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혁련강 (3)
이번에는 유굉 대사가 말했다.
“맹주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시오. 그런 맹주가 계신데도 승산을 겨우 그 정도로 판단하신단 말씀이시오? 정녕?”
“……그러합니다.”
“아미타불, 많은 이들이 다치겠구려. 우리 세대에서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유굉 대사가 안타까움 가득한 탄성을 토해냈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더욱 침울해졌다.
그러자 가만히 분위기를 살피던 화무진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문상이시라면……,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을 것 아니오. 문상은 그럴 수 있는 분이시잖소.”
그 말에 제갈윤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대답은 제갈윤이 아닌 백리우에게서 나왔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소. 승산을 최소한 반 이상으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무엇입니까, 맹주님?”
그러자 백리우가 천천히 장내의 인물들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와 협정을 맺는 거요.”
“그 무슨……!”
“마교라니!”
“말도 안 됩니다!”
장내의 인물들이 격한 반응들을 쏟아냈다. 회의장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백리우는 눈을 감은 채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적의 적은 아군이라지만 마교와 손을 잡는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맹주님!”
종남파 장문인인 사종경의 말이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백리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연 사람은 제갈윤이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사종경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문상!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는 하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아까 맹주께서도 우리 백도에는 선조들께서 남겨주신 혼이 있다고 하셨잖소! 그건 저승에 계신 선조들께서 노하실 일이오!”
친맹주파라고 할 수 있는 사종경이 그렇게 반응할 정도이니, 다른 참석자들의 반응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제갈윤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선조들께서도 그런 적이 있으십니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백오십년 전, 혈교가 일으켰던 혈겁을 아실 겁니다. 당시에 강시를 대동한 혈교에 의해 중원의 삼분지 일이 초토화되었다는 사실도 아시겠지요. 그때는 백도가 지금처럼 강세인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때문에 중원 전체가 혈교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습니다. 한데, 어떻게 막았을 것 같습니까? 그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모든 이들의 눈매를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건 검황(劍皇)께서 활약하신 덕분으로…….”
누군가가 대꾸하자 제갈윤이 미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검황께서 큰 활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당시에 혈교가 중원을 침공하는 데, 왜 천마신교가 함께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가뜩이나 당대의 천하제일인은 검황이 아닌 천마였습니다. 그가 마음먹고 혈교와 손을 잡았으면 백도를 접수하는 것쯤, 일도 아니었을 텐데요.”
참석자들이 모두 생각에 잠겼다.
제갈윤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제갈윤의 말마따나 당시의 천마신교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혈교와 손을 잡고 일단 중원을 삼킨 후에, 서서히 혈교를 몰아내는 전략을 썼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천마신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저력이 있는 곳이니까.
한데 당시의 천마신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도 혈교에 맞서 싸웠다.
천마신교가 굳이 왜 그랬을까.
그 즈음, 제갈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당시의 천마와 검황께서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습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 정도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아직 젊었을 때, 그러니까 당시의 천마가 아직 대공자였고, 검황께서는 젊은 고수였던 시절에, 그들은 우연히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물론 그때는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서로 교류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백도만의 힘으로 혈교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시점에, 검황께서 천마신교주와 만나셨던 겁니다.”
좌중이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백오십 년 전에 천마신교가 혈교와 손을 잡지 않았다 해서, 지금도 잡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백도는 승산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 됩니다.”
“음…….”
몇 명의 인물들이 침음을 삼켰다. 제갈윤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외부로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뿐이지, 현재 천마신교 또한 혈천맹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바로 그들과 연계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입니다. 더 늦어지면 그것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겁니다.”
누구도 그 말을 허투루 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제갈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이 강호에서 가장 냉철하고 똑똑하다는 무림맹 문상으로서의 판단이었으니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백리우가 말했다.
“천마신교와 영원히 화친하자는 게 아니오. 처음에 말했듯 적절한 협정을 맺자는 것이오. 방금 전에 문상도 얘기했지만, 그들마저도 적으로 돌아서면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오. 최소한 그 상황만큼은 방지해야 하오. 나아가서는 그들과 연계하여 혈천맹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일 것이고.”
그 후로 제법 오랜 침묵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입을 연 사람은 모용국이었다.
