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송주와의 조우 (1)
그때 산 아래쪽에서 정찰로를 확보하고 있던 정협단원 중 한 명이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보고드립니다. 의천각의 백풍단에 소속된 요원들이 단주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백풍단이라면 무림맹을 대표하는 첩보 조직이었다. 의천각 산하에 있으니 문상 제갈윤의 수하들인 셈이다.
유굉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라 하게.”
잠시 후 세 명이 유굉 대사 쪽으로 다가왔다.
선두에 선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유굉 대사를 향해 포권하며 예를 취했다.
“정협단주님을 뵈옵니다. 저는 의천각 백풍단 소속 특수첩보조의 조장인 길평(吉平)이라 합니다. 이쪽은 각각 조원인 금추, 장찬입니다. 저희들은 산서 지역에서 활동하며 첩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어서들 오시게. 유굉일세. 그렇지 않아도 문상에게서 백풍단의 요원들이 도울 것이라는 전서를 받았었네.”
유굉 대사가 그렇게 대꾸하면서 보니, 세 사람 모두 수준급의 고수인 듯했다. 기운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모두가 절정 이상의 고수인 듯했다.
특수첩보조.
명칭만으로도 뭔가가 있어 보이는 만큼, 조원들의 무공 수준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저 정도 실력들은 갖고 있어야 특수한 첩보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 사람은 각각 새로운 신분으로 위장한 신룡대 묵룡조의 진평과 곽승추 그리고 황룡조에서 서열상 셋째인 장찬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정협단주라는 호칭은 아직 부담스러우니, 그냥 대사라고 불러주게나.”
“알겠습니다, 대사님.”
진평이 그렇게 대꾸하자 유굉 대사가 물었다.
“그래. 이따가 본진으로 합류해서 인사를 나누어도 될 일이었는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듯한데…….”
“이왕 단주님 아니, 대사님께서 직접 정찰을 나오신 김에, 며칠간 저희들이 저곳을 주시하며 알아낸 바를 보고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현장을 직접 보며 보고를 들으시면 이해가 훨씬 빠를 것이라 생각되어.”
“아. 그렇군. 잘했네. 먼저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자네들이 판단하기에는 저곳이 적의 거점인 것 같은가?”
그러자 진평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몇 시진 동안 저곳을 주시했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지 못했네. 전서구의 이동도 없었는데, 자네들은 확실한 증좌를 발견한 건가? 아, 참고로 나는 점창의 원광생일세.”
“아, 이번에 제오대주님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네.”
원광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평이 대꾸했다.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자면, 일단 이 위치에서는 절대로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런가?”
“출입구가 교묘한 위치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낮에도 출입이 잘 노출되지 않는데, 가뜩이나 저들은 횃불도 없이 밤에만 드나들기에 더욱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서도 밤에만 날리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아.”
정협단의 수뇌들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천각의 특수첩보조라더니 역시.’
믿음직스러웠다. 이곳의 위치가 파악된 건 겨우 이삼 일 전의 일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도 벌써 많은 것들을 파악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제갈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보다 상세한 내용들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적들은 동굴 안에 거점을 구축해놓은 것으로 보이며, 출입구는 저쪽 능선을 넘은 빽빽한 숲속입니다. 또한 이곳의 전체적인 지형상 공격 경로는…….”
진평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그는 거점을 공격할 만한 유리한 경로와, 혹여 이곳이 함정일 경우에 대비한 몇 군데의 퇴각로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모든 보고를 듣고 나자 유굉 대사가 진평을 향해 말했다.
“길 조장이라 했지? 이런 정보들을 수집하느라 그간 고생이 많았겠군.”
