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49화 (149/200)

149화. 교월 현출 (皎月現出) (2)

호출을 받은 한설연이 문상 제갈윤의 집무실을 찾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제갈윤은 창가에서 뒷짐을 진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

한설연은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제갈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에도 저 뒷모습을 종종 봤었다.

현월곡을 방문했던 제갈윤이 돌아갈 때면, 사부는 모든 제자들을 대동하고 항상 곡의 정문까지 그를 배웅했었다. 사부가 그런 식으로 배웅하는 인물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당연하게도 백리우와 제갈윤은 항상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제갈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사부는 항상 비슷한 말을 했었다.

“제갈세가는 강호를 넘어서 일반인, 심지어는 황궁에서까지 추앙을 받는다. 그건 비단 저들의 똑똑함에 대한 경외심 때문만이 아니다. 저들이 그 똑똑한 두뇌를 이용하여 실제로도 칭송받을 만한 일들을 하기 때문이지.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그런 점이다.”

지금 제갈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사부의 그 말이 떠올랐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갈윤이 무림맹과 백도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체감하지 못했었다. 맡은 바 직책이 있으니 그저 어느 정도 수고하고 있겠거니 여겼었다.

한데 그의 곁에서 함께 일하다 보니 그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물론 요즘은 혈천맹으로 인해 특히 바쁜 시절이긴 하지만, 평상시라도 늘 바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문상부였다.

기본적인 업무량 자체가 많았다. 문상부에서 일하는 실무자들도 모두 빼어난 두뇌들인데, 그들도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바쁜데도 왜 인원 충원을 하지 않는 건지 의아했는데, 실무자 중 한 명이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시다시피 문상부는 무림맹의 두뇌 역할을 합니다. 수많은 서류들을 처리하지요. 이곳에서 직책이 가장 낮은 사람조차도 이급 이상의 중요 기밀 서류를 다루고, 직책이 높아지면 일급 기밀 서류도 수없이 다룹니다. 그렇기에 똑똑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면서도 신원과 성향이 확실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야말로 특별한 사명감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십분 공감이 갔다.

그래서인지 지금 제갈윤의 저 뒷모습이 그 누구의 뒷모습보다도 크고 대단해 보였다.

또, 고독해 보이기도 했다.

이 거대한 무림맹의 두뇌 역할을 하기 위해, 그는 지난 수십 년간 강호의 모든 일들에 신경을 기울여가며,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 했을 것이다.

최선이 아닌, 최상의 판단을 내리기 위한, 수많은 정보들과의 외로운 싸움을.

존경합니다, 문상 어른.

그리고 문상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 이제부터 저도 한번 최선을 다해서 걸어보려구요. 저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현월곡을 위해서도 아닌, 이 강호를 위해서요. 문상 어른이 그러셨듯이.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일은 할 만한가?”

여전히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태에서 제갈윤이 물었다.

“예. 부족하나마 열심히 하고 있어요. 문상부의 여러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더 수월하구요.”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또다시 밤하늘을 바라보는 채로 말이 없었다.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아요.”

제갈윤이 한설연을 향해 상체를 돌렸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문상 어른께서 숙제를 내줬었지요. 제가 그 숙제를 가져왔을 때 하셨던 말씀, 기억하세요?”

“글쎄? 내가 뭐라고 했더라?”

“그때, 제가 문상 어른과 함께 일하게 되면 ‘나름대로’라는 말을 절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언제나 최선이어야 하고, 그 최선이 최고여야 한다고 하셨죠.”

기억난다는 듯 제갈윤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그 말씀 때문에 깨달은 게 많았어요. 그리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알 것 같았어요. 우리의 사소한 결정 하나하나에도 일선에서 싸우는 수많은 무인들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요. 우리의 그릇된 결정이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갈윤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연이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문상 어른께서도……, 늘 그렇게 살아오셨겠지요. 그러니 당연히 외로우셨겠지요. 혼자서 대부분의 사안들을 끝없이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셨을 테니까요.”

“내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외롭지는 않았다네. 알다시피 맹주님도 곁에 계셨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길을 걷는 사람들의 외로움은 남이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종류의 외로움이 아니잖아요. 현월곡에 누구보다 자주 찾아오신 것도 그래서였겠지요. 그래도 사부님이라면, 문상 어른의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제갈윤이 대꾸하지 않고 한설연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미소를 지은 채였는데, 그 미소 속에 대견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 젊은 여인은, 요즘 들어 볼 때마다 자신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소저가 유추해낸 적의 거점을 신룡대로 하여금 조사하게 했네. 그리고 그곳들 중 한 곳에서 적의 주요 거점으로 예상되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네. 방금, 이번에 결성된 정협단을 그곳으로 급파하고 온 길이네.”

“아…….”

혈천맹을 상대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그렇기에 신룡대를 투입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작전에 투입된 신룡대는 묵룡조일 것이다. 시기상으로 봤을 때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에라도 그곳에 투입된 조가 묵룡조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제갈윤과 같은 사람을 상대로는 괜히 묵룡조나 신룡대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득이 될 게 없으니까.

