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송주와의 조우 (4)
홍련은 송주의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송주는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밤길을 걷는 중이었는데, 생각에 깊이 잠긴 모습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그의 상념을 방해할 수는 없는 탓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더 걸었을 때, 전방에 시선을 둔 채로 송주가 문득 물었다.
“궁금하냐?”
“예……?”
“아까 그 친구 말이다. 궁금해서 계속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아니냐.”
“아, 예…….”
네댓 걸음을 옮긴 후에 홍련이 말했다.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대주님께서 그분을 대하시는 태도가…….”
자신의 이 상관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흑풍대를 꽉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주는 일 처리가 확실하고, 조직 관리가 뛰어나며, 쓸데없는 정치 놀음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평소 말수가 많지도 않고 웃음이 많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사근사근하게 대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천마신교 내에서 지위가 더 높은 인물들에게도 비위를 맞춰주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교주와 총군사를 포함한 교의 수뇌부가 대주를 깊이 신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까 속으로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대주가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던 탓이다.
대체 상대가 누구기에 이 대단한 대주가 그런 식으로 대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했었다. 궁금한데, 그 자리에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필요했다면 대주가 먼저 자신에게 상대의 정체를 알려줬을 테니까.
어쨌거나 대주가 그런 태도를 보이며 대하는 상대라면 분명히 특별한 사람일 터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가만히 지켜보다 보니 감이 왔다.
어렴풋이 짐작될 뿐이지만, 상대가 대단한 고수일 것이라는 본능적인 감이.
“누굽니까, 그는…….”
그 질문에 송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홍련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옆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송주가 말했다.
“그는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왠지 나머지 한 사람은 교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교주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까.
홍련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송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강호에서 내가 절대로 원수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기도 하지.”
절대로 원수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
나머지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도 당연히 교주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 사람은 누굴까. 총군사 마연문일까?
어쨌거나 중요한 건, 방금 대주가 말한 두 가지 범주 안에 아까 그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대주가 그를 높게 산다는 뜻이었고, 또 그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까 생명의 은인 이야기를 할 때 너무 가벼운 분위기에서 말씀하시기에, 으레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과장된 표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던 겁니까?”
홍련의 물음에 송주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 상태로 몇 걸음을 더 옮기다가 송주가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백도인들 중에서 누군가가 흑풍대주인 나를 처치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가 얻는 명성은 어느 정도일까?”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홍련이 주춤했다.
이윽고 홍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흑풍대주라는 위치와 그 파급력을 생각할 때, 일약 백도의 영웅으로 등극할 겁니다. 백도인들의 속성상, 누군가를 영웅시화하는 걸 특히 좋아하잖습니까.”
송주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오 년 전이었지. 그때 나는 흑풍대주 초임 시절이었다. 새외 무림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어, 흑풍대 두 개 조를 이끌고 직접 그곳을 조사하러 갔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빠졌었지. 그 순간에 그와 마주쳤던 거고.”
“하면 그때 그분이 대주님을 구했다는 것이군요.”
“그랬지.”
아까 그를 대하던 대주의 태도가 이제야 비로소 이해되었다.
“우리를 구해준 후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갔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니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떠나갔지. 그 후에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제야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함정에 빠졌던 대주를 구해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역시나 대단한 고수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던 송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묵룡이었다.”
“헙……!”
홍련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자동적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그 묵룡……, 말씀이십니까?”
송주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럴 수가.
아까 그 사람이 그 유명한 묵룡이었다니.
묵룡이라는 인물에 대한 흑풍대원들의 시선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본디 흑풍대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교육받는 게 바로 이 강호의 무공 고수들에 대한 서열과, 흑풍대 자체에서 작성한 요주의(要注意) 인물들에 대한 서열이다.
두 서열록 사이의 순위는 매우 다르다.
일례로, 무림맹주 백리우의 경우, 강호 고수 서열에는 정점에 있지만, 흑풍대의 요주의 인물 서열에서는 오십 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흑풍대의 요주의 인물 서열은 흑풍대가 실제로 현장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쓰기 위해 만든 서열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서열록에는 천마신교에 소속된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다.
*묵룡.
직위 : 무림맹 신룡대 묵룡조장.
본명 : 밝혀진 바 없음.
성별 : 남(男).
연령 : 이십 대 중후반으로 추정.
출신 : 밝혀진 바 없음.
가족 관계 : 밝혀진 바 없음.
사문 : 밝혀진 바 없음.
무공 연원 : 밝혀진 바 없음.
병기 : 장검, 쌍소검.
추정 무공 수위 : 상상중(上上中).
조우 시 대응 방침 : 즉각 산개 이탈.
