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휴가 (2)
한설연이 막 맹주와 문상의 숙소가 있는 건물을 벗어나서 마당의 대문을 나섰을 때였다.
“여어.”
한쪽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한설연이 바로 경공을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게 누구신가.”
누군가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신형을 홱 돌린 한설연이 그를 향해 서둘러 예를 취했다.
“헉! 헉! 허억! 매, 맹주님을 허억……! 뵈옵니다!”
곧 한설연 앞에 다가온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도착할 예정이라는 보고는 받았네만, 막상 이곳에서도 소저를 보게 되니 더욱 반갑군.”
반갑기로 따지면 맹주님을 만난 제 쪽이 몇 배는 더 반갑답니다. 이렇게 나타나 주셔서 제가 얼마나 감사해하고 있는지, 맹주님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한설연이 숨을 몰아쉬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리우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허허허. 저녁 운동 좋지. 소저는 그 미모를 가지고도 방심을 하지 않는구먼. 역시, 피부 미용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적당히 땀을 빼주는 게 좋겠지.”
“헉! 헉! 그, 그게…….”
그게 아니라구요, 맹주님!
“그래, 그럼 하던 운동마저 하고, 내일 곡주님, 송 소저 등과 더불어 조찬이나 함께하세.”
한설연을 향해 그렇게 말한 백리우가 돌아섰을 때였다.
터억!
한설연이 뒤에서 백리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백리우가 뒤돌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최대한 호흡을 진정시키며 한설연이 말했다.
“하아, 하아아……. 송구합니다, 맹주님. 하아아…….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하아, 하아아…….”
“아! 그런가? 말해보게.”
“단 공자님 계신 곳을……, 꼭 알고 싶어요.”
한설연의 말에 백리우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면 그렇게 뛰어다닌 게, 그 친구 찾아다니느라……?”
“예…….”
백리우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친구들이라면 방금 전에 봤지.”
한설연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저자의 객잔으로 들어가더군.”
한설연이 황급히 물었다.
“어, 어디인데요?”
“음……. 구석진 곳이라 설명해주기는 애매하고. 아! 그러면 되겠군. 내 수호위에게 안내하라 하겠네.”
“헙……! 어찌 제가 맹주님과 호위 무사분께 그런 누를…….”
“괜찮네. 안내만 해주고 돌아오면 되니까. 묵룡 그 친구만큼이나 든든한 사람이니 염려될 일도 없고. 곡주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리지. 어차피 문안인사도 드릴 겸 찾아뵈려 했으니.”
한설연이 백리우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건투를 비네.”
한설연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돌아섰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한 소저. 방금 맹주님께서 말씀하신 수호위입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점 양해하십시오.]
호의가 느껴지는, 그러나 절제된 목소리.
한설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또다시 전음이 들려왔다.
[아, 굳이 제 위치를 찾으려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소저께서는 저를 찾고 싶어도 찾으실 수 없을 겁니다.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입장이기에 이러는 것이니 양해하십시오.]
한설연이 미세하게 끄덕이자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앞으로도 저는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전음으로 소저를 안내할 겁니다. 항상 소저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테니 신변 안전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지부의 정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전음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길 약 일각쯤.
[그곳입니다, 소저.]
결국 한설연은 한 객잔의 앞에 도달했다. 삼 층 건물의 객잔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수호위를 향해 한설연이 고마움을 표했다.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모두들 아마도 이 층에 가장 큰 방에 있는 듯합니다. 소저께서 그쪽에 합류하시는 걸 확인하면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설연이 객잔으로 들어서서 전음이 알려준 방 앞에 도착했다.
똑똑똑.
닫힌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예에.”
연소운의 목소리임을 확인한 한설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가 곧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토록 찾았던,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한 소저……!”
한설연이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말했다.
“다들 나만 빼놓고 이러기 있어요? 의리 없이?”
묵룡조원들이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설연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을 전혀 못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말을 하는 와중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그녀의 용모는 인피면구를 착용한 모습이 아닌, 그녀의 본래 용모였다. 그러니 더욱 놀랄 수밖에.
사실, 사천지부를 뛰어다닐 때까지의 한설연은 인피면구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랬다가 지부를 나서기 직전에 맹주의 수호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매무새를 고쳤었다.
단유소를 만나러 가는 자리.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자리이니, 최대한 예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었던 탓이다. 그래서 인피면구를 벗고 세수를 한 후, 간단하게나마 얼굴을 치장하고 면사를 착용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 상황에서 한 가지 확실한 건, 한설연의 아름다움은 한 번 봤다고 해서 적응이 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경외심이 느껴지는, 압도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지난 시간, 저런 미인과 함께했었다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묵룡조원 모두가 여전히 놀란 상태로 멍하니 있을 때, 단유소의 옆에 앉아 있던 서백풍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이,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한 소저.”
“역시 서 공자님이시라니까. 그럼 사양치 않고.”
한설연이 사뿐사뿐 걸어와 원래 서백풍이 앉아 있던 단유소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백풍이 간단히 그녀 앞의 탁자를 정리하며 옆으로 옮겨 앉았다.
