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54화 (154/200)

154화. 송주와의 조우 (5)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홍련이 물었다.

“그래도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다면 무림맹주가 대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그 근처를 본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발걸음이었을 텐데 마음껏 드시다 가시게. 돌아가면 교주에게 안부도 전해주고.”

“설마…….”

“그래. 그때 맹주가 내게 했던 전음 그대로를 읊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는 그곳에서 아무런 위험 없이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맹주가 주변의 누군가에게 내 존재에 관해 한 마디라도 했다면, 내가 그곳을 빠져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겠지.”

정파인들이 천마신교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처럼 천마신교에 소속된 사람들도 정파인들을 혐오한다. 위선자들이라며 무조건적으로 혐오한다. 당장 자신도 지금껏 그런 생각 속에 살아왔다.

그런데 묵룡과 무림맹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적어도 모든 정파인들이 그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사람은 분명히 적대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인데, 그들이 대주에게 보였던 모습들은 왠지 멋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주가 왜 그들과 원수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건지도 충분히 공감이 갔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걷는 와중에 홍련은 틈틈이 송주를 바라보았다.

대주와 이렇게 나란히 걷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원래는 뒤에서 걸어야 한다. 오늘은 오누이 신분으로 위장했기에 이렇게 옆에서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옆에서 걸으니 표정이 보여서 그런가?

오늘의 대주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주의 입가에 피어 있는 미소도 보기 좋았다. 그래서 자꾸만 그의 옆모습을 보게 된다.

저 표정,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송주가 고개를 끄덕였고 홍련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아까 묵룡이 우리를 제거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결과가 어찌 되었을 것이라 예상하십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송주가 대꾸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았을 것이고, 너는 지금쯤 주검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둘 다 살았겠지.”

“그, 그 정도라니…….”

그러자 송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 띤 얼굴로 홍련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누구든 한 사람은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살아 있는 사람은 무조건 너였을 것이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홍련이 놀라서 걸음을 우뚝 멈췄고, 송주는 계속해서 걸었다.

홍련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은 송주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시나요, 대주님?

제가 이를 악물고 이 자리까지 온 이유가 대주님을 가까운 곳에서 보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물론 대주님이 제 이런 마음을 알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감히 대주님의 마음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 정도 거리에서 대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리고 방금 하신 말씀은 틀렸습니다.

만약 우리 둘 중 한 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어떤 경우에든 살아남을 분은 대주님이 될 겁니다.

반드시.

* * *

단유소가 다시 탁자로 돌아와서 앉자마자 선화란이 전음으로 물었다.

[아까 그 송 공자와 홍련이라는 사람들, 대체 누구야? 친구라고는 하는데 왠지 분위기가 묘해서 섣불리 말도 못 꺼내겠고,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구.]

[잘했어.]

[아니, 그런 말 들으려는 게 아니라.]

그 말에 단유소가 선화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민이 되었다. 그녀에게 송주의 정체에 대해 말해주는 게 좋을지, 아닐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송주가 선화란의 정체를 눈치챈 이상, 선화란 본인도 송주와 홍련이라는 여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다음에 마주쳤을 때, 그녀도 그녀 나름의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아까 그 친구의 이름은 송주야.]

선화란이 대꾸했다.

[아니, 뭐 이름보다는 서로 어떤 관계랄지…….]

말을 하던 선화란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송주.

분명히 평범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 매우 유명한 사람이 한 명 있긴 있었다.

우는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한다는, 무시무시한 위치에 있는 자. 바로 현 천마신교 흑풍대주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금 전에 만난 송 공자, 즉 송주라는 사람이 그 흑풍대주일 리는 없었다.

그는 전혀 강해 보이지도 않았던 데다가, 무림맹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단유소가 적대 세력의 핵심 인물인 흑풍대주와 친구일 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만났던 송주가 흑풍대주 송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단유소의 표정 때문이었다. 진지할 때에 그가 짓는 표정이었다.

선화란이 단유소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아니지?]

[맞을걸?]

[푸흡! 설마아.]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정말…… 이라고?]

이번에도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 침묵의 의미는 하나였다.

선화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말도 안 돼! 방금 전의 그 송 공자가, 그 흑풍대주 송주라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여전히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어떻게 무림맹의 신룡대를 대표하는 당신이 천마신교 흑풍대의 수장인 그와 친구 관계일 수가 있냐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단유소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턱을 괸 채, 어두운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거 혹시, 어렸을 때의 단짝 친구 사이가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적대 세력의 핵심 인물들이 되어 다시 만난다는, 뭐 그런 식의 전개였던 거야?]

[당신, 신룡대 그만두면 이야기책 써. 내가 볼 땐 제법 소질이 있어.]

[아니, 그것도 아니면 대체 뭐야? 어떻게 두 사람이 친구 관계일 수가 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어?]

그렇게 물은 후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선화란이 다시 전음으로 물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구해준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다고 했었지. 그거 진짜였어?]

[응.]