“맹주님과 문상 어른의 뜻을 십분 이해합니다. 사실, 두 분이 말씀하신 방법 외에 딱히 다른 수가 없기도 합니다. 그게 현실이니까요. 그렇기에 소생은 두 분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한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해보게.”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모용국이 말했다.
“백오십 년 전에 검황께서 마교와 연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검황과 천마 사이에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젊은 시절의 친분이 있었으니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손을 잡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모용국이 잠시 말을 줄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설령 그들과 협정을 맺는다 해도 어떻게 천마신교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마교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협정을 맺는 척만 하고, 나중에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그들과 연계하지 아니함만 못한 결과가 될 겁니다. 그들이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모두들 천마신교와 연계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솔직히 그게 아니면 다 죽자는 얘기가 되니 납득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 천마신교를 신뢰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도인들은 모두 마교가 주적이라는 이념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덜컥―
그 순간 갑자기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죽립을 깊게 눌러쓴 사내였다. 모든 이들의 의문 가득한 눈동자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듣자 듣자 하니 속이 꼬여서 참을 수가 없구려.”
그가 그렇게 말하며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낯선 사내였다. 그렇기에 의아했다.
무림맹 장로 회의에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이라면 응당 알 만한 인물일 텐데, 방금 전에 들어선 낯선 사내의 정체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백리우와 제갈윤은 그를 아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책망하는 듯한 미소를 보이며 낯선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사내가 백리우와 제갈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도 말이오. 똥오줌은 가릴 줄 아는 사람들이란 말이오. 혈천맹인가 뭔가 하는 작자들처럼 앞뒤 안 가리고 사고나 치는 정신 나간 부류와는 엄연히 다르다는 말씀이오. 우리도 이 강호에서 오래된 세력이고, 그렇기에 유지해야 할 나름의 지위와 체면이라는 게 있다는 말씀이지.”
낯선 사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가 때때로 비열하고 얍삽하고 잔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오. 그러나 그런 면면은 누구에게나, 어느 사회에나 있소. 그건 당신들 백도라고 해서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 내가 아는 것만 이곳에서 밝혀도 혼자서 일주일은 떠들 수 있으니까.”
말을 마친 사내가 좌중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모종의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미소였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설마……!”
불호를 외우며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역시 유굉 대사였다. 많은 이들이 아직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여 의문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유굉 대사를 비롯한 몇몇의 인물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사내가 대꾸했다.
“소림의 유굉 대사께서는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구려. 그렇소. 내가 바로 혁련강이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장 안이 온통 경악에 휩싸였다.
혁련강.
당대 천마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놀람이 어찌나 큰지,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백리우가 좌중을 향해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을 것이오. 소생이 묵룡으로 하여금 흑풍대와 접선하게 했다고. 그 이유는 보시는 바와 같소.”
물론 그것은 백리우가 지어낸 이야기였다. 단유소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그, 그래도 이건…….”
누군가가 말을 더듬으며 그렇게 말하자 혁련강이 대꾸했다.
“많이들 놀라신 것 같구려. 귀하들의 표현을 빌자면 흉악한 마두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나니까.”
혁련강이 씩 웃어 보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 설득하셔서 협정을 맺으러 왔소. 본교의 교주인 내가 직접 협정서에 서명해야 그나마 귀하들이 안심하실 것이라 하시더구려. 백오십 년 전에는 검황께서 본교로 오셨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온 것뿐이오. 나도 나름대로 큰마음 먹고 목숨까지 걸고 온 것이니, 너무 미워하지들 마시구려.”
회의장의 분위기가 진정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허어, 내 평생 천마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화산파의 장문, 화무진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혁련강은 미묘한 미소만 지은 채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모용국이 말했다.
“하면 맹주님께서 회의에 늦으신 이유가…….”
“그러하네. 천마신교주를 이 자리에 모셔 오기 위함이었네.”
모용국을 향해 대꾸한 백리우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협정을 맺는 시기가 너무 늦춰질 것 같았소. 최소한으로 잡아도 두 달은 걸렸을 것이오. 그때쯤이면 우리 백도의 이 할은 혈천맹에게 당할 수 있는 시간이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백리우의 말이 맞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