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28화 (128/200)

128화. 휴가 (1)

그 후 한설연이 단유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표정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할 때에 그가 늘 짓는 표정.

“역시, 스승이시라서 그런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군요. 십분 공감합니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해서 내내 답답했는데, 이제야 가슴이 좀 트이는 느낌입니다.”

“내 죄일세. 다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네.”

“소생은 이 강호에서 곡주님의 역량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면 어느 쪽에 문제가 있었는지 답이 딱 나오지요.”

“그런데 지금 보니 설연이 저 아이가 비로소 철이 들고 어른이 된 것 같군. 딱 봐도 알겠어. 이게 다 단 공자가 고생해준 덕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 과정을 모두 말씀드리자면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겁니다.”

“푸허허허허!”

“하하핫.”

농담임을 알고 서로가 웃었다. 한설연이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즈음, 밖에서 두 개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이 이윽고 닫혀 있는 단목수헌의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흠흠.”

방문 밖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면서 저희들을 조용히 대기하게 하시더니, 곡주님께서는 설마 저희들의 존재 자체를 잊으신 건 아니신지요?”

그 목소리가 들리자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그녀가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단유소의 표정 또한 한설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설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벌컥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 두 사람이 미소를 지은 채로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공녀님.”

그 말에 한설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구, 구, 구 대주님……!”

그랬다. 그는 구홍립이었다.

구홍립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은월조의 조장인 석문이었다. 그도 한설연을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목례했다.

“다행입니다. 소공녀님이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구홍립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설연이 구홍립에게 와락 안겼다.

“구 대주님,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흐으윽……. 혹시라도 잘못되셨으면 어쩌나 하고. 흐어어엉…….”

“그러셨군요.”

한설연의 등을 토닥이던 구홍립이 잠시 후 그녀의 어깨를 잡고 품에서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러더니 한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구하게도 저는 소공녀님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고개를 드니,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단유소가 서 있었다.

단유소가 미소 띤 표정으로 짧게 목례할 때 구홍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친구라면 반드시 해낼 줄 알았거든요.”

마침 식사 시간이었기에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구홍립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의 전투가 있은 후, 현월곡 측에서 살아남은 인원은 네 명이라 했다. 구홍립과 석문 그리고 은월조원들 중에서 두 명이었다.

구홍립 일행은 적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고 했다. 게다가 멀리 돌아오는 경로를 택하여 이렇듯 늦어졌던 것이다. 그들이 사천지부에 도착한 것도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단다.

식사를 마치고 또 한 잔의 차를 마신 후에야 단유소는 현월곡주의 거처를 나섰다.

현월곡의 인물들은 단유소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배웅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한설연만이 끝까지 남아서 단유소가 사라져버린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단 공자님…….’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도 보고 싶었던 사부, 사자와 만났다. 다시는 못 볼 줄만 알았던 구홍립과도 재회했다. 꿈에서도 그리던 현월곡의 가족들과 다시 만난 것이다.

힘겨웠던 시간이 끝나고 예전의 평화로웠던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그래서 분명히 반갑고 기쁜데,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왜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왜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도 빤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로서 단유소의 임무는 끝났다.

임무가 끝나면 그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묵룡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자신이 알던 묵룡은 이제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이대로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물론 그와의 이별에 대한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이대로는 아니야!’

그 생각을 한 순간, 한설연이 홱 돌아섰다.

곧 그녀가 나는 듯이 신법을 펼치더니 단목수헌의 방 안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막, 탁자 위의 책을 펼치고 있던 단목수헌이 놀란 표정으로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그, 그래 무슨 일이냐?”

“저, 방금 전에 사부님의 품으로 돌아왔고, 그렇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불경이라는 점,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단목수헌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설연아, 갑자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진정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해보거라.”

“그간 너무도 고마웠던 사람이 있어요. 저를 지키기 위해 눈물겹게 싸워준 사람이 있어요. 그 은혜,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사람이 있어요.”

단목수헌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이제야 자신의 제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제자가 말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그런데 저는 그 사람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이대로 그 사람을 보내버리면, 저는 영영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은 이제 곧 제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될 거라서……, 그래서…….”

한설연의 눈동자도, 목소리도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단목수헌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윽고 단목수헌이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거라.”

그 말에 제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마도 스스로 예상했던 대답과 많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나도 내 제자가 은혜를 뼈에 새기고 항상 감사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은혜를 입으면 최선을 다해 그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그러니 가서 그 사람에게 너의 그 고마움, 제대로 표현하거라. 나중에 가서 그때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사, 사부님…….”