[아하! 그 사람이 흑풍대주인 걸 모르고 구해줬던 거구나?]

[구해주기 전에도 그가 마교인인 건 눈치채고 있었어. 아마도 흑풍대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의 수하들이 그를 대주님이라고 부르더군.]

[그런데도 구했다고? 왜? 상대가 흑풍대주라는 걸 알면서도, 대체 왜?]

그러자 단유소가 여전히 턱을 괸 상태에서 대꾸했다.

[그들은 다른 사악한 놈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었어. 원래는 나도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었지. 일석이조잖아. 임무대로 나쁜 놈들도 타격하고, 덤으로 흑풍대도 잡고.]

[당연하지.]

[한데 송주 그 친구가 말이야.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수하들이라도 살리고자 몸을 던지더라고. 어차피 상황이 글렀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본인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수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거야. 처절할 정도로.]

[그 정도면 도와줄 가치가 있다? 그래서 마음이 움직였다? 대상이 천마신교의 흑풍대주인데도?]

그러자 단유소가 턱을 괸 상태에서 고개를 틀더니 선화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 일 하면서 당신도 봐온 게 있으니 알겠지. 백도인들 중에 그 정도로까지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아랫사람을 돌보려는 사람, 당신은 몇 명이나 봤지?]

선화란은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뭐라고 대꾸해주고 싶지만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몇 명을 꼽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단유소가 전음을 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봐온 백도인들은 말이야. 정(正)과 협(俠)과 의(義)라는 말로 본인의 모든 불순한 행위들을 정당화시키려는 버러지들로 넘쳐나. 힘이 있는 자들일수록 더 그래. 자신만 옳고 남은 다 그르지. 힘 있는 문파에 소속되어 있거나 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무슨 벼슬로 알며,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당연하다는 듯 업신여기지.]

단유소의 평이한 어조로 전음을 이었다.

[어떻게든 상대적 약자들을 이용하여 본인의 이득만을 취하려는 양아치들로 넘쳐난다고. 뒤로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짓은 다 벌이면서, 입으로는 정과 협과 의를 외쳐대는 역겨운 자들로 넘쳐난다고. 나는 이 일 하면서 그런 자들을 수도 없이 돕고, 살렸지.]

단유소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소였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떤 쪽이 더 살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나는 그때, 앞서 말했던 종류의 백도인들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면, 비록 적이지만 송주와 같은 친구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선화란은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던 중에 단유소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겠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적대 세력을 도운 거니까. 혹시 그 일로 문제가 된다면 죗값을 치러야겠지. 하지만…….]

단유소가 잠시 말을 줄였고, 선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적어도 그를 살려놓은 일로 후회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결과론적이고 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때 송주를 도와줬던 건 잘한 일이었다.

청룡단의 변절로 인해 한설연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만약 송주와 흑풍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없었을 테니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선화란이 식은 차를 홀짝 마시더니 물었다.

[아까 송 공자 그 사람이 흑풍대주면, 옆에 있던 홍련이라는 소저는 흑풍대원이겠네? 그렇게 단아해 보이던 여인이 흑풍대원이란 말이야?]

그러자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대꾸했다.

[홍련은 무슨. 혈련(血蓮)쯤 되겠지. 그 친구들, 별호 그렇게 고상하게 안 지어. 강해 보이고, 무서워 보이게 짓지.]

홍련은 붉은 연꽃이고 혈련은 피의 연꽃이다. 피의 연못에서 자란 연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비슷한 붉은 색인데도 하나는 우아하게 느껴지는데 반해, 하나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여자, 대원 아니야. 부대주쯤 될 거야.]

그 말에 선화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던 거였다. 그 정도의 고수들이었기에 자신이 그들의 경지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나저나 자신이 흑풍대주, 그리고 흑풍대 부대주와 함께 밥을 먹었다니.

아직도 그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 참! 그 사람들! 아까 술 마시면서 마교 욕하던 그 사람들 말이야. 위험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도 아닌 흑풍대주 앞에서 대놓고 마교 욕을 한 거잖아.]

그러자 단유소가 또다시 피식 웃었다.

[호들갑 떨지 마. 그럴 일 절대로 없으니까. 흑풍대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우매한 행동을 할 리도 없고, 그들에게도 그건 그저 일반인들의 이야기일 뿐인 거야. 중원의 어디에 가든 들을 수 있는. 만약 마교인들이 본인들 욕하는 일반인들 다 척살하고 다녔다면, 매년마다 정마대전이었을 거야.]

[아. 그, 그런가……?]

선화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후로 한동안 말이 없다가, 선화란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이 흑풍대주의 정체를 알고도 그를 도왔다는 사실, 몇 명이나 알아?]

[우리 조원들하고 당신 정도.]

[왜 굳이 나한테 사실대로 말한 거야? 그냥 흑풍대주를 도왔을 당시에는 그의 정체를 전혀 몰랐다고 둘러댔어도 됐잖아.]

그러자 단유소가 잠시 선화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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