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55화 (155/200)

155화. 송주와의 조우 (6)

선화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한테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위험한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다?]

단유소가 고개를 저으며 대구했다.

[아니,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송주와 홍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야.]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알아듣게 좀 얘기해봐!]

그러자 단유소가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이제 당신은 신룡대의 막내 조장이 아니야. 신룡대가 이렇게 되는 바람에 당신은 서열 삼 위의 선임 조장이 됐지. 그렇다면 당신도 앞으로 임무 수행 중에 흑풍대와 조우할 일이 생길 거야. 무림맹에서 냄새를 맡은 건수는 천마신교에서도 냄새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거든. 송주나 홍련과 조우할 일도 생기겠지.]

[아……!]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흑풍대주인 송주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홍련이라는 여인도 현재 자신의 수준에서는 상대하기 힘든 경지에 있는 고수였다. 실제로 아까 송주는 물론이거니와, 홍련이라는 여인이 무인이라는 사실조차 전혀 눈치를 못 채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고수들과 조우하게 된다니.

선화란의 표정을 확인한 단유소가 웃으며 말했다.

[미리 겁먹을 필요 없어. 송주가 흑풍대주고 내가 여전히 신룡대에 남아있는 한, 어차피 두 조직이 직접 검을 섞을 일은 없을 테니까. 싸워서 이기든 지든, 그건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거든.]

단유소가 바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안면이 있으니 송주 같은 경우에는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어. 그런 때에 나와 송주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당신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래서 사실대로 말한 거야. 한편으로는 당신이 고정관념을 깨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고정관념?]

[마교인인 줄 알면서도 왜 도왔느냐고 묻는 그 고정관념. 인간을 인간의 관점으로 보기 이전에, 정과 마부터 가르려고 하는 그 고정관념.]

단유소가 보니 선화란은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결국 말을 삼키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에 선화란이 입을 열었다.

[인정하겠어. 내게 그런 고정관념이 있다는 거. 그리고 앞으로는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노력할게.]

[좋은 자세야.]

[하지만 아까 내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설득력이 약간 부족해. 아무리 생각해도 흑풍대주를 도와줄 당시에는 그의 정체를 몰랐다고 둘러댔어도 큰 상관은 없었을 일이야. 굳이 나한테 그것까지 밝힐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러면 그냥, 내가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었던 모양이지.]

* * *

정협단의 본진은 적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곳으로부터 오십 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적의 이목에 최대한 걸리지 않을 곳으로 진지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작전이 시작되면 삼십 리 정도를 전진, 그곳에서 한 차례 휴식을 취한 후 거점을 타격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수준급 정예 무인들이니만큼 경공도 뛰어나니 적과의 거리도 적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는 시각은 오늘 저녁이었다.

특수첩보조로 위장한 묵룡조와 황룡조는 정협단의 본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진평을 비롯한 선발대는 어제 도착해 있었고, 단유소를 포함한 후발대는 점심 무렵인 방금 전에야 합류했다.

단유소가 아름드리나무의 높은 가지 위에 앉아서 혼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아래로 진평이 다가왔다.

“쓸 만한 정보는 좀 입수하셨습니까?”

진평이 묻자 단유소가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그 말에 진평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남는 시간을 틈타 저자에 정보를 구하러 가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쓸 만한 정보를 건지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윽고 진평이 단유소가 앉아 있는 가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진평이 착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단유소가 말했다.

“요새 볼 때마다 실력이 느는군?”

“뭐, 부조장 체면도 내팽개치고 막내 녀석 붙들고 열심히 수련 중입니다.”

“후후. 고생이 많군.”

“고생은 소운이 그 녀석이 많겠지요.”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

잠시 후에 단유소가 전음으로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어. 적의 거점이 함정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 말에 진평이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유소가 저렇게까지 확신한다는 건 그만한 근거가 있다는 뜻이었다.

[뭔가 알아낸 게 있는 겁니까?]

진평이 서둘러 묻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어제 우연히 송주, 그 친구를 만났거든.]

[아……!]

흑풍대주 송주를 단유소가 처음 구해주던 당시에 진평도 옆에 있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마신교는 이중 첩자를 활용해서 알아낸 모양이야.]

[역시 그들도 만만치 않군요. 어쨌거나 신룡대와 흑풍대가 파악한 곳이 같다면 조장님 말씀대로 적이 파놓은 함정은 아니겠군요.]

[그렇겠지. 다만 이제는 진입한 후를 조심하면 될 거야. 아무래도 유사시에 거점을 빠르게 정리할 용도로라도 함정을 설치해두긴 했을 테니, 그것만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에 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두 사람이 말한 함정의 의미는 달랐다.

진평이 말한 건 전략 전술 측면에서의 함정이었고 단유소가 말한 건 시설물 측면에서의 함정이었다.

[잠시 후에 제가 가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유굉 대사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평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단유소에게 내밀었다. 단유소가 보니 전서가 담긴 대나무 통이었다.

신룡대의 전서응들에 사용되는 전서용 대나무 통은 일반 전서구에 쓰이는 대나무 통보다 더 크다. 단유소가 보니 신룡대 전용이었다.

