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41화 (141/200)

141화. 혁련강 (4)

그 모든 과정을 정상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일단 천마신교에 사자를 보내어 협정 의사를 밝히고, 그들의 답신을 기다려야 한다.

만약 천마신교 측에서 승낙을 하면, 그때부터는 협상에 나설 실무진을 꾸리고 협상 장소를 섭외해야 한다. 상대가 천마신교인 만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니, 장소를 섭외하는 과정만 해도 상당히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 후에는 실무진이 만나서 협정 내용을 조율해야 하는데, 그 과정은 더 오래 걸린다. 치열하게 손익을 따져가며 협상을 진행해야 하니, 안건마다 수뇌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천마신교야 교주에게 승인을 얻는 과정이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백도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맹주가 승인하기에 앞서 장로회의를 통해 의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천마신교주가 직접 무림맹의 장로회의에 나타났으니, 그 모든 불필요한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시간 소모를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미타불, 천마신교 측의 시주들께서 어려운 발걸음들을 하셨구려. 어쨌거나 지금은 적이 아니라 손님의 입장이니 모두 적절한 예우는 갖추도록 합시다.”

유굉 대사가 좌중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자 혁련강이 대꾸했다.

“내 평생 부처님 모신다는 분들을 여럿 봐왔는데, 그다지 자비나 포용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없었소. 한데 대사를 보니 생각이 바뀌게 되는구려.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는 분들은 확실히 달라도 다르시구려.”

“허허허. 아미타불, 과찬이시오. 빈승의 수양은 아직도 멀었소.”

그러자 혁련강이 대꾸했다.

“아, 그리고 나는 이곳에 혼자 왔소. 수행원도 없고 심지어는 수호위조차 없소.”

그 말에 장내의 인물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혁련강의 입장에서 이곳은 적진이다.

그런데 적진에 홀로 들어와서도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는 저 당당한 기개라니.

아무리 적이라지만, 과연 천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들 놀라실 필요 없소. 나보다 더 대단한 분은 여기 계신 맹주시니까.”

혁련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혁련강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이윽고 백리우가 말했다.

“교주께서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초대에 응한 것이오. 그러니 얼른 진행합시다.”

저녁도 거른 채로 혁련강과 더불어 거의 두 시진에 이르는 협정을 진행했다.

우선적으로 상호 불가침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기한은 공식적으로 혈천맹이 궤멸된 날로부터 일 년 후까지로 정했다.

그 후에 본격적인 안건들을 논의했다.

협정이 진행되는 내내, 혁련강은 괜한 것으로 트집을 잡거나 하는 법이 없이, 상식적인 선의 내용들이라면 대부분 수용했다.

일일이 동의를 구하고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백도와는 달리, 천마신교는 교주를 정점에 둔 수직적인 조직이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내용의 최종 협정서를 작성하여 백리우와 혁련강이 각각 수결하고, 간인까지 했다.

그 모든 과정을 마치고 협정이 체결되자 백리우가 혁련강에게 말했다.

“교주. 먼 길 오셔서 고생 많으셨소. 혈천맹을 몰아낼 때까지, 모쪼록 잘 부탁하겠소.”

혁련강이 대꾸했다.

“맹주께서 먼저 대범함을 보이지 않았다면 오늘의 일도 없었을 것이외다. 천하제일의 무공만큼이나 큰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소. 이번에 많이 배웠소.”

“허허허. 그쯤 하시구려. 교주께서 그렇게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나는 백도에서 더 미움을 사게 되어 있다오.”

“푸헛! 하긴 그것도 그렇겠구려.”

그 즈음에는 혁련강을 바라보는 좌중의 시선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적어도 못마땅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두 시진 동안 함께하다 보니 머릿속에 있던 천마신교나 천마신교주에 대한 편견이 많이 바뀐 탓이었다.

백리우가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겠소. 오늘 회의의 내용은 모든 게 기밀이오. 여러분과, 혹은 여러분이 속한 곳의 대표들이 아니면 누구도 알아서는 아니 될 것이오.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할 상황이 되면 그때 내가 공표할 터이니, 그 전까지는 반드시 기밀을 유지해주시오. 혈천맹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함임을 모두가 아실 것이라 생각하오.”

“그리하겠습니다, 맹주님.”

좌중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혁련강에게 물었다.

“출출하실 터인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소?”

“허헛. 그러고는 싶으나, 멀리에서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흑풍대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겠소.”

“하오시면 알겠소. 그곳까지는 내가 직접 배웅하리다.”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백리우의 배려였다.

“감사하오.”

백리우에게 대꾸한 혁련강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은 별로 반갑지 않았겠지만, 나는 백도의 유명 인사들을 직접 뵙게 되어 반가웠소. 뭐, 우리가 자주 봐서 좋을 관계는 아니니, 서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도록 합시다.”

진담을 농담처럼 말하니 좌중이 더러는 웃었고, 더러는 미소만 지었다.

“그럼 여러분의 무운을 빌겠소. 출출하실 텐데 어서 가서 식사들 맛있게 하시오.”

그리고 잠시 후 백리우가 혁련강을 데리고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이후에 제갈윤이 폐회를 선언하자 모두가 회의장을 벗어났다.

집무실로 돌아온 제갈윤이 오늘 있었던 회의와 협정의 내용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이 들어왔다.

화산의 장문인인 화무진과 종남의 장문인인 사종경이었다.

제갈윤을 포함한 세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갈윤이 말했다.

