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휴가 (3)
그러자 한설연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단 공자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저, 여기까지 혼자 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믿음직한 분이 데려다주셨어요.”
“하긴, 혼자 왔다면 당신이 제정신이 아닌 거겠지.”
“피이! 말씀을 하셔도 꼭. 그러게 오늘 바로 회식을 하실 거였으면 아까 언질이라도 주셨어야죠. 사람이 의리가 있지 말이야.”
한설연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그렇게 대꾸하자 단유소가 조용히 술을 반 잔만 마셨다. 그러더니 말했다.
“당신, 늘 보고 싶어 했잖아. 사부님, 사형제들 그리고 구 대주님까지. 당연히 그분들도 당신을 보고 싶었을 것이고. 직접 보니 그분들이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도 알 것 같았어. 그런데 복귀한 당일에 어떻게 당신에게 나오라고 해? 당신에게도, 그분들에게도 도리가 아니지.”
한설연이 빙그레 웃었다.
“네. 알아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한설연이 이윽고 탁자 중앙에 꽂혀 있는 젓가락 한 쌍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탁자 위에 놓은 음식들을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곽승추가 말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한 소저는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드셔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왠지 한 소저 같은 분은 과장해서 말하면 이슬만 드실 것 같은 느낌인데 말입니다.”
한설연이 음식을 씹으며 입을 가린 채로 대꾸했다.
“그건 너무 많이 과장하셨네요.”
“하핫! 그래서 보기 좋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자들이 다소곳하게 보이겠답시고 음식 앞에서 너무 깨작거리는 거, 남자들은 의외로 썩 달가워하지 않거든요. 별로 예쁘게 보이지도 않고.”
“헤헤. 제가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단유소가 말했다.
“하긴, 당신이 먹는 거 하나는 잘 먹지.”
그러자 한설연이 자신의 젓가락으로 볶은 고기와 야채를 먹기 좋게 집더니 단유소를 향해 내밀었다.
“단 공자님, 아아.”
그러자 단유소가 당황하며 말했다.
“무, 무슨 짓이야? 벌써 취했어?”
“아아.”
“안 먹어. 당신이나 먹으라고. 난 배부르니까.”
단유소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호홋! 다른 공자님들 계시다고 내외하시는 거예요? 귀여우시다니까.”
한설연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젓가락에 집었던 음식을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이젠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단유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즈음, 조원들의 눈빛이 빠르게 마주쳤다. 네 사람의 눈빛이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답답함이었다.
조원들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각자의 술잔을 들이켰다.
이후에도 여섯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부어라 마셔라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계속된 술자리가 두 시진 동안 이어져 어느덧 자정을 넘겼을 무렵, 방에는 단유소와 한설연만이 남았다.
뒷간에 간다며 나가고, 술 깨러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하나둘씩 나간 조원들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제야 조원들의 의도를 파악한 단유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놈들이…….”
한설연이라고 해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를 리 없었다.
“고, 공자님들도 참…….”
단유소가 보니 옆에 앉은 한설연은 술잔에 시선을 둔 채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술이 올라와서인지 그녀의 양 볼은 적당한 홍조를 띤 상태였다. 자세도 약간 흐트러졌다. 그런데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다.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우, 우리도 슬슬 일어날까?”
“술이 이렇게 남았는데 가긴 어딜 가요. 저거 다 마시기 전까진 안 갈 거예요. 이렇게 마음 편하게 마시는 술이 얼마만인데.”
“어지간히 마셔, 술꾼.”
“더 마실 거예요. 아까 말했잖아요. 오늘은 코가 삐뚤어져라 마실 거라고.”
“얼씨구.”
그러자 한설연이 뻔뻔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뭐, 단 공자님도 가실 거면 가세요. 이렇게 술 취해서 혼자 남았다가 적들에게 발각된다 해도 어떻게든 되겠죠, 뭐.”
“이제 협박까지? 많이 컸네, 한 소저.”
“이히.”
“에휴.”
단유소가 한숨을 내쉬더니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한설연이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정말 끝났네요. 제 첫 강호행도, 단 공자님의 임무도.”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단 공자님과 함께 겪었던 그 모든 일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단유소는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단유소를 향해 한설연이 술잔을 내밀었다.
“정말 감사했어요, 단 공자님.”
단유소도 묵묵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한설연이 자신의 술잔을 단유소의 잔에 대었다.
틱!
잔이 부딪혔고 두 사람이 묵묵히 잔을 비웠다.
한설연이 또다시 단유소의 잔에 술을 채우더니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이어서 한설연이 젓가락으로 적당한 크기의 안주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단유소의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아아.”
그러자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한설연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이윽고 입을 벌렸다. 한설연이 그의 입에 안주를 넣었다.
