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무림맹 장로회의 (5)
종잇조각들이 팔랑거리며 탁자 위와 그 앞에 서 있던 인물들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헛……!”
“매, 맹주……!”
모두가 깜짝 놀라며 다급하게 외쳤다.
옆에 있던 제갈윤마저도 깜짝 놀란 상태였다.
이건 예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상식에서도 한참이나 벗어난 행동이었다. 그리고 백리우는 절대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의 그런 반응에도 백리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미소 띤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본인의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쉿!”
그 말에 누구도 더 이상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백리우가 짓고 있는 미소는 무림맹주가 짓는 미소가 아니라, 악당들이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백리우라는 사람을 알게 된 후로 처음 접하는 종류의 미소였다.
백리우가 곧바로 다음 서류를 내보이며 말했다.
“이건 이번에 정예 차출 건으로 여러분이 속한 세력에서 파견해준 전력들에 대해 면밀하게 분석한 자료요. 방금 완성된 따끈따끈한 문서지.”
백리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회의장에 오고 있는데 마침 문상부의 수하들이 문상에게 전해주러 간다더군. 그래서 본 맹주가 대신 받아 왔소.”
백리우가 그렇게 말하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그가 첫 장의 내용을 쓱 훑으며 말했다.
“오! 무당.”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백리우가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야! 소림.”
탄성까지 내뱉은 백리우가 서류를 또다시 다음 장으로 넘겼다.
백리우가 그러는 동안 회의장 안의 다른 인물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미동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의 백리우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베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연속해서 서류를 두어 장쯤 넘긴 백리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화산, 종남.”
그 후에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긴 백리우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리고 점점 그의 양 눈썹 사이에 주름이 짙어져 갔다.
내심 찔리는 게 있는 인물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백리우의 눈치를 살필 때, 그의 입술이 열렸다.
“흐음……. 남궁세가…….”
백리우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며 남궁보를 바라보았다.
남궁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 눈빛에서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 맹주는 분명히 정예를 차출하여 보내라고 하였네. 한데 귀 세가에서는 정예가 아니라…….”
잠시 말을 멈췄다가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쓰레기들을 보냈군.”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백리우라고는 전혀 생각이 되지 않을 만큼 거친 언사였다. 모두가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놀란 사람은 역시 남궁보였다.
백리우의 낯선 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태껏 자신을 공대해왔던 그가 갑자기 하대해오니 더더욱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백리우는 이런 자리에서 본인을 ‘본 맹주’라 표현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거의 ‘소생’이라는 표현으로 본인을 낮추었었다.
한데 오늘은 계속해서 본 맹주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위계질서를 명확하게 하겠다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백리우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백리우가 물었다.
“귀 세가에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건가? 왜, 본 맹주가 그 정예 전력들을 사적으로 이용이라도 한다던가? 그 전력들 이용해서 본 맹주가 혼자 부귀영화라도 누린다던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면 이게 누구의 뜻인가? 말해보게. 이게 정녕 본 맹주의 요청에 대한 남궁 가주의 답인가?”
“그, 그것이…….”
남궁보가 쩔쩔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군. 당신네들은 본 맹주를 능멸하고 싶은 게로군.”
남궁보의 눈이 커졌다.
“느, 능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게 능멸이 아니면 뭔가? 어디 한번 본 맹주가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답을 말해보게.”
화를 내고 있지도 않았고 표정이 일그러지지도 않았지만, 백리우의 기세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역시나 남궁보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백리우가 말했다.
“본 맹주가 여태껏 각 파와 세가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고 열심히 비위를 맞춰준 건, 백도 세력의 내부 분열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함이었네. 그런 상황이야말로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적들이 바라는 바일 테니까. 그건 적들에게 이로운 일이니까.”
백리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네. 우리의 이런 상황을 알고 저 혈천맹이 속으로 쾌재를 불러도 상관없네. 본 맹주도 더 이상은, 본 맹주를 능멸하는 자들까지 안고 가지 않을 걸세. 이거 엿 같아서 못 해먹겠군.”
또다시 백리우의 입에서 거침없는 언사가 튀어나오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리우가 남궁보를 바라보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얼핏 들었지. 문상과 더불어 책임 얘기를 하고 있더군. 풋! 책임?”
백리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서류철에 묶여 있던 남궁세가의 전력 보고서를 툭 떼어냈다. 그러더니 그것을 다른 손에 든 채로 말했다.
“남에게 책임을 따지기 전에 본인의 책임이나 의무부터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나?”
백리우가 그렇게 말하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남궁 세가의 전력 분석 서류를 찍찍 찢었다. 그러더니 남궁보를 바라보며 찢어진 서류를 탁자에 툭 던졌다. 그러면서 말했다.
“여기에서 나가게. 자네가 데려온 그 쓰레기들 다 데리고 남궁세가로 돌아가게.”
남궁보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매, 맹주……!”
“그, 그건 너무……!”
