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무림맹 장로회의 (1)
“그냥요. 이렇게 보호받고 있는데 노는 것 같은 모습만 보이는 것도 뭣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뭐라도 거들 게 있을 듯해서.”
갑자기 찾아가서 일을 돕겠다고 했을 때, 문상 제갈윤은 한동안 대꾸하지 않았었다.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윽고 승낙했는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숙제를 해오라 했다.
그러면서 제갈윤이 내어준 것은 산더미만 한 서류였다. 한두 달 전의 서류들이었는데, 이미 결재도 끝나서 보관 중인 문서들이었다. 그것을 읽고 정보를 정리하라는 숙제였다. 일종의 시험인 것이다.
그게 바로 사흘 전이었다. 지금도 그 서류들이 방구석에 쌓여 있다.
“숙제 말이야. 기한은 딱히 정해주지 않았다고 했지?”
“네. 제가 파악해내는 정보의 질도 질이거니와,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 하는 부분도 시험인 거죠.”
그러자 방구석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일별하더니 송채령이 말했다.
“에고. 문상 어른도 어지간하시네. 아무리 시험이라도 저 많은 서류들을 어떻게 혼자…….”
“그분은 그걸 혼자 하시니까요. 그것도 단시간에.”
“그래서, 사매는 얼마나 처리했는데?”
“그냥……, 반쯤요.”
그 말에 송채령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런 거, 기한을 한 달을 줘도 다 못 끝낼 텐데. 내 입장에서는 문상 어른이나 사매나, 똑같이 인간 같지가 않아.”
한설연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또다시 한 모금의 차를 들이켠 후에 송채령이 말했다.
“요즘 말이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느끼는 건데, 설연이 너 정말 어른스러워졌어. 강호 경험을 하고 오더니 부쩍 어른이 됐어. 물론 네게는 힘겨운 시간들이었겠지만.”
“제가 그 전에 너무 철이 없었던 거죠.”
“나도 강호 경험을 좀 하고 와야 하려나 봐.”
“언니는 안 그래도 충분히 어른스럽다구요.”
“더 넓은 곳들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다 좋은데, 강호가 좀 조용해지면요.”
한설연의 말에 송채령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연이 너, 어른이 된 것뿐만이 아니고, 더 여성스러워지기도 했어.”
“네?”
그러자 송채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자꾸 모른 척할 거야, 그렇게? 하긴, 본인은 잘 모르겠지? 요즘 본인이 종종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표정인데요?”
“다른 건 몰라도 그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는 내가 잘 알아. 그건 바로 사랑에 빠진 여자의 표정이니까.”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게 어떤 표정인데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 다만 사랑에 빠져봤던 여자라면 느낄 수 있는 게 있지. 상대가 누구일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네. 그 사람이지? 묵룡.”
한설연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사부만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송채령도 눈치채고 있었다니.
“너 사천지부로 돌아오자마자 그날 저녁에 나갔었잖아. 그 후에 맹주님이 찾아왔었어. 그때 얼핏 들었어. 묵룡조원은 이틀간 휴가, 그리고 그 사람은 사흘간 휴가라고.”
맹주님도 참. 조심 좀 하시지.
“너도 꼬박 사흘간 늘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왔지. 마지막 날은 조금 더 늦었고. 그날부터였어. 네가 종종 그런 표정을 짓기 시작한 게.”
그 사흘을 단유소와 보냈었다.
다시 떠올려도 꿈만 같았던 시간들이었다.
인피면구를 쓴 채로 평범한 연인들처럼 저자를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맛있는 것도 함께 먹었고 대죽현의 좋은 경치들도 구경하러 다녔다. 어떤 날에는 허름한 객잔의 사람들 틈에서 값싼 술도 마셨고, 또 어느 날에는 고급스러운 객잔에서 비싼 술도 마셨다. 그러면서 그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든든한 시간이었고, 가슴 떨리는 시간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엇이든, 어디든 좋았다.
그만 있다면. 그와 함께라면.
나무로 만든 가락지는 마지막 날 밤, 헤어지기 직전에 그가 선물해준 것이다.
그게 벌써 삼 주 전이었다. 그동안 무림맹은 전진 기지를 사천지부에서 섬서지부로 옮겼다.
“묵룡이라니. 그 묵룡이라니……. 그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사실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 유명한 묵룡이 그렇게까지 젊은 사람일 줄은 몰랐어. 젊은 나이에 그렇게 강한데도 사람이 참 겸손하고. 좋은 사람 같았어. 외양보다 내면이 더 바르고 단단한 사람일 것 같은.”
한설연이 미소만 지어 보이자 송채령이 물었다.
“보고 싶지?”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송채령과 함께 단유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신이 그녀를 너무 배려해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언니.”
“뭐가?”
“사형에 관한 일……, 결국 하나도 밝혀내지 못했어요. 목적은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로 한심하게도 현월곡의 식구들만 잃었어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연애나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못써. 그런 말 하면.”
송채령이 주의를 주듯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사형을 좋아하고, 사형과 나는 사귀는 사이야. 사형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지. 하지만 너도 내겐 소중한 사매야. 부모도 형제도 없는 내게 있어, 너는 자매야.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하며 너를 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송채령이 타이르는 듯한 표정과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어려움 속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나는 더 바랄 게 없어. 애초에 사형을 찾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한 일이었고 어려운 일이었어. 일이 잘 안 풀렸을 뿐이고 운이 없었을 뿐이야.”
