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임무 종료 (3)
“맹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내가 대신, 잠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네.”
그러자 단유소가 제갈윤 앞에 똑바로 서서 말했다.
“전원 차렷. 문상 각하께 경례!”
“충!”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조원들의 예를 거두게 한 후에 빠르게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묵룡조장 단유소 외 조원 사 인(四人), 임무를 완수하고…….”
그러자 제갈윤이 보고 중인 단유소를 향해 손을 내저어 보이며 말했다.
“보고는 되었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까.”
제갈윤이 곧바로 한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소저께서는 잠시만 기다려주시게. 일단 이들과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하니.”
“예, 문상 어른.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대화 나누세요.”
고개를 끄덕인 제갈윤이 곧바로 탁자 위의 서류들을 뒤적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자네들은 모두 근래에 맹주님을 뵈었으니 별 아쉬움은 없을 것이고. 어쨌거나 부상자는 단 조장과 연소운 대원이랬지? 단 조장은 완전히 회복했다고 듣긴 했네만, 다른 후유증은 없는가?”
“예, 문상 어른.”
“연 대원은 크게 베였다던데, 다 나았나?”
“예!”
단유소와 연소운이 각각 대꾸하자 제갈윤이 여전히 서류들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듣자하니 묵룡조에 경사가 있었다지?”
사무적으로 보이지만 신룡대원들을 대할 때의 제갈윤은 항상 저런 식이었다.
예를 취할 때에도 그는 대부분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보고를 하는 중에도 본인의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일하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업무가 많은 탓이었다. 그리고 신룡대원들은 그런 제갈윤의 모습에 매우 익숙했다.
“서백풍 대원과 연소운 대원의 경지가 크게 상승했다던데, 모두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서백풍과 연소운이 동시에 대꾸하자 제갈윤이 다시 말했다.
“진 부조장과 곽 대원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군. 묵룡조는 참 신기해. 단 조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원들마저도 하나같이 괴물들이 되어가니.”
“과찬이십니다.”
“이유가 뭘까? 유독 묵룡조원들의 실력만 쑥쑥 늘어가는 이유가. 단 조장이 묵룡조를 맡은 이후에 벌어진 현상이니 역시…….”
말을 줄인 제갈윤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단유소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단 조장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거겠지?”
“본인들이 열심히 한 결과입니다.”
그러자 제갈윤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이면 내 아들 놈도 신룡대로 입대시켜서 묵룡조로 보내야 할까 봐.”
농담임을 알고 단유소가 대꾸했다.
“얼마든지 보내십시오. 다만 묵룡조원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조원 고르는 눈이 좀 까다로워서 말입니다.”
“문상이랍시고 딱히 특혜도 없어서 그런 식으로라도 개인적인 이로움 좀 챙겨볼까 했더니, 그조차도 허락을 안 하는군.”
조원들이 모두 웃었다.
제갈윤이 서류들에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자네들이 이번에도 큰일을 했어. 단 조장의 단독 임무도 그렇고, 조원들끼리의 임무도 그렇고, 모여서 함께한 임무도 그렇고. 모두 수고 많았네.”
조원들이 미소를 지을 때 제갈윤이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그럼 나가들 보게. 단 조장과 한 소저는 잠시 남고.”
“예!”
진평을 비롯한 조원들이 집무실을 나섰다.
“이따가 나가면 조원들에게 전하게. 모레까지 휴가이니 푹 쉬라고.”
그 말에 단유소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힘든 임무가 끝나고 나면 휴가를 주거나 휴가나 다름없는 임무를 부여하긴 한다. 하지만 그건 맹에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였다.
지금은 혈천맹이 어제 어디에서 어떤 위험한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때에는 아무리 임무를 완수한 직후라도 휴가를 주지 않는 게 정상이다.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짧게나마 제대로 된 휴가라니.
의아해하는 단유소를 향해 제갈윤이 말했다.
“나도 이유는 모르네. 맹주님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것뿐일세.”
“예, 알겠습니다.”
쿵쿵! 쿵! 쿵쿵! 쿵!
계속해서 열심히 서류에 도장을 찍어대던 제갈윤이 그제야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한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쁘게 처리하고 결재해야 할 서류들이 있어서 인사가 늦어졌네. 미안하네.”
제갈세가와 현월곡.
강호에서 두뇌를 자처하는 그 두 세력은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관계임과 동시에 교류 관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제갈윤과 한설연도 이미 서로를 여러 차례 봤던 사이이기도 했다.
“미안하다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얼굴이 반쪽이 됐구먼.”
“제가 했던 고생은 단 조장님이 하신 고생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그리고…….”
말을 줄인 한설연이 제갈윤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왜 그러는가?”
그러자 한설연이 숙였던 허리를 펴며 말했다.
“무림맹에서 단 조장님과 같은 최고의 실력자를 보내주신 덕에 제가 이렇듯 무사할 수 있었음을 압니다. 감사합니다.”
제갈윤이 빙그레 웃었다.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한설연의 분위기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뭐랄까, 많이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직접 지켜봤을 테니 더 잘 알겠지. 한 소저의 말마따나 단 조장은 본 맹 최고의 요원일세. 그러나 아무리 단 조장이라도 한 소저가 보조를 잘 맞춰주지 않았다면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웠을 것이네. 고생 많았네.”
그러자 옆에서 듣던 단유소가 대꾸했다.
“문상 어른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옆에서 보니 한 소저가 왜 이 강호에서 교월이라 불리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습니다.”
민망한 듯 미소를 보였지만, 한설연은 내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단유소의 칭찬은 언제나 기분 좋기도 하거니와, 문상 제갈윤 앞에서 이렇게 면을 확실히 세워주니 더 기분이 좋고 고마웠다. 그의 배려가.