“임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면 적에게 발각될 수도 있으니, 일단 본진으로 복귀해서 지형도를 펼쳐놓고 마저 이야기함세. 모든 주요 인사들과 참모들을 참석시킬 터이니, 그곳에서 다시 한번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대사님. 참고로 문상 어른께서는 저희들로 하여금 정협단과 함께하며 미리 하달된 별도의 임무들을 수행하라 하셨습니다. 총원은 십일 명인데 나머지 인원들은 다른 임무를 마저 처리한 후, 나중에 본진으로 합류할 겁니다. 저희들은 정협단 본진의 근처에서 숙영하며 저희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 부분도 문상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네. 어쨌거나 추가로 알게 된 적에 관한 사안이 있으면 언제든 즉시 보고해주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 * *
아직 이른 저녁 무렵인데도 산서성 남현의 객잔 일 층은 왁자지껄했다.
평소 식사를 해도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단유소가 시끄러운 장소를 택했다면, 그 이유는 언제나 정보 수집의 목적이었다.
적의 거점에 대한 정보들을 알아냈으니, 혹시 모를 그 외의 정보들을 수집하려는 것이다.
인근이 모두 산맥과 고원인 만큼, 나무꾼, 약초꾼, 사냥꾼 등이 많았다. 그들의 사소한 대화들도 때때로 좋은 정보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진평 등을 제외한 묵룡조와 황룡조의 나머지 인원들은 이인 일조로 나뉘어 인근의 큰 객잔들에 모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정보 수집은 나눠서 하되, 안전을 위해 숙소는 같은 곳으로 잡았다.
점소이는 손님이 많아서 식사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 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중에 단유소가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선화란이 전음을 보냈다.
[그간 가만히 지켜보니까 말이야. 당신은 조장 일도 참 편하게 하는 것 같아. 어지간한 건 다 조원들에게 시키더군. 나 같으면 유굉 대사에게 보고하러 가는 것도 내가 직접 갔을 텐데…….]
이 객잔을 맡은 게 단유소와 선화란이었다.
두 사람이 투입되어 있는 객잔은 조원들이 흩어져 있는 다른 여러 객잔들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만일의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든 빠르게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조원들이 못 미더운가 보군. 내가 볼 땐 황룡조원들도 다들 알아서 잘하겠던데.]
그 말에 선화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말했다.
[나는 그저 중요한 건 뭐든 내가 직접 해야 확실할 것 같아서 그랬었어. 조원들에게서 보고를 받은 후에 내가 다시 상부에 보고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하고 나서 바로 보고하는 게 더 확실하다는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당신 말 듣고 보니, 솔직히 속으로는 조원들을 못 미더워했던 것 같네. 당신 말대로 다들 알아서 잘할 텐데.]
단유소가 피식 웃었다.
회식이 있던 날 이후, 선화란과도 제법 친분이 쌓였다.
물론 그녀가 시간만 나면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보는 통에 약간 귀찮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자신이 살짝 귀찮은 기색을 내비치면, 그녀는 금세 그걸 눈치채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곤 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한설연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질문 공세로만 따지면 한설연의 경우가 훨씬 심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하들 시키니까 편하긴 편하구나.]
특히 선화란은 요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면 금세 인정하고 수긍하곤 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최대한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자세들이 보기에 좋았다.
인간이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지금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다. 무엇을 잘하고 있고,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부족하거나 잘못되어 있는 부분을 어떤 식으로든 포장하여 위안을 삼으려 하면 안 된다. 그건 스스로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회피이니까.
아마 이번 임무가 끝날 즈음에 선화란은 많이 발전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 후에 조용히 객잔 안에서 오가는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데, 딱히 정보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틈이 나자 선화란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우리 부조장 있잖아.]
단유소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가명이겠지만, 황룡조 부조장의 이름은 이검인(李劍絪)이다. 그는 올해로 딱 서른 살의 사내였다.
부조장이긴 하나, 실력은 묵룡조에서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곽승추에 견줄 정도도 되지 않았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이검인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곽승추가 너무 강한 거였다. 모든 묵룡조원들이 그러하듯이.
선화란이 이번에는 육성으로 말했다. 몰래 재미있는 얘기라도 하듯 소곤거리는 음성이었다.
“그 친구 말이야. 겉으로 표현은 안 하는데 문혜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서로 말없이 표정만 보이고 있으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 수 있으니, 남들이 들어도 상관없는 정도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적절히 육성을 섞는 것이다.
