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송주와의 조우 (2)
서백풍은 차원이 다른 고수다.
그쪽 방면에서만큼은 천하 오대 고수로 꼽는다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바람둥이계의 일대 기린아가 바로 서백풍이다.
호리호리하고 길쭉한 신체에 타고난 생김새.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짧은 순간에 여인의 성향을 감별하는 귀신같은 판단력.
거기에 더해서 여인이 마음을 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물이 흐르는 듯 능수능란한 말발.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수많은 여인들을 두루 섭렵했음에도, 단 한 번도 그녀들로 인해 분란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특유의 연애 기술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단유소가 속으로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우리가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또 사고 치겠어?’
어차피 그 부분은 제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단유소가 그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순간, 객잔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단유소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선화란이 보니 그들은 일남일녀였다.
사내는 백의 차림에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고, 여인은 홍의 차림에 면사를 착용했으며 신장은 평균보다 작고 몸매는 호리호리했다.
옷차림이 제법 고급스럽긴 하지만 기도 자체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선화란이 물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들이야?]
[글쎄. 아무튼 당신은 신경 쓸 것 없어.]
선화란이 곁눈질로 보니, 사내가 객잔 안을 쓱 훑어보더니 시선을 단유소 쪽으로 고정하는 게 아닌가.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시 후 선화란이 다시금 단유소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신경을 안 쓰려도 해도 말이야. 저 사람들……,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단유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두 남녀가 단유소와 선화란이 있는 탁자 앞에 섰다.
“뭐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네?”
“그렇군.”
“뭐야 이거. 나만 반가운 건가? 친구도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당연히 반갑지.”
감정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특유의 어조로 단유소가 그렇게 대꾸했다. 얼핏 보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느낌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백의 사내는 빙그레 웃을 뿐 관여치 않았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이고 하니 합석이나 할까? 보아하니 친구도 아직 식사 전인 것 같은데.”
사내가 그렇게 말하더니 선화란을 향해 정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되겠지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선화란이 단유소를 향해 눈짓을 보내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단유소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나 선화란의 옆자리로 옮겼다. 그 모습에 백의 사내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백의 사내가 이내 단유소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래 단유소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면사를 쓴 홍의 여인이 앉았다.
“일단 주문부터 좀 추가하고.”
백의 사내가 그렇게 말하더니 점소이를 불러서 식사를 추가했다.
사내는 생각보다 많은 음식들을 주문했다. 마지막에 점소이에게 음식을 최대한 빨리 준비해달라며 동전 몇 닢을 찔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식가였나?”
단유소가 묻자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고마운 친구인데, 부족함 없이 접대해야겠다는 생각에 푸짐하게 주문한 거지. 나도 나름대로 얼굴에 철판 깔고 억지로 합석한 거야. 괜히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고민 좀 했다고.”
“고민을 한 것치고는 너무 거침이 없던데.”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친구한테 식사 한 끼 제대로 대접해보겠어. 일생에 흔치 않은 기회이니 결론도 빨리 난 거지.”
“그런 비싼 음식들도 척척 시키고. 월봉이 센가 봐?”
“남부럽지는 않은 수준이지.”
선화란이 보아하니 단유소는 백의 사내하고만 아는 사이일 뿐, 여인과는 모르는 사이인 것 같았다. 즉, 이곳에서 서로 아는 관계는 단유소와 백의 사내뿐인 것이다.
백의 사내가 단유소를 대하는 모습을 보니 겉으로만 호의를 보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호의가 있어 보였다. 단유소의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맞춰주려고 하는 느낌이랄까.
그에 반해 단유소는 전혀 백의 사내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아니었다. 대부분 짧은 대꾸로 일관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단유소 또한 백의 사내를 극도로 경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친구 사이인 듯한데, 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저런 걸까.
그렇기에 선화란은 백의 사내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때마침 백의 사내가 말했다.
“이런, 처음 뵙는 소저에게 우리 쪽의 소개도 드리지 않았군요. 일단 이쪽은 홍련이라 하고, 저는 그저 송 모(宋某)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홍련(紅蓮).
붉은 연꽃이라는 뜻의 예쁜 이름이었다.
마침 여인이 입고 있는 옷도 홍의였으니 이름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소가 선화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화란(華瀾).”
단유소가 간단하게 소개를 마쳤다. 홍련이라는 여인에게는 본인을 소개하지도 않았다. 마치 송 모라고 본인을 밝힌 백의 사내에게 알아서 들으라는 투였다.
어차피 선화란도 가명인데 또다시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다는 건, 단유소가 백의 사내에게 최후의 경계심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백의 사내가 대꾸했다.
“꽃의 물결이라.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화 소저.”
“아, 감사……, 합니다.”
서로 이상한 소개였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무슨 일을 하고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디에 산다거나 하는 말들을 간단하게라도 덧붙이는 게 보통인데, 이들은 서로 그런 게 없었다. 그리고 상호 간에 굳이 그런 걸 묻지도 않았다.
백의 사내가 단유소에게 물었다.
“어떤……, 사이신가?”
“일행이야. 당분간 함께하게 된.”
“아하. 그러니까 내가 따로 신경 써야 할 정도의 특별한 관계 같은 건 아닌 거지?”
당연하다는 듯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 들어보니 크게 한바탕했던 것 같던데. 일전에 우리 만났던 후에 말이야.”
