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교월 현출 (皎月現出) (1)
단유소가 대꾸했다.
“뭐, 내 생각 해주는 마음들은 고마운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자 서백풍이 답답하다는 듯 살짝 눈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에이, 또 이러신다, 우리 조장님. 누가 당장 들이대기라도 하랍니까? 그저 염두에라도 두고 좋은 마음으로 지켜보라는 뜻 아닙니까. 미리 선부터 긋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고. 선 조장과 따로 선 그을 일도 없고.”
“아아, 참.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실까.”
서백풍이 여전히 답답하다는 투로 그렇게 대꾸할 때, 단유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진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야, 백풍. 지금 조장님 말씀하시는 투가 뭔가 묘하게…….”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듯, 조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뭡니까, 조장님?”
“방금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가……?”
단유소가 대꾸했다.
“너희들이 방금 갖기 시작한 의문 그대로일 거야, 아마도.”
“그, 그러니까 지금, 한 소저와 잘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확인하듯 곽승추가 묻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오!”
“우오오옷!”
조원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담겼다.
그만큼, 모두가 한설연을 마음에 들어 했었던 탓이다.
“아니, 왜 그 기쁜 소식을 이제야 전하시는 겁니까?”
“우리 사이에 그러는 거 있습니까? 서운합니다, 조장님.”
곽승추와 서백풍이 연달아 그렇게 말했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진평과 연소운도 약간의 책망이 담긴 눈빛으로 단유소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얘기 했어봐라. 내가 조용히 먼 곳만 바라보고 있어도, 또 한 소저 생각하느냐며 다들 한마디씩 했을 것 아냐. 이래저래 은근히 놀리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아니, 뭐 그거야 약간의 재미 요소로…….”
“어쨌거나 그렇게들 알고, 작전 시에는 작전에만 집중하도록 해. 괜히 한 소저 건으로 실없는 소리들 해대지 말고. 우리가 여태껏 겪어왔던 그 어떤 시간보다도 중요한 시간이 될 테니까.”
조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 곽승추가 말했다.
“그래도 축하의 건배는 해야죠?”
“축하는 무슨. 누가 혼인이라도 했냐?”
“오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오오오!”
곽승추가 헤벌쭉한 표정으로 농을 던지자 단유소가 미소 띤 표정을 찡그렸다.
“이 녀석이……!”
그러자 진평이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
“말씀대로, 괜히 설레발치지 않고 임무에 충실하겠습니다. 그러니 조장님도 한 소저와 계속해서 잘되시길 빕니다. 저희들이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그러자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조원들도 모두 잔을 들었다.
단유소가 말했다.
“강해졌으니 스스로 어느 정도는 통한다고 자의적인 결론을 내리는 순간,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무리를 하기 시작한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무인의 불운이 시작되는 순간이야. 잔소리 같겠지만, 요즘의 너희들에게 꼭 한 번 더 주지시키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조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이거 막잔 하고 제발 잠 좀 자자!”
질려버렸다는 듯한 단유소의 말에 조원들이 웃으며 서로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자 모두가 각자의 이부자리로 가서 누웠다. 막내인 연소운이 간단하게 술상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연소운이 마침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른 조원들을 향해 말했다.
“참! 혀, 형님들, 방금 생각났는데…….”
“응? 왜 인마. 대충만 정리하고 너도 자.”
곽승추가 누워 있던 와중에 귀찮다는 듯 대꾸하자 연소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게 아니라, 계, 계산은 해주셔야…….”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인마. 술값 계산이라면 조장님이 아까 알아서 하신다고…….”
단유소도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하여 연소운을 바라보았다. 연소운이 곽승추를 향해 대꾸했다.
“그, 그게 아니라, 저……, 무림맹 사천지부에서 출발하기 전에 다 함께 조장님과 한 소저에 대해서…….”
단유소의 눈빛에 더 큰 의문이 담겼다.