“소저의 공이 컸네. 맹주님께서도 매우 흡족해하고 계시고. 애초에 나도 소저가 맡은 바 소임을 충분히 해내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해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네. 정말 잘해주었네.”

한설연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칭찬이 너무 과하세요. 밝혀진 곳이 아직 제대로 된 적의 주요 거점이라는 보장도 없고, 문상 어른께서도 염두에 두고 계시겠지만 함정일 가능성도 존재하잖아요. 게다가 타격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래. 그래서 정협단에도 함정일 가능성에 대해서 수차례 강조했다네. 하지만 매우 높은 가능성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네. 이쯤 되었으면 슬슬 그들의 몸체가 보일 때도 되었어. 우리가 그들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들여온 노력들을 생각하면.”

그렇긴 했다.

제갈윤이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금 신형을 창가 쪽으로 돌렸다. 그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적의 주요 거점으로 의심되는 곳이 왜 대부분 하북 방향을 가리키고 있느냐 하는 점이라네.”

“예……?”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북 지역이 왜 마음에 걸린다는 걸까?

제갈윤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아닐세.”

그러더니 제갈윤이 다시 한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나가 보게.”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셔서 부르셨던 건…….”

“아까 다 했잖은가. 소저를 칭찬해주려고 부른 거였네.”

“아…….”

민망한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있었지만, 한설연은 내심으로 매우 기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상 제갈윤의 칭찬이니 당연했다.

한편으로 부담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담 갖지 말게.”

제갈윤의 그 말에 한설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는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걸까?

한설연이 그 생각을 할 때 제갈윤이 말을 이었다.

“잠을 줄여가며 무리하지도 말게. 항상 냉철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휴식은 반드시 취하게. 무리해도 되는 건 그 다음이야. 어떤 순간에든 항상 차가운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이후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문상 어른.”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설연이 예를 취했다.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제갈윤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설연이 걸음을 옮겨 집무실의 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등 뒤에서 제갈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소저가 말했듯 이 길은 외로운 길일세. 그걸 빤히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왜 굳이 이 길을 걸으려는 건가?”

“제 자신의 명예나 현월곡의 명성에 대한 속물 근성이 조금도 없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어요. 만약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헛똑똑이 철부지였다면 아마도 그 속물 근성이 이유의 전부였겠죠. 그러나…….”

한설연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뜬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얼마 전에 제가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겨가며 겪은 이 강호는, 제 안의 세계를 온통 바꾸어놓았어요. 그 전까지 제가 누리고 있던 모든 안위가, 저도 모르는 많은 분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직접 그 일들을 겪는 와중에도 실제로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 희생하시기도 했고요.”

내막을 알고 있는 입장이니 제갈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제게는 두 종류의 빚이 남아 있어요. 마음의 빚이죠. 저를 지켜준 분들에 대한 고마움의 빚과, 그러는 도중에 희생된 분들에 대한 송구함의 빚이에요.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빚이죠. 부족하나마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그분들에 대한 빚을 갚고 싶어요. 물론 아직 미진하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수준이지만…….”

“그런가.”

“예…….”

“잘 알겠네. 나가보시게.”

“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한설연이 집무실을 나갔고, 제갈윤이 다시 신형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옅은 구름 사이로 가려져 있던 둥근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월이라…….”

제갈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하긴 이제 세가의 내실을 다질 때도 되었지.”

몇 대의 걸쳐 가주가 무림맹 문상직을 수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세가의 자체 경쟁력이 다른 세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진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일 때문이라지만, 가장이 밖으로만 나돌면 그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 것처럼.

생각에 잠긴 제갈윤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마음속으로 모종의 결정을 내린 듯이.

* * *

산서성 서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남현에서도 북쪽으로 한참을 더 들어간 빽빽한 산속.

산 중턱의 울창한 수풀 속에 여남은 인물들이 모여서 아래쪽의 골짜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두 시진째 저 골짜기를 주시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누군가가 드나드는 모습을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 하여 전서구가 날아들거나 날아가는 모습도 못 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과연 저곳이 적의 주요 거점이 확실한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원광생의 말이었다. 그는 일전에 무림맹 장로회의에 참석했던 점창파의 장로로, 이번에 정협단 제오대(第五隊)의 대주를 맡고 있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그 무엇도 확실히 단정할 수 없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만 생필품 등을 지원받는 방식으로 저 안에서 의식주를 모두 해결하고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다른 분도 아닌 문상께서 파악한 곳이라면, 시간을 가지고 꾸준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게 대꾸한 이는 모용국이었다. 그 또한 얼마 전에 무림맹 장로회의에 참석했던 인물로, 이번에 정협단 제육대(第六隊)의 대주를 맡고 있었다.

“아미타불, 원 대주의 말씀처럼 어쩌면 저곳이 거점이 아닐 수도 있소. 그러나 모용 대주의 말씀처럼 확인은 확실히 해야 하오. 이삼 일간은 대기하면서 계속 저곳을 주시하는 게 좋겠소. 만약 오차가 있었다면 그 동안 문상께서도 따로 조치를 취해주시겠지.”

유굉 대사였다. 그는 이번에 정협단주를 맡았다.

그의 말에 원광생과 모용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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