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혁련강 (1)
집무실에 들어선 후로 굳이 안을 살필 필요가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대놓고 앉아 있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솔직히 자신도 문제였지만 상대가 더 문제였다.
숨소리조차 못 느낀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질적인 기운 자체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리우의 말마따나 상대가 그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는 뜻이었다.
무림맹주의 집무실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의자에 눕듯이 걸터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아주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누구…….”
제갈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눕듯이 앉아 있던 인물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보통보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집.
갸름한 얼굴형에 날카로운 눈매.
약간은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전체적인 이목구비.
양 눈의 중간쯤부터 한쪽 볼까지 사선으로 가른 흉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고 왜소한 체구임에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존재감과 위압감.
그의 생김새를 확인하는 내내 점점 커져 간 제갈윤의 눈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진즉에 상대의 정체를 완벽하게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문상인 제갈윤으로서는 정체를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귀, 귀, 귀하가 어, 어떻게 이곳에…….”
그랬다. 그는 절대로 이곳에 있을 수가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말에 상대가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심지어는 황궁에서조차 탐내는 인재인 무림맹의 문상께서, 처음 보는 이 몸을 이렇듯 단번에 알아봐 주시니 영광이오. 반갑소. 혁련강이오.”
혁련강(赫連姜).
그랬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천마신교주였다. 이 강호에서 강하기로 천하제일인 백리우 다음이라는, 단일 세력으로서는 최강의 세력이라는, 바로 그 천마신교의 교주였다.
설마 천마신교주가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지간한 일에 긴장하는 법이 없는 제갈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몸을 살짝 떨고 있을 정도였다.
제갈윤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뜬 그는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보잘것없는 역량에 비해 쓸데없이 소문만 과장된, 부족한 몸입니다. 귀하께서 너무 띄워주시니 오히려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갈윤입니다.”
그 순간, 혁련강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신을 마주하고도 한순간에 차분해지는 모습이라니.
“백도에서 상대하기에 가장 무서운 인물은 맹주 백리우지만, 상대하기에 가장 골치 아픈 인물은 문상 제갈윤입니다.”
신교의 군사인 마연문(馬硏文)의 의견이었다. 지금의 제갈윤을 보니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마(馬) 군사가 문상의 역량을 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었다면, 이 중원은 이미 본 교의 수중에 있었을 것이오. 이참에 나와 함께 갑시다. 내, 문상을 수하가 아니라 선생으로 모시고 최고의 대우를 약조하리다.”
농인 것을 알고 제갈윤이 웃었다.
직접 이렇게 마주해보니, 막연히 적으로만 생각했던 천마신교주에 대한 심상(心想)과 실제의 모습이 매우 달라서, 그게 내심 의외였다.
제갈윤이 대꾸했다.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하나,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결국 귀하에게 있어 소생은 마 군사만 못할 겁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백리우가 끼어들었다.
“아, 미안한데, 혁련 교주. 교주께서 천마신교 전체를 준다 해도 나는 이 친구 한 사람과 바꾸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일찌감치 꿈 깨시구려.”
백리우도 농담조였다.
그러자 제갈윤이 혁련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셨다시피 맹주님께서 이렇게 저를 아끼시니 더더욱 귀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겠습니다. 아, 물론 맹주님께서 이렇게나 소생을 아끼시는 이유는, 맹주님 평생에 소생만큼 부려먹기 편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자 바로 백리우가 제갈윤에게 따지듯 말했다.
“야! 넌 꼭 사람의 진심을 그런 식으로……!”
“말이야 바른말 아닙니까. 어렸을 때부터 괜히 형님하고 엮여서 그 후로 제 인생이 이렇게 피곤해진 것 아닙니까.”
“에휴. 이래서 아우 놈들은 잘해줘 봐야 소용이 없어, 소용이.”
“나잇살 먹고 어디 가서 초라한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거든, 평소에 아우들에게 잘하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도 참.”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혁련강이 말없이 웃었다.
“가뜩이나 맹주 백리우와 문상 제갈윤은 막역한 사이인 탓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 둘이 무림맹에서 현재의 위치에 남아 있는 한, 중원을 도모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닙니다.”
그 또한 마연문이 했던 말이었다.
그렇군, 마 군사. 이제야 당신의 그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군.
혁련강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제갈윤이 백리우와 혁련강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귀하께서 이곳에는 어찌…….”
“맹주님의 부탁을 받고 왔소. 물론 죽립 눌러쓰고, 맹주님의 지인인 척 비밀리에 들어왔소.”
“하면 호위나 다른 수행원들은…….”
“혼자 왔소.”
그 말에 제갈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백리우를 통해서 왔다지만, 적진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혈혈단신으로 들어오다니.
그러고도 염려 따위는 전혀 없는 저런 기개라니.
그런 생각들을 하던 제갈윤이 무언가를 납득했다는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윤의 표정을 살피던 혁련강이 말했다.
“그렇소. 사실 내가 이러고 있는 건, 맹주께서 먼저 기개를 보이셨기 때문이오. 아마도 처음일 것이오. 본 교의 본산에 백도인이 혼자서 그렇게 방문한 것은.”
그 말에 제갈윤의 눈매가 다시 좁아졌다. 그가 백리우를 쏘아보며 물었다.
“혼자서……? 형님 정말 제정신이 아니셨군요?”
“아, 아니 그게……, 굳이 표 호위까지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는 표 호위도 방해가 될 뿐이고…….”