자신과 한설연에 대해서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그 즈음에는 진평과 서백풍 그리고 곽승추의 눈동자가 거의 동시에 커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들은 연소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서백풍이 대꾸했다.
“아, 맞다. 그, 그랬었지? 알았어. 피곤하니까 일단 자고 일어나서 내일 정산해줄 게 인마.”
그제야 대충 상황을 눈치챈 단유소가 눈매를 좁히며 조원들을 향해 물었다.
“뭐야, 이 인간들이……! 설마 한 소저와 내 관계가 어떻게 됐을까를 가지고도 내기한 거냐?”
“아, 예, 뭐……. 우리는 당시에 조장님 표정 딱 보고 일이 틀어졌다 싶었거든요. 한데 소운이 저 녀석만 계속 그럴 리 없다며 부인하는 통에…….”
“하……!”
단유소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 보이자 연소운이 말했다.
“평소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로……, 지불할 수 있는데도 그때그때 정산하지 않는 건 사내의 도가 아니라고 들어서……. 이, 일단 말씀만 드려본 것에 불과…….”
연소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사람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모두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세 사람이 각자의 등짐에서 동전 다발을 꺼내더니 하나둘씩 연소운에게 건넸다.
“쩝. 애가 점점 귀여운 맛이 사라져가.”
“우리가 키운 게 고양이 새끼인 줄 알았더니 호랑이 새끼였네요.”
“새로운 막내를 들일 시기가 되긴 했지.”
서백풍, 곽승추, 진평이 잠자리로 돌아가며 다들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단유소가 보니 연소운은 어색한 듯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자기 전에 생각들 잘 해봐. 애가 누굴 보고 배웠을지.”
단유소도 그 말을 남기고 잠자리에 누웠다.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으니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요즘 이러고 산다, 한 소저.
서로 얼굴 못 보는 동안 그녀는 바쁘게 살 거라고 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걸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아마, 실제로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보고 싶다, 한 소저.’
마음속으로 그 말을 남긴 후, 단유소도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빠진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제갈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리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냐?”
“예. 방금 전에 묵룡에게서 받은 전서의 내용입니다.”
“오오!”
백리우가 대견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물었다.
“적의 함정일 가능성은?”
“물론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여러 정황들을 따져보자면 그럴 확률은…….”
제갈윤이 조심스러워하며 대꾸할 때, 그의 말을 자르며 백리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가능성이나 확률 같은 얘기는 다 필요 없고. 그러니까 네 판단은 그들이 조사해서 보고한 내용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러자 제갈윤이 눈매를 살짝 좁히며 대꾸했다.
“형님,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함정일 가능성이 극히 적다고 해도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신중한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신속한 대처가 더 중요하지 않나?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상부의 판단과 결정이 빨라야 할 것이고.”
잠시 백리우를 바라보던 제갈윤이 대꾸했다.
“예,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신중함도 좋지만 항상 그게 능사인 건 아니었다. 시간을 끌다가 좋은 시기를 놓쳐버리면 그게 더 손해이기 때문이다.
“정협단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채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정협단(正俠團).
이번에 각파에서 차출한 정예 무인들의 조직이다.
이래저래 조직을 정비하고 알맞게 전력을 분배하여 몇 개의 대(隊)로 나누었다.
섬서지부까지의 거리가 멀어 아직까지 정예를 합류시키지 못한 문파와 세가들도 있지만,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이 총 전력의 삼분지 이 이상은 되었다. 아직 합류하지 못한 무인들은 차후에 후발대로 투입시켜도 될 일이었다.
제갈윤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상대는 혈천맹입니다. 신속하게 적의 거점을 타격하되, 적의 함정일 수도 있다는 점을 철저히 주지시켜야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구성된 정협단이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백도의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백도를 대표하는 세력들의 정예 무인들이니만큼 최대한 보전해야 할 전력이기도 했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윤이 말했다.
“유굉 대사께서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연륜만큼이나 식견도 높으시니, 주의할 점만 제대로 말씀드리면 적절히 대처하실 겁니다.”