“푸흡!”
갑작스러운 말에 단유소가 웃었다. 그러더니 대꾸했다.
“잘된 일이네. 우리 일이 좀 힘든가? 서로 이해도 해줄 수 있고 좋지 뭐. 물론 대놓고 연애질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청춘들이잖아. 이렇게 썩히기엔 아까운.”
그러자 선화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된 일이긴. 안타까운 일이지.”
“왜?”
“내가 같은 여자다 보니 문혜 그 아이랑 붙어 있을 기회가 많잖아. 그 기집애, 완전 여시거든.”
“푸흐흡! 뭐가 그렇게 여시인데?”
“기집애가 허영심도 상당히 있는 편이고 공명심도 제법 있어. 본인이 이름을 날리지 못하면 이름이 있는 남자라도 꿰차야 만족할 아이야. 눈이 높다는 뜻이지.”
얼마 전의 회식에서 가장 먼저 자신에게 술을 따라주던 호문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존경한다는 둥의 말들을 했지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것임을 단유소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선화란의 저 말이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었다.
단유소가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아직 어리잖아? 게다가 여자들은 허영심 같은 거, 어느 정도는 다 있지 않아? 남자들의 권력욕이나 허세 같은 것처럼.”
호문혜의 나이는 스물둘이다.
무공 경지는 일류의 끝자락쯤이다.
일류라고는 하나 신룡대의 특성상 작전 수행 능력은 여느 절정 고수 못지않다. 훈령생도일 때부터 애초에 그렇게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마음은 조금씩이라도 다 있지. 그래도 같은 여자가 봐도 적정하다고 생각되는 수준 같은 것도 있거든. 그런데 그 기집애는 좀 심해.”
“아직 신입이니 한참 그럴 때잖아. 그냥 귀엽게 봐줘.”
신룡대에 처음 들어온 거의 모든 신입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어린 나이에 들어온 신입일수록 더욱 그렇다.
아직 어린 나이에 그 유명한 신룡대에 들어왔으니 이미 칠 할 이상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창창한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호문혜는 나이도 어린 데다가 여인이다. 경쟁자인 사내들을 꺾고 신룡대원이 되었으니 그 자부심은 더욱 클 것이다.
아마도 호문혜는 아직까지 임무 수행 중에 죽을 고비를 넘겨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딱 한 번만 죽음의 문턱에 갔다 오고 나면, 그런 모습들이 거의 사라지게 마련이니까.
“그 기집애가 여시인 게 왜인 줄 알아? 남자들이 있는 곳이면, 절대로 본인의 그런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거야. 심지어는 우리 조원들 앞에서도 그래. 아주 불여시야.”
선화란의 다소 과격한 표현에 단유소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흐흡!”
“그래서 검인이 그 친구가 안타깝다는 거야. 그 친구의 입장에서는 문혜랑 잘되도 고생, 잘 안 되도 고생인 거지. 성실하고 부지런한 친군데. 쯥.”
둘이 잘되면 이검인은 호문혜의 그 허영심과 공명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고생, 잘 안 되면 마음고생이라는 뜻이었다.
선화란이 말을 이었다.
“아까도 봐. 교묘하게 돌려 말해가며 기어이 엽풍 그 친구랑 함께 나갔잖아.”
호문혜는 서백풍과 한 조였다.
사실, 정보 수집이 목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장 우려되는 조가 바로 그 조이기도 했다.
아마도 본래의 목적은 잊고 둘이서 희희낙락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다름 아닌 늑대와 여우의 조합이니까.
선화란이 말했다.
“보아하니 엽풍 그 친구도 한가락 하는 것 같은데, 조심하라고 해. 내가 볼 때, 문혜 그 아이의 목표가 된 듯하니까. 코 꿰었다 싶으면 답 없을 걸?”
“음…….”
단유소가 침음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심해야 할 쪽은 호문혜였다.
선화란의 얘기를 들어보니 호문혜도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지만, 상대는 ‘그’ 서백풍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