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혁련강 (2)
짧은 한마디.
그 한마디 전음을 끝으로, 백의인은 다른 설명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듯했다.
상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려는 듯한 시험.
잠시 후에 백의인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못 믿으시겠다면, 돌아가리다.]
백의인이 그렇게 말하더니 실제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아직은 못 믿겠소. 그렇게 믿기에는 이 상황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니까.]
그 말에 백의인이 돌아섰다.
[후! 솔직하시군. 단지 나는 교주와 단둘이서 조용히 이야기 좀 나누고 싶어서 왔을 뿐이오. 한데 내 입장에서 따로 교주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폐를 좀 끼쳤소. 뭐, 아시다시피 이들은 모두 무사하고.]
백의인의 전음이 이어졌다.
[일단 나는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내 정체를 밝힐 수가 없는 입장이오. 이 상황에서의 명쾌한 해결책은 교주께서 직접 내려와서 따로 내 정체를 확인하는 방법뿐인데…….]
죽립 아래로 드러난 백의인의 입술이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이윽고 혁련강의 입술이 열렸다.
“모두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혁련강이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교주님!]
마연문이 놀라서 전음으로 외칠 때에는, 이미 혁련강의 발바닥이 성벽 밖의 땅바닥에 닿은 후였다.
혁련강이 말했다.
“염려 말게. 그는 아마도 내 오래전 친우인 듯하니.”
* * *
혁련강에게서 사흘 전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제갈윤이 물었다.
“귀하께서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확신하실 수 있었던 겁니까? 그 백의인이 우리 맹주님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었잖습니까. 그 백의인이 실제로는 혈천맹의 극강한 고수로, 귀하를 제거하려는 수작이었을 가능성도 다분하지 않았습니까.”
“문상의 말씀이 맞소.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소.”
미소를 지으며 대꾸한 혁련강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천마(天魔)라 불리는 사람이오. 그런 내가, 그것도 본산의 앞마당에서, 가뜩이나 수많은 수하들이 보고 있는데, 상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움츠러든 모습을 보인다? 후……! 그게 무슨 천마겠소. 다만, 일이 잘못되어 죽게 된다 해도 천마답게 죽겠다고 각오했을 뿐이오.”
제갈윤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혁련강이 말을 이었다.
“한데 그 백의인이 진짜로 맹주셨던 거요. 그래도 나보다 강한 분이니 상당히 긴장이 되더구려. 그 사실을 마 군사에게 전음으로 알려주었더니, 그는 오히려 전혀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구려. 맹주와 문상이 작금의 강호 현실도 읽지 못할 인물들이 아니라면서.”
그 말에 제갈윤이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 역시 마 군사로군요.”
솔직히 현재의 백도는 혈천맹 하나도 감당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만약에 천마신교마저 백도를 공격해온다면 현재의 백도는 절대로 버틸 수가 없다.
마연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백도가 무너지고 나면 혈천맹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천마신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쯤 되면 천마신교는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를 마친 후일 것이다. 패망하여 숨죽여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금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그들의 반복된 역사였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단일 거대 세력인 그들만의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제갈윤이 말했다.
“어쨌거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맹주님과 교주께서는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결론을 도출하신 듯한데, 내용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백리우가 대꾸했다.
“뭐, 너도 예상하고 있다시피 적의 적은 때때로 아군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기본 전제지.”
그렇게 말한 백리우가 품속에서 접힌 문서 한 장을 꺼내더니 그것을 제갈윤에게 내밀었다.
“서로 합의한 내용은 대강 이 정도다. 읽어보고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말하고.”
* * *
백리우와 제갈윤이 다시 회의장에 들어서니 자리의 반 이상이 비워져 있었다. 빈자리는 정예 파견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장로들의 자리였다.
“아미타불, 맹주의 심정은 십분 공감하오. 그러나 아까는 과하셨소. 보면 아시겠지만 빈자리가 너무 많소. 이렇듯 백도의 주축을 이루는 세력들 중에서 반 이상이 이탈해버리면, 남은 우리만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맹주도 잘 아시지 않소.”
유굉 대사의 말이었다.
그러자 무당파의 장로인 왕운석이 말을 보탰다.
“빈도 또한 맹주의 심정을 이해하오. 그러나 백도의 진정한 힘은 본디 응집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맹주께서도 잘 아시잖소. 한데 이렇게 분열되어서야 어디 눈앞에 닥친 환란을 막을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오.”
“송구합니다.”
백리우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유굉 대사가 말했다.
“아미타불, 우리야 어차피 맹주를 지지하는 쪽인데,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이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소. 아까 보니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 기분이 제법 상한 것 같던데, 그들이나 좀 다독여주시구려.”
“무량수불, 그렇소. 그들에게 굽히라는 것이 아니라, 아까는 좀 과했다는 식으로 조금만이라도 다독여주시면 좋을 것 같소. 지금은 일단 화 장문인과 사 장문인이 그들을 다독이고 있는 듯하니, 이쯤에서 맹주께서 가보시면 어느 정도는 수습이 될 듯하오.”
