 많은 성격이시라는 건 쉽사리 믿기지가 않는데요?”
“무공이 강하다고 하여 두려움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라네. 물론 보는 눈이 있으니 두렵지 않은 척하긴 하지. 허허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주님이시라면 두려움 같은 게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어서요. 그렇기에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산처럼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두려워도 흔들리지 않는 척, 아파도 전혀 이상이 없는 척.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래야만 한다네. 그래야 소저와 같은 소중한 사람들의 그 믿음을 지켜줄 수 있거든.”
그 말에 한설연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생각에 잠겼다.
백리우의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단유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켜주던 그의 모습도 바위처럼 든든했었다. 그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었다. 한 번도 두려움을 표출한 적이 없었고, 아픔을 내색한 적도 없었다.
존재 자체가 든든했었다.
믿을 수 있었다. 온전히.
하지만 그도 두려웠을 것이고, 그도 아팠겠지.
나를 지키기 위해 아픔을 참아내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이를 악물었겠지.
그가 더 밝게 빛나는 이유는 어쩌면, 언제나 더 짙은 어둠 속에서, 더 환한 빛을 발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한설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들, 흑풍대와 연계해서 작전을 수행 중이라고?”
여기에서 ‘그 친구들’이란 신룡대.
한설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
“별 탈은 없다던가?”
“예. 아직까지는 순조로운 모양입니다.”
“하긴, 정마를 섞어놨을 때 가장 순조로운 쪽은 그쪽이겠지.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 모두가 강호 정세에도 훤하고.”
흑풍대.
그들을 한 번 봤었다.
청룡조의 꾐에 넘어가서 납치 아닌 납치를 당했을 때, 그들의 도움으로 인해 탈출할 수 있었다. 흑풍대의 모습을 확인한 건, 청룡조에게서 탈출하여 신룡대와 합류한 직후였고.
“게다가 송주라고 했던가? 그 흑풍대주와 묵룡은 서로 통하는 게 있는 사이지. 두 수장이 그런 관계이니 더더욱 나쁘지 않을 게야. 아마도 신룡대와 흑풍대의 합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상승 효과를 일으킬 걸세.”
한설연은 내심으로 놀란 상태였다.
단유소는 흑풍대주와의 친분을 극비로 여기는 눈치였다. 당연히 상부에 보고한 눈치도 아니었다.
그렇다 하여 묵룡조원들이 따로 상부에 보고했을 리도 없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니까.
단유소가 흑풍대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실제로 단유소가 흑풍대주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묵룡조와 자신 그리고 흑풍대뿐이어야 했다.
한데 맹주는 지금 단유소와 흑풍대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가 아닌가.
한설연이 내색하지 않은 채로 조용히 있자 백리우가 씩 웃으며 물었다.
“소저도 본 적이 있지? 흑풍대주 말일세.”
그 말에 결국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떻게 맹주가 그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자 백리우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허허허. 그렇게 놀랄 필요 없네. 소저가 청룡조에게서 빠져나갈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 흑풍대가 도와주는 것도 봤고.”
한설연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어, 어떻게…….”
백리우가 술을 들이켰다.
매우 놀란 상태였지만 한설연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당시에 단유소는 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청룡과 대치 중이었다. 청룡의 뒤쪽에는 많은 이들이 대기 중이었는데, 모두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고수들이었다.
자신이 물길을 떠내려 오다가 신룡대와 합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단유소와 흑풍대도 합류했었다.
즉, 단유소와 흑풍대가 청룡 일행을 처치할 만큼의 시간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마도 시간을 벌기 위해 다리만 파괴하고 합류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물길이 거세서 그 정도로도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단유소와 묵룡조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었다. 적의 추격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한데 그 후로 한동안 적의 추격은 없었다. 그간 겪은 혈천맹의 성향을 보면 바로 추격해왔어야 정상인데 그러지 않았었다. 이상했었다.
‘맹주님이 개입해 있었다면…….’
그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바로 물었다.
“설마 그때 맹주님께서 청룡과 그 무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