진평이 전음으로 말했다.

[이번에 날아온 전서는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대원 전체 열람 가능 등급인데, 나머지 하나는 보시다시피 조장님만 확인 가능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단유소가 통을 받아서 보니 과연 종이로 봉인된 전서통의 접합 부위에 묵룡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진평이 말을 이었다.

[제가 확인한 전서에는 적들의 다른 거점으로 추정되는 지역과 정보가 적혀 있었습니다. 정협단을 도운 후, 그곳으로 이동하여 조사를 하라는 내용입니다.]

[어디지?]

[하남 북부와 산동 북서부입니다.]

그 말에 단유소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단유소의 표정을 확인한 진평이 말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 보군요. 이곳은 산서이고 방금 말씀드린 지역은 하남과 산동입니다. 그 세 지역은 공통적으로 한 지역과 인접해 있습니다.]

[하북이지.]

[그렇습니다.]

단유소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자, 그의 기색을 살피던 진평이 말했다.

[너무 생각이 앞서 나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일단 하남과 산동을 조사해본 후에, 그 결과가 확실히 하북을 가리키는지도 확인해봐야 합니다. 그 후에는 하북을 조사해서 또 확인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연후에야 우리가 우려하는 상황인지를 가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평이 앉아 있던 가지 위에서 살짝 뛰어내리더니 말했다.

[그럼 저는 아까 말씀하셨던 내용에 대해 보고하러 가보겠습니다.]

[수고해.]

그러자 진평이 막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말했다.

[참! 이번에 날아온 전서 말씀입니다만, 서체가 바뀌었더군요. 우리가 수년간 봐왔던 그 서체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번에도 명필이긴 한데, 서체가 섬세하고 우아한 느낌입니다. 여인이 쓴 것처럼.]

이전까지 상부에서 신룡대에 보내던 전서에는 행서(行書)가 사용되었는데, 천하에서도 보기 드문 명필이었다.

단유소는 그것이 문상 제갈윤의 서체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참고로 공문서 등을 통해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제갈윤의 서체 역시 명필로, 그 경우에는 깔끔한 해서(楷書)로 적혀 있다.

공문서에 쓰인 제갈윤의 해서체와 신룡대로 날아오는 행서체는 마치 다른 사람이 쓴 듯 매우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단유소가 전서통의 접합 부분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니 과연 진평의 말대로였다. 아까는 진평과 대화 중이라서 대충 확인했고 워낙 작은 글씨였기에 서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쉬십시오.]

진평이 저만치 멀어지자 단유소가 천천히 전서통의 봉인을 뜯었다.

그 안에 둘둘 말린 전서가 들어 있었다. 단유소가 그것을 꺼내어 펼쳤다.

작은 전서 쪽지 안에 깨알같이 많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의, 보기 드문 명필.

감히 제갈윤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놀라운 필체였다.

하지만 정작 단유소를 놀라게 한 건, 전서의 초반 부분에 적혀 있는 두 문장 때문이었다.

단언컨대 단 공자님이 만들어준 이 가락지는 제 인생 최고의 선물일 거예요.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목에 걸고 있는 이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면, 멀리 있는 단 공자님이 마치 곁에 있는 듯, 마음이 안정된답니다.

단유소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전서의 중간 내용을 빠르게 지나쳐 끝부분을 확인했다.

당신의 설연.

그랬다.

서신을 보낸 이는 한설연이었다. 놀랍게도.

단유소가 눈을 감고 뒤통수를 나무 기둥에 기대었다.

가슴이 떨려왔다.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당장에라도 내용을 확인하고 싶지만, 이 설레는 기분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었다.

그나저나 의문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다른 조직도 아니고 신룡대의 전서다. 신룡대에 연관된 사람들, 즉 무림맹에서도 핵심 인사들만이 관여할 수 있는 전서였다.

아무리 그 유명한 현월곡의 교월이라지만 사적으로 이런 걸 보내달라는 부탁 같은 게 통할 리도 만무했다. 신룡대는 그런 조직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하던 단유소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의 글씨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갈윤과 한설연을 보면,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은 적어도 자신의 주변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특히 한설연의 서체는 그 생김새만큼이나 우아했다. 자신이 콩깍지가 씌어서 더 이렇게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놀랐죠?

지금 단 공자님은 아마도 내가 어떻게 이런 서신을 신룡대의 전서를 통해서 보낸 건지 의아할 거예요.

일단,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보내는 것이니 안심해도 돼요. 물론 이런 사적인 내용의 서신을 보내는 건 약간의 규정 위반이긴 하지만.

전에 말했었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요즘 문상 어른의 일을 돕고 있거든요. 과분하게도 제 역량을 인정해주시고 저를 신뢰해주셔서 즐겁게 일을 돕고 있어요.

이렇게 서신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문상 어른께서 혈천맹 건으로 요새 워낙 바쁘셔서, 약간의 업무를 제게 나눠주셨거든요. 그중에 신룡대의 업무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 거고요.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강호를 경험하면서 많은 것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본인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문상부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런 마음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덤으로 이런 서신도 보낼 수 있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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