왕운석이 말한 화 장문인이란 화산의 장문인인 화무진이었고, 사 장문인이란 종남의 장문인인 사종경(師宗卿)이었다.
백리우가 대꾸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실은 아까 회의장에서 나가기 전에 그 두 분에게 몰래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아하, 그랬었구려.”
유굉대사와 왕운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백리우는 이곳에 없는 인원들을 완전히 배재할 기세였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니 다행이라는 기색이었다.
“그럼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백리우가 그렇게 말하더니 회의장을 벗어났다.
백리우가 회의장으로 돌아온 것은 일각 남짓이 지난 후였다. 백리우와 함께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서너 명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백리우가 말했다.
“우리 백도의 존재 의의가 정(正)과 의(義)와 협(俠)에 있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분들은 없을 것이오. 그게 바로 선조들이 피 흘려가며 지켜온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니까. 그분들은 죄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싸웠고, 힘이 없어 서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싸웠소.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셨소.”
좌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간 백도의 강세 속에서 이어진 오랜 평화로 인해, 어쩌면 우리는 그런 소중한 가치들을 점점 잊어왔는지도 모르오. 모두가 자파의 이익만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왔소. 물론 이해하오. 강호가 평화로웠으니까. 그런 시기에 각자 힘을 키우며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또다시 좌중이 고개를 끄덕였고 백리우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막상 강호에 큰 위기가 닥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발 벗고 나설 것이라 생각했소. 수많은 힘없는 사람들이 적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고 강시까지 등장했잖소. 우리가 백도인 이상, 이건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문제니 말이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었다.
“한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 순간, 갑자기 울컥했었소. 그래서 아까와 같은 태도를 보였던 바,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오. 또한 소생의 과오를 이해해주시고 다시 돌아와 준 분들에게는 고맙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소.”
그러자 유굉 대사가 물었다.
“대부분 돌아오신 와중에도 서너 분은 보이지 않는데, 그분들은 어찌 된 것이오?”
그러자 종남파의 장문인인 사종경이 대꾸했다.
“이번 사안에 대한 온전한 결정권이 없는 몇몇 분들이 면목이 없다면서 일단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서둘러 조치를 취한 후, 결정이 나는 대로 보고하겠답니다.”
좌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말했다.
“논의해야 할 사안이 많소이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
꼬박 두 시진(4시간) 동안 지속된 회의에서 몇 가지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거대 문파나 명문세가로부터 중소 문파에 이르기까지, 지역 단위로 유기적인 공조 체제를 구축하여 혈천맹의 공격에 대비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무림맹의 각 지부들과도 긴밀하게 연계하기로 했다.
혈천맹과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될 경우의 추가적인 전력 지원 방안과 자금 지원 방안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 논의했다.
폐관수련 중인 각파의 고수들을 다시 불러내기로 했고, 강호에서 은퇴한 노고수들에게도 최대한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그 모든 사안들을 의결했음에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모두가 근심 어린 표정들이었다.
제갈윤이 회의장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말했다.
“분위기가 왜 이렇습니까? 왠지 근심이 가득한 표정들이신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회의를 진행하면서, 중간중간에 묵룡이 겪은 혈천맹의 수법들에 대해 자주 첨언했었다. 그 이야기들을 전해 들을 때마다 참석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었다.
물론 백리우와 제갈윤의 입장에서는 의도한 바가 있었기에 했던 말이었지만.
모용국이 대꾸했다.
“맹주님과 문상 어른의 말씀처럼 혈천맹을 막아야 하는 건 우리 백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방금 전에 다 함께 여러 가지 대책도 세웠지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자신이 없습니다.”
모용국이 바로 말을 이었다.
“혈천맹이 무서운 곳이라는 사실이야 이전에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번 회의에 참가해서 들어보니 훨씬 더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런 자들을 막아내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자 화산파의 장문인인 화무진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문상께서 판단하기로 이 싸움, 이길 수 있을 것 같소이까? 만약 승산이 있다면 얼마나 된다고 판단하시오?”
그러자 제갈윤이 미소 띤 표정으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소생 또한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승산이 얼마나 되리라고 판단하십니까?”
그러자 화무진이 가장 먼저 대꾸했다.
“내 생각에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우리의 승산은 사 할 이쪽저쪽일 것 같소. 오 할은 무조건 안 되고.”
대부분의 인물들이 화무진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종남파의 장문인인 사종경이 물었다.
“이제 문상께서 말씀해보시오. 문상이 판단하기에는 어떻소? 솔직히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소. 적어도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소.”
“소생 또한 여러분처럼 우리 쪽에 어려운 싸움일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승산은 글쎄요. 잘해야 삼 할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삼 할이라니.
현재의 강호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제갈윤의 냉정한 평가였다. 모두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