안주를 씹는 단유소를 향해 한설연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히. 먹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단유소가 피식 웃었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만 흘렀다. 그러던 중에 한설연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어색할 땐 짠.”
단유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어 올렸고, 두 사람은 또다시 술을 마셨다. 단유소는 반절만 비웠고, 한설연은 한 잔을 온전히 비웠다.
“천천히 마셔, 한 소저.”
“그럴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떨리는 마음이 도저히 진정되지가 않아서요.”
단유소의 양 눈썹이 살짝 모여들었다.
“제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거든요.”
단유소의 눈동자가 커질 때 한설연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예. 좋아해요, 제가. 단 공자님을.”
한설연의 양 볼은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그 볼이 홍조를 띤 게 술기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줍은 그녀의 눈동자가 진심을 담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기도 했거니와, 일전에 맹주가 말해주기까지 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건,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직접적으로 저 말을 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막상 이렇게 되니 당황스러웠다.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심장만 터질 듯 두근거릴 뿐.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고 있는 건 한설연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마주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꺼낸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지금껏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직접 말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용기를 내자고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더 되뇌었다. 그런데도 막상 말을 하려니 잘 되지가 않았다.
거절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두려웠기 때문이다. 거절을 당한다는 건 결국,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는 뜻과 같으니까.
그러나 그에게 고백하지 않고 이대로 헤어진다고 해도 결과는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고백하지 않아도 그는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 생각이 든 후에야 용기가 났던 것이다.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의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술잔만 바라보고 있는 지금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만이 느껴질 뿐, 그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왜 대답이 없냐고 조심스럽게라도 다시 물어봐야 하나?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저러는 거면 어쩌지?
부담 갖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미리 한마디라도 던져놓을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지금,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심장 박동 소리만 더욱 거세어져 갔다.
“고마워, 한 소저.”
이윽고 단유소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한설연이 고개를 들어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한설연도 마주 미소를 보였지만, 여전히 긴장되는 마음이 가시지는 않은 상태였다. 고맙다는 그 말을 긍정의 뜻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한설연이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예전에 주선연 때 말인데.”
한설연이 살짝 흠칫했다.
갑자기 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의 입에서 주선연이라는 말이 나오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그때 상처를 받았었으니까.
“네에…….”
그러자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응? 뭐야, 그 표정은? 설마 내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당신에게 그때의 일로 꼬투리를 잡을까 봐 그러는 건 아니지?”
“아, 아니 그,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딱 보니 그건데.”
단유소의 표정과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직 그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으니 긴장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저런 모습으로 인해 알 수 없는 편안함도 느껴졌다. 왠지 자신 또한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대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선연 때의 일은 왜요?”
“끝나고 헤어질 때 당신이 그랬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나와 동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잠시 그 얘기가 나왔었는데, 그때도 당신은 부인하지 않았지. 어쨌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이래도 괜찮은 거야?”
“아! 그, 그건…….”
한설연이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걱정했던 내용이 아니었던 탓이다.
“……짝사랑이었어요.”
“아…….”
“너무도 자상하고 따뜻하게 저를 대해줬던 사람이었어요. 그를 동경했죠. 그렇게 시작된 짝사랑이었어요. 볼 때마다 설렜어요. 그의 앞에만 가면 저는 멍청이가 됐죠. 말도 더듬고, 중언부언하고. 그 정도로 좋아했어요. 하지만 제가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게는 연인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연인이 있었다 해도 당신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 도의적인 부분 같은 게 존재하는 관계였나?”
“맞아요. 그 사람의 연인 또한 제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좋아했던 사람은 제 사형, 그리고 제 사형의 연인은 송 사자니까…….”
그 말에 단유소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구나.”
단유소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비어 있는 한설연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녀의 술잔에 시선을 둔 채로 단유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계속 생각했어. 아마도 내 착각일 거라고. 당신이 좋다는 마음이 드는 건, 서로 수많은 일들을 함께 겪으면서 친밀감이 생겼기 때문일 거라고. 친해졌으니 마음이 조금 더 가는 것일 뿐이라고. 당신을 지키고 싶은 건 임무 때문일 뿐이라고. 당신이 예뻐 보이는 건 그 미모 때문일 뿐이라고.”
한설연의 눈이 살짝 커질 때, 단유소가 한설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계속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아니었어. 청성에서 당신이 거학의 손에 넘어갔을 때, 신룡대원으로서의 제대로 된 판단은 당신을 포기하는 것이었지. 그때 내 몸 상태가 영 아니었거든. 그리고 다른 때였으면 포기했을 거야. 분명히.”
한설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을 되찾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더라고. 설령 내 몸이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확실히 알겠더군.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맞아. 나도 당신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