몇몇 인물들이 백리우를 말리려 할 때, 백리우가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더 이상!”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질 때,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는, 본 맹주의, 친구가, 아닐세.”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끊어서 내뱉은 말.
결코 언성이 높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백리우의 노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놀란 표정만 지을 뿐,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당사자인 남궁보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백리우는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금 서류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서류를 한 장 더 넘긴 백리우가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모용세가.”
그 말에 모용국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백리우가 말했다.
“온전한 정예를 보내기는 싫고, 그렇다 해서 꼬투리 잡히기는 싫고. 뭐, 딱 그 수준이군. 이 정도면 쓰레기는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곤란하겠네. 가서 모용 가주에게 본 맹주의 말, 똑똑히 전하게.”
“예……, 맹주님.”
“그게 싫으면 자네도 이곳에서 퇴장해도 좋네.”
백리우는 모용국이 어찌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모용국이 서둘러 대꾸했다.
“고, 곧바로 가주님께 말씀드려서 즉시 조치토록 할 것입니다, 맹주님.”
백리우는 모용국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투였다.
어쨌거나 그러는 와중에도 백리우는 이미 네댓 장의 서류를 더 훑은 후였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파와 당가는 사천에서 청성을 돕는다 하기에 정예 차출 건에 대해서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 했는데, 전력의 수는 반밖에 안 되는데도 제대로 된 정예를 보내왔군. 이리 고마울 데가.”
원래 아미파와 당가는 무림맹의 행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온 세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의 입장도 아니었고 소극적이지도 않았다. 대부분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그랬던 두 세력이 이번에는 숫자가 약간 부족하나마 제대로 된 전력을 보내왔다. 그들이 이렇듯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청성의 처절한 현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혈천맹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그 현실을 아는 것이다. 참고로 파견한 정예의 숫자가 부족한 건 그들이 아직 전력을 투입하여 청성을 도우며 보호하고 있는 탓이었다.
백리우가 서류를 한 장 더 넘기며 말했다.
“곤륜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곤륜은 이번에 아예 문파 내 대부분의 인력을 무림맹 섬서 지부로 옮겼다.
곤륜이 청해 지역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감숙의 공동파가 궤멸되어 더더욱 지리적으로 섬처럼 동떨어진 형국이 되었다.
그 상황에서는 적침을 막아낼 수가 없으니, 아예 섬서 지역으로 피신하여 문도들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문상 제갈윤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곤륜의 문도들은 무램맹 섬서지부와 화산, 종남이 나눠서 수용했고, 현재의 곤륜파에는 정찰을 위한 몇몇의 인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어서 서너 장의 서류를 더 넘기며 훑은 백리우가 말했다.
“점창, 팽가, 모산파.”
그 말에 점창파의 장로인 원광생, 하북팽가의 장로인 팽야창, 모산파의 장로인 두원득 등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백리우의 눈치를 살폈다.
백리우가 이윽고 세 세력의 서류를 툭 떼어냈다.
그러더니 그 종이를 한 손으로 구겨서 탁자 아래에 버렸다.
백리우가 여전히 서류 뭉치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점창, 팽가, 모산파에 해주고 싶은 말도 아까 본 맹주가 남궁세가에 했던 말과 같네. 자네들도 하기 싫으면 나가게.”
“아미타불, 맹주……, 그래도 이건 너무…….”
조심스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그렇게 말한 사람은 소림의 유굉 대사였다. 백리우가 그를 향해 대꾸했다.
“대사님께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한데, 대사님.”
유굉 대사의 나이가 훨씬 많으니 백리우의 어조도 공손했다. 게다가 소림은 이번에 매우 협조적이기도 했다.
“하면 소생이 어찌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어떤 문파는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강호를 위해 기꺼이 정예 전력을 보내왔습니다. 한데 어떤 문파는 돕는 시늉만 냈습니다. 그건 단순히 자파 이기주의를 넘어서, 모든 백도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일입니다.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하나…….”
“우리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본인의 선택과 결정에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압니다. 돕는 시늉만 낸 문파나 세가들은 그 결정에 뒤따르는 책임도 질 각오를 했겠지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었겠지요.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서 환란에 대처하든 말든, 그건 이제 본인들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런 모습들을 보고도 소생이 그저 사람 좋게 넘어가면, 모두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 문파는 뭐가 되느냔 말입니다. 그런 지도자를 누가 따르고 싶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이쪽도 버리고 저쪽도 버리는 행위입니다.”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소생이 그 과정에서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대사께서 염려하시는 게 그 부분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설득하고 타이르면서 심력을 낭비할 여력이 없습니다. 저러한 행위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해줄 수가 없습니다.”
“아미타불…….”
“저들이 저러는 건 결국 둘 중 하나입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자들이거나, 아니면 그걸 알면서도 소생과 무림맹을 엿 먹이려는 수작이거나. 그런 자들을 데리고 어떻게 함께 가느냔 말입니다.”
작정한 듯 말을 쏟아낸 백리우가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