유굉 대사가 바로 정협단의 임시 단주였다.
원래 정협단주로 거론되던 사람은 화산의 장문인인 화무진이었다. 백도 십대 고수의 한 사람이기도 했고, 다른 면면들까지 살펴도 그가 가장 적절한 패였다.
그러나 그 또한 화산이라는 명문의 수장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요즘인 만큼, 시시때때로 문파 내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이 바로 장문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문인이 문파를 비우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니, 이해해달라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당연히 이해해줘야 할 사안이기도 했다.
그래서 차선으로 거론되던 유굉 대사에게 순서가 돌아간 것이다.
유굉 대사 또한 부담스럽다며 처음에는 정중히 사양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단, 더 적절한 단주감을 섭외하기 전까지, 임시로만 단주 역할을 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어쨌거나 무공 실력, 명성, 연륜, 평소의 성품, 백도 내의 배분, 그리고 소림이라는 배경에 이르기까지, 유굉 대사 또한 단주를 맡기에 매우 적절한 인물이긴 했다.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던 백리우가 말했다.
“다른 건 걱정이 안 되는데, 실전이라는 점이 약간 걱정된다. 실전은 수장의 강력한 조직 장악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대사의 성향이 그런 성향은 아니셔서.”
그러자 예리한 눈빛으로 잠시 백리우를 바라보던 제갈윤이 대꾸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형님이 직접 가실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십쇼.”
백리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문득 아버지에게 부탁을 드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백리우는 진심이었다.
부친에 대한 반감이 젊었을 때보다야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그였다. 부친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고 말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그다.
그런데 부탁을 한다고 한다. 그가 현 강호의 상황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제갈윤이 대꾸했다.
“백부님이 다시 출도하시면 제 아버지 또한 다시 모셔야 합니다. 두 분도 우리와 같은 사이니까요. 하긴,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게 최상의 수이긴 합니다. 명성이든, 실력이든, 경험이든, 상황을 읽는 눈이든, 이 강호의 누구보다 가장 믿을 만한 분들이 그 두 분이긴 하니까요.”
두 사람이 전대 맹주와 전대 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이 무림맹의 중심부에서 지휘 통제를 맡아줄 경우, 백리우와 자신이 직접 전장에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여러모로 최상의 그림이었다.
백리우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윤이 말했다.
“저야 아버지께 거리낌 없이 부탁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아마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으실 겁니다. 문상직 그만두고 세가로 돌아오셨을 때, 무림맹이 있는 방향으로는 이제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농을 섞어 말씀하셨거든요.”
“나도 십분 공감한다고 숙부께 말씀드려. 절대로 내 자식은 이 짓 안 시킬 거야. 제 놈이 하고 싶다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욕해줄 거야.”
“푸허허!”
제갈윤이 웃었다. 그러자 백리우가 다시금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보아하니 숙부가 먼저 움직이실 일은 없을 것 같고, 결국 내가 아버지께 부탁드려볼 수밖에 없겠네. 에휴. 그래야 숙부도 엮여서 나오실 거 아냐.”
“아무래도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긴 하겠지만…….”
‘형님이 싫으면 굳이 하지 마십시오.’
제갈윤은 목구멍까지 넘어오려던 그 말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러기에는 사방이 변절자로 넘쳐나는 이 판국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부족했다.
그게 바로 자신과 백리우가 힘겨워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능력 있는 인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중에서 끝까지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부족한 탓이었다.
“알았어. 일단 정협단은 유굉 대사에게 맡겨서 최대한 빨리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아버지에 관한 건은 내가 최대한 노력해 볼게.”
“예.”
“그나저나 역시 제갈윤은 제갈윤이구나. 그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결국 적들의 거점 중 한 곳을 유추해내다니.”
그 말에 제갈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닙니다. 바빠서 그럴 시간도 없었고요.”
“응? 그럼 대체 누가……?”
매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백리우가 눈을 번쩍 떴다.
“설마……?”
그러자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교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