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무림맹 장로회의 (4)
장내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온통 웅성거리기 시작한 가운데 몇몇의 인물들이 서둘러 물었다.
“문상! 밝히고 뭐 하고에 앞서, 정녕 그게 사실이오?”
“정말로 확실한 거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제갈윤은 대꾸하지 않고 좌중의 행동을 가만히 살필 뿐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이오?”
“어찌 이런 일이……!”
좌중들이 점점 더 동요하자 제갈윤이 양손을 펴서 내밀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진정들 하십시오. 일단 송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습니다. 그런 첩보 따위는 없었습니다. 평소 소생과 가까운 분이든 대립하는 분이든, 소생이 의심하는 분조차도 없습니다. 혼란을 드린 점, 다시 한번 송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 말과 함께 제갈윤이 좌중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해 보였다.
“무, 문상!”
“만약 농이었다면 너무 지나치셨소!”
“여기가 지금 장난할 자리요?”
여기저기에서 노기 가득한 외침들이 들렸다. 하지만 제갈윤은 사람 좋은 미소만 보이고 있을 뿐, 전혀 동요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황을 가정해보기 위해 소생이 진실인 척 말씀드렸던 것뿐입니다. 자, 방금 어떠셨습니까? 만약 변절자가 있었다면, 가려내실 수 있었겠습니까? 없으셨겠지요. 증좌도 없을뿐더러, 모두가 오래 알고 지내던 분들이고 딱히 의심이 갈 만한 심증도 없으니까요. 아니, 애초에 아예 변절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안 하셨을 겁니다.”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하면 다시 여쭙겠습니다. 신룡대에 변절자가 있는지 없는지, 맹의 수뇌부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들의 모습이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말입니다. 공동파와 청성파에도 변절자가 있었으니 여러분이 속한 곳에도 변절자의 존재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속한 곳에서 미리 변절자 색출 작업을 펼칠 자신이 있으십니까?”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변절자 색출 작업?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구성원 각자가 변절이나 배반 등의 이유로 의심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문파나 세가의 모든 구성원들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게 된다. 구성원 상호 간의 근본적인 신뢰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변절자를 색출하려다가 오히려 불신만 쌓이는 꼴이다. 결국 회복이 안 되는 상처로만 남을 공산이 크다.
문파나 세가라는 강호 세력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인지도와 명성이 높은 거대 문파와 명문세가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평소에 신룡대원의 처우를 더 신경 썼어야 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지요? 신룡대의 처우 개선안과 급여 인상안을 몇 년째 부결시킨 곳이 바로 이곳, 장로회의니까요. 물론 처우를 개선했다 하여 변절자가 없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입니다.”
제갈윤의 말이 끝나자 여태껏 조용히 있던 현월곡주 단목수헌이 입을 열었다.
“아마 적들은 이런 상황을 노리고 있을 것이오. 배신자와 변절자에 관한 부분은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소. 서로 의심하게 하여 내부 분열을 도모하고, 이 일에 우리의 심력과 시간을 낭비하게 하려는 수작이오. 말려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단목수헌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윤이 말했다.
“소생의 생각도 현월곡주님의 뜻과 같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뚜렷한 증좌 없이는 변절자를 색출해낼 수도 없습니다. 현실이 이렇다면 변절자의 존재 가능성을 염두에 둔 내부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논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할 겁니다.”
몇몇이 그 말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궁보가 펼쳤던 주장이 애초에 무리수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소생은 책임을 회피하려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신룡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맹의 수뇌부에 있고, 주된 관리자는 소생이었습니다. 책임을 물으시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 뭐, 문상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 걸로 책임을 묻다니요. 그렇게까지 몰고 갈 사안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게 말한 인물은 얼핏 봐도 다른 이들에 비했을 때 풍기는 분위기가 남다른 자였다.
그가 바로 강호 전통의 명문인 화산의 장문인, 화무진(華茂進)이었다.
무림맹 섬서지부가 있는 서안과 화산은 매우 가까우니 화무진의 경우에는 장문이 직접 참석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종남파에서도 장문인이 참석했다.
화무진은 백도 십대 고수 중 일인이기도 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가 나선 건 역시, 제갈윤을 비호하기 위해서였다.
화무진이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본 장문의 생각인데, 다른 의견들 있으시오?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기탄없이 말씀해보시오. 단, 뒤에 가서 수군대진 맙시다.”
매우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누구도 화무진 이후에 입을 연 사람은 없었다.
그 상태로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문상께서 어차피 의혹들을 해소해주고 계신 참이니 소생이 또 다른 질문 하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겸손한 어조로 입을 연 그는 모용세가에서 참석한 모용국(慕容菊)이었다. 삼십 대 후반의 그는 이번 장로회의 참석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이번에 모용세가에서도 정예 차출 건에 온전히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다른 곳에 비하면 나은 편이긴 했지만, 정예라 하기엔 여전히 애매한 전력들이었다.
“말씀하시게.”