백리우가 쩔쩔매며 변명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혁련강이 첨언했다.
“솔직히, 나는 문상의 반응을 이해하오. 정말이지 백리 맹주께서는……. 하……!”
혁련강이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그가 사흘 전에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철혼대주가 황급히 천마전(天魔殿)으로 들어온 건, 혁련강이 군사인 마연문과 더불어 신교 내의 변절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드러나지 않은 변절자들의 존재는 천마신교로서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죽립을 쓴 정체 모를 인물이 본산 밖에서 교주님을 뵙고자 청하고 있습니다.”
철혼대(鐵魂隊)는 천마신교 본산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조직이다.
철혼대주의 보고에 마연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오늘은 누군가의 방문 일정이 없는데? 그래서, 누구시라던가? 인원은 몇 명인가?
“그게……,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인원은 한 명입니다.”
“선약도 잡지 않고 불쑥 찾아와서, 본인의 정체도 밝히지 않은 채로 교주님을 뵙고자 했다고? 일단 정체를 밝히던가, 그러기 싫으면 돌아가라고 이르게.”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마연문이 철혼대주를 향해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존명(尊命)!”
그렇게 대전을 벗어났던 철혼대주가 다시 돌아온 건 일각 남짓이 흐른 후였다.
“어찌 되었는가? 그 자가 정체를 밝히던가? 아니면 돌아갔나?”
마연문의 물음에 철혼대주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그것이……, 일단 총군사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데 그자가 그럴 줄 알았다고 대꾸하더니, 갑자기 외성 밖에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수하들을 제압해버렸습니다!”
그 말에 마연문이 목을 길게 빼며 되물었다.
“무어라?”
“그, 그게 끝이 아닙니다. 마침 외부 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이던 훈련생들과 교관들마저 제압해버렸습니다!”
“몇 명이나 당했는가?”
“전원이 당했습니다! 훈련생들이고 교관이고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모조리 당했습니다! 제 눈으로도 좇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습니다!”
“무공 특징 같은 건?”
“얼핏 보기에는 딱히 특징이랄 게 없는 단순한 동작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자는 사정상 본인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나, 꼭 교주님을 만나 뵈어야 한다고 계속…….”
그러자 마연문이 심상치 않다는 눈빛으로 혁련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철혼대주의 안력으로도 좇아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면 상당한 고수라는 뜻입니다. 즉시 본산에 삼급 비상령을 내리고, 수라단에서 이 개 대 정도의 전력을 투입시키겠습니다.”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무력 조직은 천마단(天魔團), 수라단(修羅團), 마룡단(魔龍團)이다. 세 조직 모두 정예들이나, 천마단이 최정예이고 수라단이 그다음이다. 참고로 그 유명한 천마신교의 흑풍대는 무림맹의 신룡대와 비슷한 개념의 조직이다.
혁련강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어이가 없군. 요즘 세상이 미쳐 돌아가긴 하나 봐? 아무리 어쭙잖은 실력이 좀 있기로서니, 다른 곳도 아니고 본 교를 상대로 까부는 작자가 나타날 줄이야.”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방심은 무슨? 수라단 말고 천마단에서 인원 차출해서 내보내.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해. 그토록 나를 보고 싶어 했던 게 그놈의 눈깔이었을 테니, 아주 그 눈깔을 파서 내보내 버리게.”
혁련강의 말에 마연문이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철혼대주에게 바로 지시를 내렸다.
“들은 대로 전하게.”
“존명!”
놀라운 일은 그 후부터 벌어졌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그를 잡아오라고 내보낸 천마단원들이 그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천마단원들조차 하나둘씩 제압당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 시진(1시간)이 지나도 올라오는 보고의 내용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쯤 되자 마연문도 진지해졌다.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제가 직접 가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즈음에는 혁련강 또한 묘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니, 나도 함께 가보지.”
그리하여 두 사람이 외성의 성벽 위에 도달했을 때였다. 철혼대주가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입니다.”
과연 그곳에 죽립을 깊게 눌러쓴 자가 있었다. 백의를 입은 자였다.
혁련강이 보니, 마침 최정예인 천마단의 고수들 예닐곱 명이 그 백의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앞서서 철혼대주가 말했듯, 백의인의 무공에서는 어떠한 특징도 발견할 수도 없었다.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천마단의 고수들은 맹렬했다. 줄곧 봐온 그들의 믿음직한 실력 그대로였다.
문제는 천마단원들을 상대하고 있는 백의인이었다.
천마단원들이 그렇게나 맹렬한데도, 그는 바람처럼 움직이며 어렵지 않게 천마단의 마인들을 제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말 그대로 제압만 할 뿐이었다.
백의인의 주변 이곳저곳에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혈도를 집혀서 제압당한 모습이었다.
혁련강이 철혼대주에게 물었다.
“혹시 우리 쪽 인원 중에 사망자가 있었나?”
“차후에 정확히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연문이 말했다.
“피해를 입히지 않고 제압만 한 것으로 볼 때, 우리를 적대시하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 즈음에는 백의인을 상대하던 모든 천마단원들이 혈도를 집혀 바닥에 쓰러졌다. 백의인은 뒷짐을 진 채로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혁련강의 양미간이 좁아지며 눈동자가 놀란 빛을 띠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귓전으로 낯선 목소리의 전음이 흘러들었는데, 그 내용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백리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