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휴가 (4)
몸이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말 때문일까?
그가 지금껏 자신을 지켜줬던 상황들이 한순간에 머리를 스쳐 가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었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처절하게 싸워가며 늘 자신을 지켜줬었다.
거기에 단유소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해주자, 기쁜 마음에 울컥하여 결국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뭐, 뭐야, 한 소저? 왜, 왜 그래?”
단유소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한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흐느낄 뿐이었다.
그런 한설연을 잠시 바라보던 단유소가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한설연의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말없이…….
울음이 멈췄는데도 한설연은 단유소의 품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느껴지기로, 단유소 또한 자신을 안고 있는 팔을 풀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따뜻했다.
그리고 편안했다.
그 전에도 그의 품에 안겼던 적이 있었지만, 오늘이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것 같았다.
단유소의 품에 안긴 채로 한설연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볼에 닿아 있는 그의 가슴이 울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 맹주님께 충성하기로 서약한 몸이야. 임무의 연속인 삶이고, 신룡대에 있는 한 그 삶의 반복이야. 임무 중에는 당신에게 연락을 해서도 안 되고, 설령 우연히 마주쳐도 알은척을 할 수도 없어. 그리고 그게, 내가 먼저 당신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해. 당신이 아까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바로 대꾸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고.”
단유소가 혼잣말하듯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그래.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외로움을 감수하라는 말이 되는데. 해주는 것도 없이 속박만 하는 꼴인데. 우리가 아무리 이런 사이라 해도 당신, 외로울 거라는 뜻이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아쉬울 수밖에 없을 거라는 뜻이고.”
한설연이 품 안에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 공자님의 상황 잘 알고 있고, 이해해요. 이 강호는 단 공자님이 필요하고, 단 공자님은 이 강호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야만 하죠. 단 공자님은 그러셔야 해요. 저를 지켜줬듯, 많은 사람들을 지켜줘야 해요. 당연히 단 공자님은 제게 할애할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거의 없을 수밖에 없겠죠.”
“보고 싶어도 못 볼 거야. 대부분 그런 식일 거야.”
“그렇겠죠. 각오하고 말했던 거예요.”
단유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시간, 그래서 외로운 시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요. 그보다 더 싫은 건, 이대로 단 공자님이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거니까.”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설연이 품에 안긴 상태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리고 나,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그립고 외로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그런 여자 아니라구요. 바쁘게 살 거예요. 해야 할 게 많아요. 이번에 단 공자님과 함께 강호를 경험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걸 위해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요.”
“꼭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뭔데?”
“있어요. 비밀.”
“비밀인 건 그렇다 쳐도, 예쁜 척은 자제해.”
그 말을 마친 순간 단유소의 얼굴이 급격하게 한설연의 얼굴 앞으로 가까워졌다.
한설연이 채 반응할 새도 없이 단유소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휘둥그레졌던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단유소가 입술을 뗐다.
여전히 얼굴이 가까운 상태에서 단유소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을 수가 없어지거든, 이렇게.”
잠시 그를 바라보던 한설연이 대꾸했다.
“참을 수가 없어지는 건 그렇다 쳐도, 난 예쁜 척하는 게 아니에요. 원래 예쁜 거지.”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게 답답하군.”
“답답해할 일인가요? 단 공자님의 입장에서는 복이 굴러 들어온 거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이번에는 한설연이 먼저 단유소에게 입을 맞추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단유소는 그녀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방금 전과 달리 이번의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한설연이 부끄러운 듯 단유소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에서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쪽은 한설연이었다.
“나……, 부탁 있는데.”
단유소가 안은 상태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한설연이 말했다.
“단 공자님이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요.”
단유소에게서 한동안 대꾸가 없자 한설연이 다시 말했다.
“그,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단 공자님의 생김새가 어떠하든 이미 내게 그런 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그래. 당연히 알아야지. 잠시만.”
짧게 대꾸한 단유소가 한설연을 안고 있던 양팔 중 한 팔을 풀었다.
그 직후, 인피면구를 떼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지익― 지익― 지이이익―
그 후 단유소가 다시 말했다.
“됐어.”
한설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의 골격은 엇비슷하지만, 느낌은 완전히 다른 얼굴 하나가 있었다.
한설연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 갔다.
남자들치고는 하얀 피부에 선이 고운 얼굴선.
쭉 뻗은 눈썹에 오뚝 솟은 코가,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그의 눈과 매우 잘 어울렸다.
미남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남인 게 아니라, 그냥 미남이었다. 서백풍이 사내다운 시원한 미남이라면, 단유소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단유소는 평소에 보이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간은 민망해하는 듯한 미소였다.
그런데 그 미소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을 때와는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인피면구를 쓰고 있을 때에는 약간 어색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으로 저 미소를 지으니 더없이 잘 어울렸다.
선한 느낌의 미소였다.
이 얼굴로 그렇게 무시무시한 무공을 사용한다는 게 안 믿어질 정도로.