“괜찮으니 어서 가보래두.”

한설연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돌아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설연아.”

단목수헌이 조용히 한설연을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거라. 그리고 잊지 말아라. 네가 무얼 하든, 사부는 항상 네 편이다.”

일렁이는 눈빛으로 잠시 단목수헌의 시선을 응시하던 그녀가 촉촉해진 눈망울로 또다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신법을 펼치며 사라져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단목수헌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허. 녀석, 솔직하지 못하긴. 누가 봐도 그건 네가 그를 연모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냐.’

오늘, 오랜만에 만난 제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강호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마냥 귀엽기만 한 철부지였는데 이제는 눈빛도 바뀌고 분위기도 확 바뀌었다.

‘허헛. 전에는 그렇게나 사내들을 한심하다 여기더니.’

이제는 좋아하는 사내도 생기고.

‘마냥 귀여운 철부지일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모르겠다. 제자의 사랑이 행복으로 귀결될지 아픔으로 귀결될지는.

물론 행복으로 귀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신룡대의 묵룡이라는 단유소의 직책을 생각할 때, 현실적으로 제자의 사랑은 아픔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크다.

묵룡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설연아.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애초에 이뤄질 수 있는 조금의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법이란다. 그 옛날의, 이 못난 사부가 그랬었거든.’

이뤄지기 힘들다 생각하여, 그 아픔이 두려워서, 지레 포기했던 젊은 날의 사랑. 겁쟁이였던 자신.

잠시 먼 옛날의 일을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단목수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그가 마음에 든단다.”

* * *

한설연은 열심히 경공을 펼치며 무림맹 사천지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비마대원들의 숙소가 어디인가요?”

대답을 듣고 비마대원들이 머무는 숙소로 가보니 단유소와 묵룡조원들은 그곳에 없었다.

“오늘 오후쯤에 다섯 명의 비마대원들이 새로 왔을 거예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시나요?”

“으응? 새로 온 비마대원이라니? 그런 일은 없었소.”

대꾸하는 비마대원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른 대원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매한가지였다.

아마도 묵룡조원들은 비마대원으로서의 신분을 사천지부에 들어오는 용도로만 사용했었던 모양이었다. 들어온 후에는 따로 관리되는 모양이고.

혹시 단유소를 제외한 묵룡조원들이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식당으로 향했지만, 그곳에도 그들은 없었다.

오가는 무인들에게 수소문을 해봐도, 지부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위사들에게 수소문을 해봐도 다들 모른다고 했다.

곳곳에 있는 연무장들을 뒤지고 다녀도 없었고 정원을 뒤져봐도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한설연이 정원의 공터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단유소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 시간을 그리 오래 끈 것도 아니었는데.

흥! 사람이 매정하게 그새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지기예요? 마치 작정이라도 했다는 듯이?

“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공동파에 도착해서 당신의 신변이 안전해지면 내 임무도 끝. 그 이후로는 당신과 내가 만날 일이 더 이상 없을 거야.”

그가 신룡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가 해줬던 말이었다.

이곳이 비록 공동파는 아니지만, 그의 임무가 끝난 건 맞다. 그리고 그는 본인의 입으로 얘기했듯, 임무가 끝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아는데, 알겠는데, 조금 천천히 사라져줘도……, 되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한설연의 눈동자에 결국 결심의 빛이 섰다.

이렇게 된 이상 문상 제갈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찾지 못했으니까.

무릎 꿇고 빌든, 떼를 쓰든, 애교를 부리든, 사부님을 통해 간곡히 사정을 얘기하든, 어떻게든 알아낼 것이다.

채 호흡을 다 고르지도 못한 채로 한설연이 또다시 빠르게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문상 제갈윤은 집무실에 없었다. 맹주의 집무실에도, 제갈윤의 집무실에도 그는 없었다.

“문상 어른께서는 아까 퇴청하셨습니다.”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위사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제갈윤의 숙소로 향했다.

“문상 어른께서는 근처에서 저녁 약속이 있으시다 하여 출타하셨습니다.”

제갈윤의 숙소 앞을 지키고 있던 위사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맹주의 숙소로 달렸다.

아까 제갈윤이 말하길 백리우는 자리를 비웠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맹주님께서는 낮에 출타하신 이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아아……! 어찌하여 하필 이런 때에 다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음에도 한설연은 또다시 달렸다.

이렇게 된 이상, 사부에게 허락을 구하고서라도 지부 근처의 저자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의 사부라면, 은월조를 대동하게 해서라도 허락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