“언니…….”
“설연이 너는 결코 한심하지 않아. 오히려 내 자랑이지. 그리고 네가 그런 멋진 사람과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그래도 언니도……, 사형이 보고 싶을 거 아녜요.”
“응……. 보고 싶지.”
그러자 한설연이 일어나더니 송채령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무사할 거예요, 사형은.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잖아요.”
처음 있는 일이니 송채령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한설연의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럴 거야.”
* * *
“장로회의에 참여할 각 파의 대표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화산과 종남에 들렀다가 오는 인원들도 많으니, 아마 이삼 일 내에 모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제갈윤의 보고에 백리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우가 무림맹 장로회의를 개최하겠다고 공표한 건 삼 주 전이었다.
장로회의라 하여 각 파의 장로들이 참여하는 게 아니라, 무림맹 내에서 장로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회의였다.
무림맹의 장로직은 거대 문파의 장문들과 명문세가의 가주들이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장로 회의에는 그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최소한 그들을 대리하여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큰 행사였다.
백리우가 물었다.
“그들이 대동하는 정예들의 수준은 어떤 것 같아?”
회의의 안건에 대해서는 이미 회의를 공표할 때에 전서에 적어서 보냈다. 그 안에 정예 전력 차출에 관한 건도 포함되어 있었고, 다급한 사안인 만큼 미리 조치를 취하게 한 것이다.
각 거대 문파와 세가 내에서 오십 위 안의 고수는 이십 명 이상, 백 위 안의 고수는 삼십 명 이상으로 하여, 각자 최소 오십 명 이상의 정예 무인들을 차출하라는 게 골자였다.
제갈윤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뭐, 예상대롭니다. 문파 내 무공 서열 오십 위 이내의 고수들은 거의 빠져 있습니다. 구색만 맞추듯 두세 명 끼어 있을 뿐이고, 백 위 안의 고수들이 십수 명, 그 외에는 반 이상이 백 위권 밖의 고수들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거대 문파에서 백 위권 밖이면 일류 무사 중에서도 중급 정도인가?”
“예, 뭐…….”
백리우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이런 정신 나간 작자들 같으니! 지난 삼 주 동안 적의 손에 동도들이 그렇게 작살났는데도 겨우 그딴 식이라고?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다들 미친 거 아냐?”
전에 공동파가 당하고 일전에 청성이 당한 후로 아직 거대 문파나 세가가 적에게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아래 규모의 대문파나 세가들은 몇 곳이 당했다. 그 아래의 중소 문파는 수십 곳이 당했다. 주로 중원이 아닌 변두리 지역의 문파들이었다.
그런 상황들이 있었기에 문파의 정예들을 차출하라 한 것인데, 다들 반응이 저 모양인 것이다.
제갈윤이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만 지어 보이자 백리우가 다시 말했다.
“윤아.”
“예.”
“때려치우자.”
“확 그래버릴까요?”
“이게 뭐냐? 대체 그 작자들이 생각이 있는 작자들이냐? 백도라는 공동체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찌 이럴 수가 있어? 자기들이 이뤄놓은 게 그저 자신들의 힘으로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하나씩 이렇게 다 무너지면 결국 자기들도 무너진다는 걸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거야?”
“백도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서 지속되어온 지금의 평화가 너무 길었던 탓입니다. 오랜 고난을 함께하면 적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고, 오랜 평화를 함께하면 친구도 적이 되곤 하는 법이니까요.”
제갈윤의 말에 백리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백리우가 넌지시 물었다.
“그 아이는 어떠냐? 일을 가르쳐달라며 찾아왔었다면서?”
백리우가 말하는 대상이 한설연임을 알고 제갈윤이 대꾸했다.
“뭐, 아직은 모르지요.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시킨 것도 아니고. 일단 숙제만 조금 내줬습니다.”
그러자 제갈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리우가 말했다.
“너어……, 또 숙제 무지막지하게 내줬구나?”
제갈윤은 의천각과 문상부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부하들을 혹독하게 교육시키기로 유명했다. 물론 초기 업무 교육에 한해서였고, 또 지휘 계통이나 주요 업무 담당자들에 한해서였다.
두뇌 쪽으로 내로라하는 기재들 중에서도 그 혹독한 초기 교육을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간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저 무지막지한 숙제의 양 때문이다.
그 숙제조차 완수하지 못하면 어차피 이후에도 버티지 못하는 곳이 바로 무림맹의 문상부라나 뭐라나.
게다가 그 많은 숙제를 완료하는 시간도 중요하다.
마감 기한을 미리 알려주지는 않지만, 제갈윤이 마음속에 정해둔 마감 기한은 늘 있다. 숙제를 완료했다 하더라도 그 기한 안에 완료하지 못하면 탈락이다.
그 경우에는 멍청하거나 성실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나 뭐라나.
제갈윤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 유명한 교월 아닙니까. 명성에 걸맞은 정도로 내줬습니다.”
백리우가 째진 눈으로 말했다.
“평소의 두 배쯤 내준 모양이군.”
“두 배라니요. 그건 교월이라는 명성을 모독하는 행위지요. 적당히 네 배 정도 내줬습니다.”
“컥!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너 설마, 애 잡으려고 그러는 거야?”
“크게 쓰려면 시험도 더 어려워야지요.”
“아, 지독한 놈.”
백리우가 제갈윤을 바라보며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