이게 바로 흑풍대 요주의 인물 서열록에 적혀 있는 묵룡에 관련된 정보였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 서열록에 적혀 있는 정보 그대로다.
위의 정보는 요주의 인물 서열록의 첫 장에 기록되어 있다.
즉, 묵룡이라는 인물이 바로 흑풍대 자체에서 평가하는 최고의 요주의 인물인 것이다. 참고로 거의 모든 신룡대원들에 대한 정보가 저렇듯 ‘밝혀진 바 없음’으로 처리되어 있다.
요주의 인물 서열록을 처음 접한 신입 흑풍대원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점이 있다.
묵룡의 추정 무공 수위가 상상중이라면, 흑풍대주의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다.
신입 대원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만, 선임들은 거리낌 없이 답해준다. 가감 없이 대꾸해주라는 게 대주의 방침이기 때문이다.
상중상(上中上).
그게 대주가 밝히는 스스로의 솔직한 무공 수위였다.
무공 수위를 편의상 스물일곱 단계로 나눴을 때, 대주는 상위 사 등급, 묵룡은 상위 이 등급인 것이다. 소위 구파일방이나 팔대세가가 내세우는 최고 고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등급이 바로 상중상 등급이었다.
“저거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야. 영광으로 알아.”
아까 대주가 왜 그 말을 했었는지도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적아를 떠나서, 묵룡이라는 무인이 인정해줬다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홍련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송주가 물었다.
“놀랐나?”
“예……. 대주님의 친우라는 분께서 설마 그 묵룡일 것이라고는…….”
송주가 씩 웃어 보였다.
잠시 후, 홍련이 물었다.
“말씀을 듣고 나니 의문스러운 점이 생겼습니다.”
송주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의 뜻을 표하자 홍련이 말했다.
“대주님과 흑풍대원들이 함정에 빠졌을 때 그분은 대주님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그때 그분은 왜 대주님과 흑풍대를 도와줬던 겁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아까 했던 말씀처럼, 그분은 백도 내에서 평생 영웅으로 대접 받으며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나도 그게 궁금했었다. 우리가 함정에 빠졌을 당시에 그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우리들 전부를 처리할 수 있었거든. 만약 그랬다면 흑풍대주인 나를 비롯해 일조와 이조는 전멸했겠지.”
송주가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도왔고, 우리는 전원 생존, 귀환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봤더니, 그는 별생각이 없었다고만 대꾸하더군. 그래서 나도 여전히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지.”
잠시 말을 멈추었던 송주가 객잔을 나선 후 처음으로 홍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아군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 친구라는 사실이다. 나도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살다 보니 그런 희한한 관계가 생기기도 하더구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한동안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가 송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너까지 그에 대해 고마운 감정이나 호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내 입장과 네 입장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그에게서 은혜를 입은 입장이니 이러는 것이지. 네 입장에서 그는 당연히 적대 세력의 경쟁 조직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다만, 너도 이제 부대주이고 관리자이니 명심해야 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신룡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묵룡이 신룡대에 남아 있는 한, 절대로 신룡대와는 검을 섞지 마라. 관리자라면 모든 정황을 젖혀두고 조직의 안위와 미래를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구성원들의 안위를 포함해서.”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걷던 중에 홍련이 말했다.
“아까 대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송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홍련이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대주님이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두 분 중 한 분이 묵룡이라 하셨습니다. 다른 한 분은 혹시 교주님이십니까?”
송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홍련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대주님이 이 강호에서 절대로 원수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은 분들은 세 분이라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한 분은 묵룡이고, 제가 짐작하기에 또 한 분은 역시, 교주님이실 것 같습니다.”
“맞아.”
“하면 마지막 한 분은 누구십니까? 혹시 총군사님이십니까?”
그 말에 송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
“총군사님이 아니라면 어떤 분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송주가 콧바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내가 흑풍대 제일조의 부조장이었을 때였다. 당시에 무림맹 본맹의 외성에서는 큰 축제가 열리고 있었지. 나는 조원 한 명과 함께 그곳에 잠입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적진의 중심부이긴 하나 수많은 방문객들로 넘쳐났기에 크게 위험한 임무는 아니었다. 그저 첩보 임무일 뿐이었으니까.”
송주가 말을 이었다.
“때마침 방문객들을 환영하기 위해 무림맹주가 등장했다. 외성은 온통 환호성으로 가득했지. 그 유명한 무림맹주를 직접 보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었던지라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채로 그의 행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걸음을 옮기던 맹주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거야.”
“헛!”
“소름이 돋더구나. 온몸의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놀람과 공포에 휩싸여서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