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작전 연장 (5)
‘에휴…….’
저 앞에 뭉쳐 있는 흑풍대원들을 바라보며 선화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묵룡의 말마따나 흑풍대에게는 송주의 말이 곧 법일 테니, 무서운 건 그렇다 치자.
묵룡과 송주가 친구 관계인데 별일이야 있겠느냔 말이다. 위험할 것 같았으면 묵룡이 애초에 자신을 이쪽에 파견할 일도 없었을 테고.
문제는 오히려 사소한 부분들이었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잠은 설친다고 봐야겠네. 피부에 좋지 않은데. 소피 같은 걸 해결하는 건 더 큰 문제고.’
보아하니 그나마 흑풍대에도 서너 명의 여인들은 있는 듯했다. 일단은 그녀들과 함께 움직이는 수밖에.
어쨌거나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묵룡은 아직까지 동행할 인원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묵룡. 당신이 양심이 있으면 적어도 백운 정도는 붙여줘야 해.’
백운. 쌍검을 쓰는 묵룡조의 막내다.
일전에 잠입 작전을 함께 수행하면서 확인했지만, 그는 믿을 만한 고수다. 성격도 온순하여 말도 잘 들을 테니, 그가 합류한다면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그래, 그라면 딱 좋다.
‘만약 백운이 아니라면 엽풍 정도도 괜찮겠지.’
엽풍. 창을 쓰는 묵룡조의 미남이다.
말이 살짝 많은 친구이긴 하지만, 낯선 흑풍대원들 사이에서는 활발한 그 성격도 충분히 도움이 될 듯하다. 실력적인 측면에서도 백운만큼이나 듬직하고.
선화란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신은 참,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흑풍대원들 사이에서도 넋을 놓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하여간 언제쯤 그 애송이 티를 벗으려는지 원.]
문득 들려온 전음에 선화란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적룡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적룡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화란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의 배웅 따위 전혀 달갑지 않으니까, 얼른 가서 본인 볼일이나 보셔.]
그러자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배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긴,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지. 보아하니 또 꼬투리 잡아서 비아냥거리러 온 모양인데, 일없으니까 가서 본인 볼일이나 보시라고.]
선화란은 귀찮다는 듯 얼른 가라는 손짓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였다.
휘릭― 척!
갑자기 적룡이 바로 옆에 착지하니, 선화란이 인상을 더욱 찡그렸다.
문제는 이어진 적룡의 행동이었다.
그가 그대로 흑풍대원들 쪽을 향해 걸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낌새를 눈치챈 선화란이 황급히 적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서, 설마 당신이……! 말도 안 돼!]
그러자 적룡이 뒤로 고개를 돌리더니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짜증 나기는 나도 매한가지니까 얼른 오기나 해.]
[됐어! 당신하고는 안 가! 가서 묵룡에게 따져야겠어.]
그러자 적룡이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럼 그러시던가. 그런데 아마 씨알도 안 먹힐걸? 방금 내가 한 얘기 못 들었나?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말?]
[그게 무슨 소리지?]
[그 친구가 총책임자인 거 몰라? 방금 나, 그 친구의 권력 행사에 제대로 당하고 오는 길이라고.]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치민다는 듯, 표정 없는 적룡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 * *
“자네가 좀 가줘야겠는데.”
나무 기둥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묵룡이 다가와서 그렇게 말했다.
“어딜? 설마 흑풍대 쪽 파견?”
묵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그에게 대꾸해줬다.
“그 애송이랑 함께? 싫은데?”
“자네에게나 그녀에게나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런 경험은 필요 없어. 차라리 다른 인원을 붙여준다면 가지.”
“그녀에게만 유독 까칠하네? 그럴 필요가 뭐 있어? 선임 조장으로서 후임 조장을 좀 돌봐준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리고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쪽으로 가보는 게 좋아. 자네도 마찬가지고.”
“사양하지.”
그러자마자 묵룡이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 두 개를 입술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전서응이 날아들었다. 신룡대의 연락용 전서응이었다.
그 후, 묵룡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전서용 종이와 필묵통이었다.
이어서 묵룡이 입으로 뭔가를 읊조리며 그 내용을 그대로 종이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신룡대 합동 임무 중단에 따른 상황 보고. 사유, 적룡조장의 지시 불이행. 내용, 본인은 신룡대 합동 임무의 총책임자로서 필요한 지시를 내렸으나, 상기 인원이 지시를 따르지 않는바, 원활한 임무 수행에 차질이 큼.”
“뭐, 뭐 하는 건가?”
깜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지만 묵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본인이 말하는 내용을 종이에 옮겨 적을 뿐이었다.
“위험도를 따졌을 때 이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고 판단, 이에 본인은 총책임자로서 신룡대 전원의 즉각 철수 후 재정비를 요청하는 바임.”
필묵통을 닫은 묵룡이 방금 작성한 전서를 곱게 접어 둥글게 말더니, 그대로 전서통에 쑤셔 넣었다.
그러는 묵룡의 손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지. 간다고. 가면 될 거 아니야?”
