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무림맹 장로회의 (6)
백리우의 말에 대꾸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던 중에, 백리우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참석한 인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본 맹주는 이후에도 모든 백도를 위한 한 자루의 검으로 남을 것이오. 그러나 본 맹주를 능멸하는 자들의 검이 되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겠소. 그러니 본 맹주와 함께하고 싶지 않으시거든 바로 떠나시구려. 잡지 않겠소. 대신 앞으로는 서로 볼 일도 없을 것이오.”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본 맹주의 이러한 방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소. 그게 싫은 사람들끼리 뭉쳐서 따로 안전을 도모하든 뭘 하든, 아까도 말했듯 본 맹주는 상관치 않겠소. 그러나 그 경우에도 서로 지킬 건 지킵시다. 만약의 경우, 되지도 않는 음해나 여론몰이로 본 맹주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자들이 있다면, 자칫 본 맹주의 검이 그들을 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으니.”
회의장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숨 쉬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문 쪽으로 한두 걸음을 옮긴 백리우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회의는 반 시진 후에 재개하겠소. 숙고할 시간은 충분할 테니 그때까지 결정들 내리시길 바라오. 아울러, 이후의 회의에서는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이 없길 바라겠소. 빠르게 처리해야 할 안건들이 많소.”
말을 마친 백리우가 막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맹주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말씀하시는 바도 이해하고 심정도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반성하고 있고, 아까 말씀드렸듯 소생은 세가에 연락하여 바로 조치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말한 이는 모용국이었다.
백리우가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자, 모용국이 공손한 태도와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맹을 대표하는 신룡대이고 그 신룡대를 대표하는 존재가 묵룡이다 보니, 그가 마교와 연루되었다는 소문에는 누구나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백도와 마교라는 관계의 현실이기도 하기에,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정도는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적들이 우리의 분란을 유도하려 의도적으로 낸 소문이든 뭐든 간에 말입니다. 소생이 지금 억지로 꼬투리를 잡으려는 게 아니라는 점, 헤아려주십사 합니다.”
모용국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백리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삼십 대 후반이면 원래는 적지 않은 나이이나, 강호에서는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다. 어쩌면 한창때라고 보는 게 맞다.
무인들이 항상 신체를 단련하는 데다가 내공을 익힌 탓에, 원래의 연령보다 신체의 연령이 젊은 것이다. 고수일수록 더욱 그렇다.
현재의 모용세가주는 비교적 젊은 편인데, 모용국은 모용세가의 형제들 중에서 셋째이다. 그리고 모용국은 모용세가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로 꼽힌다.
그렇기에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외부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우가 모용국을 처음 본 건 세가 연합의 모임 때였다. 당시의 모용국은 십 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다. 그때는 자신도 대공자 시절이었는데, 잠시 모용국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모용국은 이랬었다. 다소 어려운 분위기에서도 본인이 해야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대신 그런 경우에도 결코 예의를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조용히 쭉 지켜봤는데 모용국은 항상 그래왔다. 지금처럼.
어찌 되었건 모용국의 질문은 시기적절했다.
모든 정황을 떠나서, 묵룡에 관한 소문은 모두에게 계속 의구심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모용국의 말마따나 민감한 문제인 탓이다.
결국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그 의구심을 풀어주기는 해야 한다. 무림맹에 협조적인 세력이든, 아니면 앞으로 안 볼 세력이든 간에, 같은 백도인 이상 깔끔하게 풀어주는 게 좋다. 이쪽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 시기가 빠를수록 좋다. 모용국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도 억지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여전히 제법이구나.’
백리우가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갈윤이 입을 열었다.
“그건 아까도 얘기했듯, 아직 묵룡에게 확인하기 전이오. 확인하는 대로…….”
제갈윤이 하던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건 백리우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발언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백리우가 입을 열었다.
“그 소문이 맞을 것이네. 묵룡이 천마신교의 흑풍대와 교통한 건 사실일세. 내가 알기로는.”
그 말에 회의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제갈윤조차도 놀란 눈으로 멍하니 백리우를 바라볼 정도였다.
회의장 안이 한동안 온통 웅성거렸다.
그러던 중에 모용국이 다시 물었다.
“맹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면 정말로 묵룡이 마교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십니까?”
그 말에 백리우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서로가 만난 적은 있으나 연결되었다고까지 하기에는 좀 무리일세. 그리고 묵룡이 흑풍대를 만난 건, 본 맹주가 그러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네.”
모용국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맹주님께서……, 지시를 내리시다니요?”
“본 맹주가 그쪽 혁련 교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었거든.”
“무량수불. 아니, 왜 맹주께서는 그 악마들의 우두머리를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오?”
무당파 왕운석의 질문이었다. 왕운석도 백리우에 비해 한참이나 나이가 많았다.
“진짜 악마인지 아닌지 직접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소, 맹주.”
왕운석이 점잖게 타이르듯 말하자 백리우가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그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다시들 뵙지요.”