한설연이 앉자마자 단유소가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목이 말라서 일단 술부터 한 잔 마셔야겠어요.”
한설연이 그렇게 대꾸하더니 단유소의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집어 들었다. 술이 채워진 잔이었다.
의외의 행동에 당황한 단유소가 채 말릴 새도 없이, 한설연이 그 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캬아아아! 좋다!”
한설연이 눈매와 콧잔등만 살짝 찡그린 기분 좋은 표정으로 술맛을 만끽했다. 그런데 그녀의 그 표정이, 보고 있는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아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표정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가 어쩜 다 저리도 아리따울 수 있을까.
조원들은 몽롱한 표정이었지만 단유소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짓이야? 여분의 잔은 저기에 있잖아?”
단유소가 가리킨 곳은 탁자의 중앙. 그곳에 여분의 잔 두어 개가 포개져 있었다.
“어? 그러네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무 목이 말라서 그만…….”
“웃기시네. 의자에 앉는 순간 당신의 시선이 저 잔들에 잠시 멈췄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치! 이래서 초고수는 피곤해.”
“이게 초고수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자 한설연이 능청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 이 사람이 대체 누구 혼삿길을 막으려고.”
“호홋! 만약에 혼삿길 막히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해드리길 원하세요?”
능청스럽게 묻는 저 표정까지 너무도 귀여웠다.
단유소가 포기했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졌다. 졌어.”
“이히히.”
“웃지 마, 정들어.”
단유소가 핀잔을 주듯 말하자 한설연이 대꾸했다.
“에이 참, 분위기 봐서 대충 좀 넘어가시지. 알았어요, 알았어. 여기요.”
한설연이 자신이 들고 있던 단유소의 잔을 내밀자, 단유소가 그녀의 손을 막으며 탁자 중앙에 있던 새 잔을 끌어왔다.
“남의 잔으로 마시는 거 좋아하는 당신이나 그걸로 실컷 마셔. 난 새것 쓸 테니.”
“그러죠. 어쨌건 제가 일단 단 공자님부터 한 잔 따라드릴게요.”
한설연이 술병을 들이밀자 단유소가 마지못한 척 잔을 들어 올렸다.
또르르―
잔이 채워지고 나자 한설연이 조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또 잔 비우신 분?”
“다 채워져 있습니다. 소저께서 오시기 직전에 건배를 하고 막 다시 잔을 채운 참…….”
연소운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서백풍과 곽승추, 이어서 진평까지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기 때문이다.
탁! 탁탁!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곽승추가 말했다.
“채워진 잔은 소운이 것뿐인 듯한데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연소운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 또한 순식간에 잔을 비운 것이다.
“승추 형님이 뭔가……, 잘못 보신 듯합니다. 제 잔도 비어 있는데…….”
조원들의 모습을 보며 단유소가 눈매를 찡그린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러자 곽승추가 의지가 깃든 눈빛으로 대꾸했다.
“살다 보면 때때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는 거잖습니까, 조장님. 제겐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서백풍과 연소운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평마저도 공감한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설연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역시 제 생각해주시는 건 우리 공자님들밖에 없으시다니까. 결정했어요! 오늘 밤 공자님들의 잔은 무조건 제가 다 채워드리겠어요!”
“우오오오!”
조원들이 불타올랐다.
이윽고 한설연이 서열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잔을 채워줬다. 조원들의 잔이 채워지자 옆에 있던 서백풍이 한설연에게서 술병을 건네받더니 그녀의 잔을 채웠다.
한설연이 먼저 잔을 들었다.
“저는 이제 시작이니까, 다 함께 건배해요. 공자님들과는 일전에 잠시 술 마실 기회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마음 편히 마셔보는 건 처음이잖아요. 오늘 어디 한번 코가 삐뚤어져라 마셔봐요.”
“오오오오옷!”
모두들 잔을 들어 올렸을 때 진평이 말했다.
“그럼 이번 건배사는 한 소저께서 하시죠.”
“음……. 좋아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한설연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겐 너무도 고맙고 소중한, 우리 공자님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여섯 개의 술잔이 한곳에서 부딪쳤다.
모두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고, 한설연이 서열대로 또다시 술잔을 채워주었다.
이번에는 단유소가 그녀에게서 술병을 넘겨받더니 그녀의 잔을 채워줬다. 그러면서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아! 뭐였죠?”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그러자 한설연이 허리를 펴며 턱을 들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교월이에요. 한번 알아내고자 마음먹으면 못 알아낼 게 있겠어요? 이 지성과 이 미모로?”
단유소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봐 한 소저,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런 소리 하면 미움 사.”
그 말이 끝나자마자 조원들이 단유소를 향해 일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장님? 미움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한 소저께서는 옳은 말씀을 하신 것뿐인데 왜 미워합니까?”
각각 곽승추, 연소운, 서백풍의 말이었다. 진평은 말없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댔다.
단유소가 조원들을 째려보았지만, 조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유소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들 논다. 이놈들이 이런 땐 아주 죽이 척척 맞지. 내, 잘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