한설연이 빤히 바라보자 단유소가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빤히 바라보니 좀……, 민망한데 말이야.”
“참아봐요. 내가 이 모습 새길 때까지.”
“그래. 뭐, 그건 참을 수 있겠는데, 계속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으면 다른 걸 못 참을 것 같은데.”
말뜻을 알아들은 한설연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밝히시긴.”
“이 정도가? 내가 진짜 밝히면 어떻게 되는지…….”
단유소는 말을 잇지 못했다.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설연이 또다시 입술을 맞춰온 탓이었다.
긴 입맞춤이 끝난 후에 한설연이 단유소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지금은 이 정도만 밝혀요.”
단유소가 그녀를 안은 채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응.”
* * *
“하아…….”
탁자 앞에 앉아서 서류를 읽으며 서책을 뒤지던 한설연이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사시정(巳時正, 오전 10시)쯤 된 시각.
조식을 먹고도 한 시진 반쯤을 꼬박 책과 서류만 뒤지다가 처음으로 취하는 휴식이었다.
아담한 방.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니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은 지금 뭐 하고 있나요?
사선에서 또 부지런히 검을 휘두르고 있나요?
다친 데는 없나요? 다른 분들은 무사한가요?
당신도 내 생각, 종종 하나요?
그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도 한설연은 앞섶에서 뭔가를 꺼내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목걸이에 달려 있는 그것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 가락지였다.
그가 직접 깎아서 옻칠까지 하여 선물해준 물건이었다. 가락지의 바깥 면에는 하늘을 나는 용 한 마리가 보름달에 비친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고, 안쪽 면에는 ‘소(嘯)’라는 글자와 ‘연(連)’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각각 이름의 마지막 글자들이었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짧은 시간에 만든 것치고 굉장한 수준의 품질이었다. 이름난 장인이 만들었다 해도 믿을 만한 수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의 취미라고 했다.
사부와 단둘이서만 지냈는데, 무공을 수련하다가 힘들고 지치면 나무를 이용해서 작은 무언가를 조각하며 마음을 달래곤 했단다. 잠들기 전에도 꼭 뭔가를 조금씩, 조금씩 조각하면서.
나무 가락지를 받을 때의 생각을 하며 한설연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설연이 안에 있니? 차를 내왔어.”
밖에서 들린 송채령의 목소리에 누워 있던 한설연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얼른 문을 열었다.
햇빛이 비치는 눈 쌓인 마당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로 송채령이 서 있었다.
“언니, 이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자꾸…….”
송채령이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다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송채령이 차를 따랐다.
또르르―
따뜻한 김이 찻잔을 타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송채령이 말했다.
“알아. 너도 차 정도는 혼자 끓여 마실 수 있는 거. 그래도 차 끓이는 것만큼은 내가 너보다 나으니까, 그냥 내가 끓여주는 거 마셔.”
“미안하니까 그러죠. 밥이며, 차며, 집안일이며, 사부님 모시는 일이며……, 다 언니가 하는데.”
“내가 언제는 안 그랬니? 너 곡에서 나가기 전까지도 내가 다 하던 건데 뭐. 네가 근래에 자꾸 부담스러워했을 뿐이지.”
실제로 그랬다.
송채령은 현월곡에서도 항상 엄마 같은, 큰언니 같은 역할을 했다. 사부와 사형제들을 챙기고, 곡의 일원들을 늘 챙겨주는 사람은 항상 그녀였다.
무림맹 사천지부에 있을 때에도, 그 후에 지금의 섬서지부에 와서도, 송채령은 현월곡 사람들이 머무는 별채의 일을 도맡아 했다. 맹에서 지원해주는 일꾼들도 받지 않았다. 모든 걸 혼자서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늘 같았다.
음식이든 집안일이든 모든 게 무공 수련이 된다나.
아마도 사형 진소학은 송채령의 그런 모습들에 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송채령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그래도 난 요즘이 참 좋아. 설연이 네가 언니라고 불러주고. 그 전까지는 그렇게나 언니라고 부르라 해도 끝까지 사자라고만 부르더니.”
송채령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근래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강호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단유소와 함께 시간을 보낸 후부터였다.
그 전까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사자라는 호칭을 고집했던 건 치기 어린 질투심 때문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진소학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왜 그랬을까.
한설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송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보면 저녁 식사 후에도 거의 자정까지 수련하고, 그 후에도 늦게까지 책 읽다 자는 것 같던데. 새벽에도 일찍부터 일어나서 수련하고. 대체 잠을 자긴 하는 거야? 두 시진도 안 자는 것 같던데. 쉬엄쉬엄 해, 설연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이 정도로 무리는요. 할 만하니까 하는 거예요.”
실제로도 무리가 아니었다.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강호에서 겪었던 고난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무공까지 강해져서인지 그다지 피로하지가 않았다.
송채령이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문상 어른의 일을 돕겠다고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