백리우가 그렇게 말하더니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제갈윤이 장내의 인물들을 향해 간단히 예를 취하더니 황급히 백리우의 뒤를 쫓았다.
제갈윤이 맹주의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백리우는 뒷짐을 진 채로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갈윤이 그의 뒤로 다가가며 물었다.
“강해도 너무 강하게 나가신 것 아닙니까?”
백리우가 대답 대신 피식 웃어 보였다.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반감을 가진 이들이 실제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흥! 그럴 테면 그러라고 해. 그런 머저리 같은 작자들이 끼리끼리 뭉쳐봐야 뭘 하겠어? 매사에 되지도 않는 걸로 트집이나 잡는 그런 작자들이라면, 어차피 그 안에서도 또 내분이 일어나게 돼 있어.”
그 말 자체는 제갈윤으로서도 충분히 공감하는 말이었다.
수평적인 관계의 조직은 대부분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게 그런 조직의 현실이다. 보다 더 공익을 위하고 전체를 생각하는 누군가가, 더 양보하고 더 인내해야 한다. 강력한 서열과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무림맹과 같은 연맹체도 마찬가지다.
한데 아까의 그들처럼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들이 뭉쳐서 무언가를 도모하려 한다면, 십중팔구는 내분이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누구도 나서서 먼저 양보하려 하지 않고 희생하려 하지 않으니, 서로의 손익만 따지게 되는 것이다. 굳이 모종의 조치를 따로 취하지 않아도 알아서 와해된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만,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잖습니까. 이런 식이라면 우리 백도도 힘을 결집하지 못한 셈이니, 결국 적들에게만 이로운 일이 아닙니까.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좋은 말로 하지 그러셨습니까.”
제갈윤이 타이르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자 백리우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못 참아.”
그런 백리우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제갈윤이 조용히 말했다.
“여태껏 잘 참아오셨잖습니까. 이번 일만 끝나면 맹주직 내려놓는다면서요.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될 일 아니었습니까.”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아까 네가 당하는 거 보니까 확실히 느낄 수 있겠더라. 내가 좋게 좋게만 대해주니까 별 등신 머저리 같은 것들이 너까지 만만하게 보는구나 싶더라.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백리우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제갈윤이 결국 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감았다.
‘하여간 내가 형님 땜에 못 삽니다.’
결국 자신이 곤란한 꼴을 겪고 있는 모습 때문에 참지 못하고 이 사단을 벌였다는 뜻이었다.
백도의 지도자가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었느냐고 따지면 백리우는 분명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한테는 세상에서 그게 가장 짜증 나는 일이야. 감히 어디에서 제까짓 것들이 너를 건드려?
제갈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리우가 말했다.
“의문을 제기하는 건 당연히 받아들일 거다. 하지만 되지도 않는 의혹을 제기해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건 더 이상 참지 않을 거야.”
그 후로 잠시 말이 없다가 제갈윤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젠 어쩔 생각이십니까. 형님이 대책도 없이 사태를 이렇게 몰고 오실 분도 아니시고.”
“전에 네가 그랬지? 오랜 고난을 함께하면 적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고, 오랜 평화를 함께하면 친구도 적이 되곤 하는 법이라고.”
“그랬죠.”
“마찬가지로, 아무리 오랜 적이라도 현재 비슷한 고난을 함께 겪고 있다면 이야기가 통할 수 있는 법이지.”
그 말에 제갈윤의 눈매가 좁아졌다.
“아까 혁련 교주 얘기가 나오기에 설마 했는데…….”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갈윤이 다시 물었다.
“하면 요 며칠간 누군가를 만나러 다녀오신다고 했던 것도 혹시 그를 만나러 가셨던 겁니까?”
백리우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윤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은거 고수들 만나러 간다면서요!”
“혁련 교주 만나러 간다고 했으면 네가 보내줬겠어?”
백리우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제갈윤이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러다가 다시 물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데요?”
“뭐, 근처에서, 조용히 봤지.”
그러자 제갈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그 근처라는 게 신강에 있는 천마신교의 본산 근처는 아니죠?”
백리우가 흠칫했다.
그 모습을 포착한 제갈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형님이 지금 제정신이에요?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혼자 거길 가요!”
“표, 표 호위도 함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고요!”
“어쨌든 무, 무사하잖아. 야, 그리고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 목소리 좀 낮춰.”
“어차피 내공으로 음파 다 차단하셨으면서 무슨……!”
“그게 아니고…….”
백리우가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미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듣잖아…….”
“당연히 표 호위겠죠, 뭘.”
“아니야.”
백리우가 그렇게 대꾸하자 이번에는 제갈윤이 흠칫했다. 눈매를 좁힌 그가 조용히 물었다.
“뭐예요? 진짜로 누가 있는 거예요? 못 느꼈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네가 기척을 느낄 만한 수준의 상대가 아니니까.”
말을 마친 백리우가 집무실 구석의 음영이 드리운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제갈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심지어는 보란 듯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