“이 강호에서 두 사람만큼 혈천맹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없지. 그렇기에 두 사람의 경험담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네. 마음 같아서는 얼른 가서 쉬게 하고 싶지만, 일단 그간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정리를 해둬야 할 필요가 있네.”
“당연합니다.”
“어차피 지금은 늦은 오후니, 저녁 전에 끝내지.”
제갈윤이 궁금한 점을 물으며 필요한 내용들을 꼼꼼히 기록하는 가운데, 단유소와 한설연의 이야기는 한 시진 가까이 계속되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제갈윤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이야기 전해주느라 고생 많았네. 큰 도움이 되었네. 참고로 자네도 휴가일세. 자네는 글피까지네.”
“예? 저는 왜 하루가 더 많습니까?”
“나도 모르네. 맹주님 지시 사항일세.”
“……알겠습니다. 감사하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아, 참! 그리고…….”
운을 뗀 제갈윤이 탁자의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단유소에게 내밀었다.
“맹주님께서 전하라 하셨네. 금일봉이라 하시더군. 조원들끼리 회식이라도 한번 하라는 뜻이시겠지.”
단유소의 눈동자가 또다시 커졌다.
금일봉이라니.
신룡대에 들어온 후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임무에 따라 특별 수당이 나오긴 하나, 그건 월봉과 함께 정산된다. 따로 이렇듯 금일봉을 챙겨주는 경우는 없었다.
뜬금없는 휴가부터 회식비까지.
맹주의 특별 배려임을 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제갈윤이 한설연에게 말했다.
“눈이 빠져라 한 소저를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있네. 집무실을 나서면 무인들이 안내할 걸세.”
“이곳에서 누가 저를…….”
“곡주님과 송 소저가 이곳에 계시네.”
“헙! 사부님과 사자가……!”
한설연이 깜짝 놀랄 때 제갈윤이 말했다.
“단 조장도 함께 가보게. 곡주님이 단 조장을 꼭 보고 싶어라 하시더군.”
“알겠습니다, 문상 어른.”
집무실을 나서니 문상부의 무인이 단유소와 한설연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사천지부 안에서도 한적한 곳에 지어진 별채였다.
두 사람이 무인의 안내를 받아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별채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노인으로, 현월곡주 단목수헌이었다.
“서, 설연아……!”
“사부님……!”
단목수헌이 버선발로 달려왔고, 그런 그를 향해 한설연도 빠르게 달려갔다. 이윽고 두 사람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설연아! 아이고, 설연아!”
“사부님, 사부님……. 흑흑…….”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내, 너를 내보내는 게 아니었다. 내보내는 게 아니었어…….”
단목수헌은 울먹였고 한설연은 흐느꼈다.
그 즈음, 이미 단목수헌의 뒤쪽에 다가온 한 여인이 한설연을 향해 외쳤다. 한설연의 사자(師姉, 사문의 언니)인 송채령이었다.
“사매!”
그러자 한설연이 단목수헌의 품에서 살짝 떨어지며 외쳤다.
“사자!”
두 여인도 서로를 얼싸안았다. 송채령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우리 예쁜 사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흐으윽…….”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단목수헌이 말했다.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손님도 오셨으니 어서 안으로 들자꾸나.”
그러자 한설연이 송채령의 품에서 떨어지며 눈물을 훔치더니 단유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개해드릴게요. 이분은…….”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귀한 분이니 일단 안으로 모시자꾸나.”
단유소가 포권하며 인사를 건네려 하자 단목수헌이 말했다.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인사는 들어가서 하십시다. 날이 춥소.”
단유소와 한설연이 단목수헌을 따라 방으로 들어섰고 송채령은 차를 내오겠다며 부엌으로 향했다.
한설연이 단유소를 소개한 후로, 자리에 앉고 나서도 단목수헌은 한참이나 말없이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단유소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단목수헌이 갑자기 앉은 상태에서 단유소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고맙소, 단 공자. 정말 고맙소.”
“이 무슨……! 어, 어서 자세를 푸십시오, 곡주님!”
단유소가 당황해서 그렇게 말하자 단목수헌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단유소가 말했다.
“한참 후배인 제게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어느 사부나 마찬가지겠지만, 내게도 내 제자들은 모두가 아들이고 딸이라오. 그리고 단 공자는 내 딸을 구해준 은인이시오. 어찌 이 정도를 과하다 하겠소.”
“저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고마움은 맹주님께 표하시면 되니 제게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말씀도 편하게 하십시오. 부담스럽습니다.”
단목수헌이 노안에 미소를 지었다.
그 상태로 잠시 단유소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았네, 단 공자. 어쨌거나 이렇게 보게 되어 너무 반갑네. 신룡대의 규칙을 내 모르는 바 아니네만, 그럼에도 공자를 꼭 만나보고 싶었네. 이 일로 내가 맹주님에게 얼마나 사정했는지 모를 걸세.”
단유소가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그 즈음 송채령이 차를 내왔다.
단목수헌이 단유소에게 차를 권한 후, 본인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설연이가 사실…….”
운을 뗀 단목수헌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두가 궁금해할 때 단목수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헛똑똑이일세. 외부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제 잘난 맛에 살던 아이라서, 자존심만 세고 개념은 한참 부족하다네. 경험은 경험대로 일천하여 민폐가 컸을 게야. 저런 아이를 지켜주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푸흡!”
송채령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지 못할 때, 한설연이 난처함 가득한 표정으로 낮게 외쳤다.
“사,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