“두 분 장문,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정마협정이 성사될 수 있었던 건, 두 분께서 회의장의 분위기를 잘 조성해주신 덕분입니다.”

두 장문인이 회의장에서 보인 모습은 사실, 제갈윤과 미리 이야기가 된 부분이었다.

백리우의 집무실에서 혁련강과 이야기를 나눈 제갈윤이 정마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회의 도중 천마신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승산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사람이 바로 화무진이었다.

결국 그는 제갈윤으로부터 승산이 삼 할 정도밖에 안 된다는 대답을 이끌어냈다.

그로 인해 백도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혈천맹을 이길 수 없다는 불안감이 빠르게 조성되었다. 덕분에 백리우와 제갈윤이 천마신교와의 연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천마신교에 대한 백도인들의 근원적인 반감도 신경 써야 했다.

그때 나섰던 사람이 사종경이었다.

그는 천마신교와의 연계 건이 나오자마자 가장 크게 언성을 높이며 반대하는 모양새를 취했었다. 친맹주 세력인 그조차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며, 일종의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회의 참석자들 중에서 가장 무게감이 있는 두 사람이니,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었다.

사종경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모용국 그 친구는 언제 끌어들이신 겁니까?”

사종경의 말마따나 그런 상황들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 사람은 모용국이었다.

모용국은 본디 친맹주 세력은 아니었다. 항상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온 인물이었다. 그가 객관적인 시각을 취하는 듯하며 분위기를 정리한 것이다.

“맹주님께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똑똑한 친구이니 말귀를 알아들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회의가 다시 시작된 후에 잠시 전음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겁니다.”

“아하.”

두 장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두 분 장문인께 다시 한번 감사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화무진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말씀 마시구려. 솔직히 문상께서도 아시잖소. 천마신교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곳은 우리 화산과 종남이라는 걸. 결국 우리는 우리대로 자파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기도 하오.”

제갈윤이 빙그레 웃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는 화무진의 표현은 지리적인 여건을 이야기한 것이다.

청해의 곤륜파가 피신을 왔고 감숙의 공동파는 궤멸되었다. 그렇기에 천마신교와의 대치 국면에서 백도의 지리적인 최전선은 바로 이곳 섬서, 즉 화산과 종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도가 천마신교와 협정을 맺게 되었으니, 두 문파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위험 요소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사종경이 말했다.

“어쨌거나 맹주님과 문상께서 늘 고생이 많으시오. 앞으로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말씀하시오. 이곳 섬서 땅에서만큼은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매우 많으니.”

“고생이 많긴 합니다만, 두 분 장문인과 같은 분들 덕분에 늘 힘을 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이들의 눈치도 있으니 우리는 바로 나가보겠소. 문상도 바로 식사하러 오시구려.”

화무진과 사종경이 집무실을 벗어났다.

제갈윤이 빠르게 서류들을 정리하더니 집무실의 창가에 섰다.

달빛이 비스듬히 집무실을 비추고 있었다.

‘큰 그림은 그려졌다. 이제 그들이 최대한 빨리 성과를 내기를 바랄 뿐.’

* * *

자시초(子時初, 오후 11시)에 가까워진 어두운 밤.

방 안에서 미세하게 들려오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던 선화란(線華瀾)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면……!’

이건 확실한 정보였다.

혈천맹의 주요 거점을 찾으려다가 허탕을 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다른 곳으로 파견을 갔던 인원들도 소득 없이 돌아왔다고 했으니, 총 세 번이나 허탕을 쳤던 셈이다.

그런데 드디어 매우 확실한 정보를 알아내게 된 것이다. 서둘러서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려야 했다.

‘후우우우…….’

선화란이 한 차례 길게 호흡을 조절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급할수록, 더욱 긴장이 될수록 의식적으로라도 차분하게 스스로를 안정시켜야 한다. 기실, 그러한 태도야말로 그녀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이윽고 방 안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릴 때쯤, 선화란도 벽 뒤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그녀가 막 한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벌컥!

갑자기 방문이 세차게 열리더니, 방 안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선화란을 향해 나는 듯이 다가왔다.

상대는 남색 옷을 입은 사십 대 초반의 사내였다. 그는 방금 전까지 방 안에서 장주와 대화를 나누던 손님이었다.

아까 멀리에서 얼핏 봤을 때엔 그다지 고수 같지 않아 보였는데, 지금 보니 엄청난 고수였다.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된 순간, 선화란이 들고 있던 다구(茶具)를 상대에게 날렸다.

상대를 향해 다구를 날리자마자 선화란이 뒤돌아서 빠르게 경공을 펼쳤다.

뒤쪽에서 다구 깨지는 소리들이 들려올 때쯤, 미리 익혀둔 도주로를 따라 달리던 그녀의 정면에 또 다른 인영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녀가 지체하지 않고 방향을 왼쪽으로 홱 틀었다.

상대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다. 기척이야 작정하고 감추면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긴 하나,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라는 뜻이었다.

그런 자를 상대하다가 시간을 지체하느니 또 다른 도주로를 택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도주로로 나아가던 선화란은 금세 표정을 굳혀야 했다. 그곳에서도 인영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의 기척 또한 파악하지 못했다.

역시나 무시할 수 없는 고수라는 뜻.

이를 악문 선화란이 달리던 속도 그대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더 이상의 도주로가 남아 있지 않은 탓이었다.

무조건 돌파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