* * *
적룡에게서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화란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따지러 가봐야 결국 묵룡은 자신에게도 지시 불이행이라는 패를 꺼내 들 게 빤했다. 묵룡은 총책임자인 데다가 상부의 총애를 받고 있는 몸이다. 애초에 될 싸움이 아닌 것이다.
[그 사람이 치사할 때도 다 있네.]
[내 말이.]
적룡의 대꾸에 선화란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억울하긴 했던 모양이네. 당신답지 않게 그런 얘기를 다 전해주고.]
[당신이 묵룡에게 따지러 가면 출발 시간만 늦춰질까 봐 말해준 것뿐이야. 괜히 처음부터 저들에게 책잡히기 싫어서.]
그때쯤 흑풍대원 한 명이 다가와서 출발을 알렸다.
결국 선화란과 적룡은 흑풍대원들의 뒤를 따라 나란히 달렸다.
달리는 와중에 선화란이 전음으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건데?]
[싫어하는 게 아니야. 짜증 날 정도로 답답한 거지. 당신이 너무 애송이라.]
[아니 뭐 누군 처음부터…….]
항변하듯 말하던 선화란이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적룡에 대해서 묵룡이 말해줬던 게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젠장. 이 인간은 처음부터 잘했다고 했었지.
잠시 경공을 펼치던 선화란이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사람이 말이야. 백이면 백, 다 같나? 당신처럼 처음부터 알아서 척척 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잘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사람들도 있는 거라고.]
비아냥거리며 한마디 툭 던질 법도 한데, 적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공을 펼칠 뿐이었다. 선화란이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선천적인 천재도 있지만 후천적인 노력형 천재들도 실제로 존재하잖아. 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후천적인 천재라는 말은 아니고…….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선화란이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적룡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히 한마디 툭 쏠 것 같은데, 적룡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방금 전에 말한 걸 듣긴 한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쳇! 아예 무시한다는 거야, 뭐야?
선화란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 즈음 적룡은 적룡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룡의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묵룡이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대단한 무인이 될 거야.”
흑풍대 쪽으로 합류하기 직전에 묵룡이 했던 말이었다.
“동의하기 힘들군.”
“그래도 상부에서 신룡대의 조장으로 뽑은 인재야. 그녀에게 충분히 그럴 만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한 거라고.”
“그녀는 너무 어설퍼. 솔직히 말하면 신룡대의 조장감이 될 정도는 아니지. 이번만큼은 상부의 판단 착오라고 생각되는데.”
“아니. 내가 볼 때 상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오히려 그녀의 경우에는 상부에서 판단한 것보다 더 대단한 무인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할 때의 묵룡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묵룡의 그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묵룡의 안목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너무도 명백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묵룡조의 막내였다.
언젠가 신입 조원을 선발하러 갔을 때 그를 봤었다.
당시에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저렇게 어설픈 자가 십인의 후보생에 뽑힐 수 있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다가다 보니 엉뚱하게도 그가 묵룡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묵룡이 제정신인 건지 의아해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 막내와 다시 마주쳤다.
묵룡조의 막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적룡조원 전부가 달려들어도 그 한 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그야말로 대단한 실력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경우가 비단 묵룡조의 막내뿐만은 아니었다.
묵룡조의 넷째 또한 신입을 차출하러 갔을 당시에 본 적이 있는 친구였다.
그 또한 당시의 후보생들 열 명 중에서 성적은 하위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데 지금 그의 실력은 적룡조의 부조장인 하영목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묵룡의 남다른 안목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들이었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후천적으로,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급성장하는 친구들도 있는 거라고. 그런 재능들이 때때로 더 무섭기도 하지. 어쨌거나 그런 걸 잘 이끌어줘야 할 사람들이 바로 선배 아닌가?”
묵룡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달리던 적룡이 살짝 고개를 돌려 선화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 그녀의 몸이 살짝 휘청했다.
“앗.”
땅 위로 솟아오른 나무뿌리에 걸려서 순간적으로 넘어질 뻔한 것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적룡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여간 쉴 틈이 없는 저 엉성함이라니.
‘하! 대단한 무인이 된다고? 이 여자가……?’
* * *
야심한 시각임에도 무림맹 섬서지부에 마련된 문상의 집무실에서는 호롱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문상의 책상에 앉아 이런 저런 서류들을 부지런히 훑고 있는 인영은 의외로 제갈윤이 아닌 한설연이었다.
똑똑똑.
문득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에 한설연이 서류에 시선을 둔 채로 대꾸했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집무실의 문이 열렸고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한설연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들어선 인물을 확인했다.
그 인물을 확인하자마자 한설연이 깜짝 놀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 맹주님……!”
백리우였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한설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저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어색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잘 어울리는군. 윤이만큼이나.”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침소에 드시지 않고…….”
“나 아직 초저녁부터 잘 만큼 늙지는 않았다네.”
“그,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허허허. 농일세. 농.”
백리우가 그렇게 말하더니 집무 탁자 앞에 있는 응접탁자로 다가와서 그 앞의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