송주는 지금 청성산에서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청성파의 일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흑풍대주인 송주가 모를 리 없었다.
단유소가 희미하게 미소만 보이자 송주가 물었다.
“그때 그 소저는 무사하지?”
송주는 한설연의 안위를 묻고 있었다.
단유소가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더니 미지근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송주에게 말했다.
“대동한 부하 중에 여인은 처음 보는 것 같군.”
선화란은 단유소의 그 말이 의아했다.
보아하니 단유소도 홍련이라는 여인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녀가 백의 사내의 부하라고 확신하듯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주가 대꾸했다.
“원래 몇 명 있긴 있어. 이 친구가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친구야.”
단유소가 홍련이라는 여인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이상일 것 같군.”
그러자 송주가 홍련이라는 여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거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야. 영광으로 알아.”
“아, 예…….”
일단 대답은 했지만 홍련이라는 여인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여전히 영문을 모르기는 선화란도 마찬가지였다.
내면의 답답함을 억누르며 선화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속 듣고 있다 보니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실례지만 송 공자님은 무슨 일을 하는 분이신가요?”
“칼잡이야, 칼잡이.”
대답한 이는 단유소였다. 그러자 선화란이 단유소를 향해 물었다.
“무인?”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백의 사내가 했다.
“예, 뭐……. 변변찮지만 일단은 저도 무인입니다.”
솔직히 무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혀 무공을 익힌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홍련이라는 여인이 무인 같았다. 그녀가 아마도 백의 사내의 수호위쯤 되나 보다 하고 여겼었다.
“아하. 그럼 두 분은 서로 어떻게 알게 된 사이신가요? 친구 사이인 건 알겠는데, 어떤 친구 관계랄지.”
백의 사내에게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단유소에게서 나왔다.
“그냥 오다가다 만난 사이야.”
그러자 백의 사내가 곧바로 부연 설명을 했다.
“저 친구가 저를 구해주면서 시작된 인연입니다. 그 후로 우연히 가끔씩 마주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지요.”
“생명의 은인?”
“예.”
“아하. 그랬군요.”
선화란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쯤,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앞서서 단유소와 선화란이 먼저 주문했던 간단한 음식들이었다.
“전채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드시고 계십시오. 이분 공자님께서 주문하신 음식도 바로 나옵니다요.”
네 사람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먹는 동안에도 단유소와 송주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두 사람은 따로 전음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흑풍대가 이곳엔 어쩐 일이지?]
[친구가 예상하고 있는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단유소는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마신교에서도 혈천맹의 꼬리를 밟았다는 뜻이었다. 무림맹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면 천마신교라고 해서 못 알아낼 리 없었다.
어쩌면 천마신교에서 먼저 알아냈을 가능성도 높았다. 일전에 만났을 때 눈치챘듯, 천마신교라면 혈천맹에 이중 첩자를 심어뒀을 테니까.
섣불리 움직이면 매우 위험한 게 이중 첩자이니만큼, 그들이 신중하게 움직였다면 지금쯤 슬슬 결과물이 나올 때도 된 것이다.
송주가 전음을 보냈다.
[솔직히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먼저 이쪽에 관한 정보를 캐냈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그 정보를 담아 무림맹에 전서를 날렸는데, 그 전서가 날아가는 동안에 이미 무림맹 쪽에서 전서가 날아왔다더군. 우리가 알아낸 것과 비슷한 정보가 담긴 전서가. 무림맹이 약간 빨랐던 거지.]
[그쪽에서도 조사를 통해 알아낸 건가?]
[아니. 조사도 했지만 알아낸 건 다른 방식을 통해서였지. 아마도 친구가 예상하고 있는.]
단유소가 예상했듯이 이중 첩자를 통해 알아냈다는 뜻이었다.
송주가 음식을 한 차례 입안에 넣은 후에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덕분에 오랜만에 총군사 어르신한테서 꾸지람 좀 들었지.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기에 매번 무림맹보다 반걸음씩 늦는 거냐고 타박하시더군. 아마도 일전에 정마협정 건에서는 본 교가 무림맹에 주도권을 내주고 시작했기에, 이번에는 본 교에서 먼저 뭔가를 내밀 생각이셨나 봐. 그러면서 교주님의 체면도 좀 세워드리고.]
그것도 무림맹과 천마신교 사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수 싸움이자 주도권 싸움이었다. 한쪽이 선수를 칠수록 다른 한쪽은 그만큼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계속 주도권을 내줄 경우, 중요한 순간에 더 많은 패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고수들의 싸움이다. 무림맹과 천마신교라는 일대 고수들의.
[솔직히 억울하더군. 이번에야말로 분명히 우리가 빨랐다고 자신했거든. 그때 뇌리에 딱 떠오른 사람이 바로 친구였지. 무림맹이 우리보다 더 빨랐다면, 그건 바로 친구가 움직였기 때문일 테니까. 이전에도 늘 그랬듯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에 송주가 농담조로 말했다.
[하여간 내 인생 최대의 골칫거리야, 자네는.]
[그러고 보니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 건 아닌지 확인도 안 했군.]
단유소도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대꾸했다. 농담으로 받아친 것이다.
[나도 자네가 그런 어설픈 개수작이 통할 상대였으면 좋겠어. 그러면 이쪽 바닥은 완전 내 세상인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