제갈윤이 대꾸하자 모용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매우 조심스러운데, 근래에 이상한 소문을 접해서 말입니다. 저 외에도 접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신룡대의 묵룡이 사이한 무리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나도 들었소. 묵룡이 그 옛날 강호를 피로 얼룩지게 했던 소수마후의 세력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었소.”
그러자 또 다른 이가 말했다.
“소수마후뿐만이 아니오. 심지어는 천마신교와도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소.”
그들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장내가 또다시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건 결코 좌시할 수가 없는 문제요! 신룡대를 대표하는 그 묵룡이 아니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니, 소문의 진위 여부를 명명백백히 밝혀야 할 것이외다!”
“그렇소!”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모든 이들의 이목이 또다시 제갈윤에게 집중되었다.
제갈윤은 대답 대신 미미한 미소를 보인 채로 좌중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물어봅시다. 문상께서는 그 소문들을 들어본 적이 있소, 없소?”
그제야 제갈윤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하면, 묵룡에게 그 점에 대해 확인하셨소?”
“소생이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묵룡은 이미 다음 임무에 투입된 후였습니다. 현재 여전히 임무 수행 중인 바, 아직 그를 통해 직접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 참 답답하구려! 그토록 중대한 사안이라면 전서를 보내서라도 서둘러 확인을 해야 할 게 아니오!”
마지막에 언성을 높인 인물은 모산파의 두원득(豆願得)이라는 자였다.
“두 장로님. 지금 이 순간에도 묵룡은 본 맹과 백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을 빌미로, 내통을 의심하는 전서를 보내라고요?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는 어찌할까요?”
“그래도 사안이 사안이잖소!”
“싸우러 나간 장수의 사기를 그런 식으로 떨어트리는 지휘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확인해도 충분합니다.”
제갈윤이 대꾸하자 이번에는 팽야창이 나섰다.
“진정하시오, 두 장로. 그건 문상의 말씀이 옳소. 서둘러 전서를 보내어 확인한다 해서 좋을 일은 조금도 없는 것 같소.”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팽야창의 말에 두원득도 더 이상은 나서지 않았다. 팽야창이 제갈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상. 만에 하나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땐 어찌할 작정이신지요? 묵룡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룡대 최고의 실력자입니다. 이전에 청성에서 활약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그 높았던 명성이 더 높아졌지요. 그런 이가 적과 내통했다는 게 사실로 밝혀지면 본 맹이 받는 타격도 상당히 크지 않겠는지요?”
조심스러운 척하는 어조였다.
제갈윤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묵룡이 내통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문상께서는 아직 소문의 진위 여부를 당사자에게 확인해보지도 않으셨다 했습니다. 예로부터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 했는데, 어찌 그렇게 확신하듯 말씀하시는지요?”
“때때로 싸움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라면,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물론 묵룡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한 소문을 유발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묵룡이 내통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지요? 근거가 있습니까?”
“근거가 있습니다만 아직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갈윤이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팽야창 대신 남궁보가 나서며 말했다.
“아까 얘기가 나왔던 신룡대의 관리 문제야 문상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더라도, 이번 문제는 얘기가 좀 다릅니다. 묵룡에 대해 그렇게 확신하듯 말씀하셨으니, 혹여 잘못되었을 경우에 그 책임을 피하시기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제갈윤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하지요. 남궁 장로께서는 소생이 어떻게 책임지기를 원하십니까?”
“그건 나중에 확인이 된 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겠지요.”
남궁보가 그렇게 대꾸했을 때였다.
회의장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설령 이 강호가 뒤집어진다 해도 네가 뭔가를 책임져야 할 일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이다, 윤아. 아니, 문상.”
그의 등장에 좌중의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섰다.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맹주 백리우였다.
의장 역을 대리하고 있던 제갈윤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자 백리우가 상석에 섰다.
“맹주님을 뵈오이다.”
유굉 대사가 선창하며 예를 취하자 장내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백리우를 향해 예를 취했다.
“맹주님을 뵈오이다!”
백리우가 포권하며 대꾸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셨소.”
보통은 상호 간의 예가 끝나면 맹주가 먼저 자리에 앉는다. 그래야 다른 인원들도 착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리우는 상호 간의 예가 끝난 후에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서 있는 상태로 말했다.
“아울러 이와 같이 중요한 자리에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함께 드리고 싶소.”
말을 마친 백리우가 여전히 서 있는 상태에서, 들어올 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서류철은 두 개였다.
“이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서기들에게서 받은 오늘의 회의록이오.”
그게 백리우가 들고 있던 첫 번째 서류철이었다.
팔랑, 팔랑.
백리우가 빠르게 서류들을 훑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첫 번째 서류철을 확인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확인을 마친 백리우가 말했다.
“아하.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셨군그래.”
그 직후, 백리우를 바라보던 모든 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찌익― 찌익―
백리우가 회의 내용이 담겨 있던 서류들을 찢어버린 탓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백리우는 찢어진 종잇조각들을 회의장의 넓은 탁자를 향해 힘차게 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