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임무 종료 (2)
“그, 그러니까 그……, 상황이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았거든.”
백리우가 난감함 가득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곳은 무림맹 사천지부에 마련된 제갈윤의 처소.
제갈윤은 백리우가 찾아온 후로 차를 한 잔 내어줬을 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백리우가 열심히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지만, 제갈윤은 찻잔을 들고 창밖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한 차례씩 차만 홀짝거릴 뿐이었다.
“그, 그리고 청성이 그 지경이 됐잖아. 목 장문이 많이 침울해 있더라고. 내가 명색이 맹주인데 최대한 신경 써주는 척은 해야 할 거 아냐. 백도 전체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 게다가 투신 그 양반한테 붙잡혀서 얘기도 좀 나눠야 했고, 또…….”
백리우가 제갈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열심히 변명을 해댈 때였다. 백리우의 말을 끊으며 제갈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응? 어! 말해.”
“차 드십시오. 그 좋은 차, 다 식겠습니다.”
“어? 어! 마, 마셔야지! 잘 마실게!”
백리우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차를 한 입에 부어 넣었다.
“아! 앗 뜨뜨……!”
입천장을 덴 백리우가 인상을 찡그릴 때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이 무림맹주신데, 당연히 그들에게 신경 써주는 모습을 보여야지요. 잘하셨습니다.”
백리우가 입천장을 덴 아픔도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윤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저러다가도 또 어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갑자기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제갈윤이었다.
백리우가 눈치를 보며 침묵할 때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청성의 일도 잘 처리된 데다가 그간 별다른 일도 없었으니 여러모로 잘된 일이지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님.”
그러자 가만히 제갈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리우가 물었다.
“너……, 왜 그래? 무섭게.”
“예?”
“니 분위기, 지금 무섭거든? 잔뜩 싸늘한 분위기 조성했다가 갑자기 따뜻하게 대하니까 더…….”
지금껏 뒷모습만 보이고 있던 제갈윤이 그제야 신형을 돌리며 말했다.
“에이.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그냥 조용히 차 맛을 음미하고 있었을 뿐인데 싸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니요.”
능청스러움이 담긴 어조.
이에 백리우가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 그럼 내가 계속 말하는데도 왜 조용히 있었는데?”
“아, 송구합니다. 표 호위에게서 전음으로 보고를 받는 중이었거든요. 뭐 형님이나 표 호위나 다 한통속인 건 잘 알지만, 그래도 표 호위 쪽이 그나마 저한테는 가감 없이 얘기를 전하는 편이라서요. 그에게 물을 것도 좀 있었고요.”
“한통속은 니들 둘이 한통속이지. 니들 둘이 편먹는 거, 이제는 포기해서 그러려니 한다. 야,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 맹주인 내가 사정을 설명하는 중인데 그건 듣지도 않고…….”
“안 드셨다지요? 대환단. 제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 말에 백리우가 흠칫했다.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묵룡한테 먹이셨다고요?”
“그, 그러니까 그게…….”
“아! 뭐, 상황에 대해서는 대강 들었습니다. 솔직히 대환단을 드리면서 제가 신신당부하긴 했지만, 그걸 형님이 드실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청성의 상황이 그쯤 되었으면 형님의 입장에서 꼭 살려야 할 사람이 한두 사람쯤은 반드시 있겠다 싶었지요.”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 당사자가 묵룡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지만, 묵룡이라면 형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뒤도 안 보고 사용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이해합니다. 형님과 묵룡의 관계를 젖혀두더라도, 맹의 입장에서도 그 친구는 꼭 필요한 존재니까요.”
백리우가 미소를 보였다.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느낌의 미소였다.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백리우가 진지한 눈빛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얘기했었지. 할아버지가 그 아이에게 위험성이 있는 무공을 전수했다고.”
“예.”
“녀석이 쓰러졌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진원진기를 손상시키는 무공이더구나.”
그 말에 제갈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건 위험성이 있는 무공이 아니라 실제로 위험한 무공이잖습니까……! 천무검신께서 대체 왜……!”
“나도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화가 치밀어 오르더구나. 할아버지가 대체 왜 그러신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무공은 근래까지만 해도 마공이라 불렸던 무공 아니냐. 설령 제자였어도 익히게 해서는 안 될 무공을, 그것도 손자한테 익히게 하시다니.”
공감한다는 듯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녀석이 그때 쓰러진 건, 그 무공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백 개도 넘는 벽력탄을 혼자서 막아낸 거야. 그 무공의 힘으로. 본인의 진원진기를 손상시켜가며.”
“저도 전서로 보고를 받았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묵룡은 제가 파악하고 있던 것에 비해 몇 배 이상의 능력을 감추고 있었던 셈이니,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릅니다. 한데 거기에 그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윤이 말을 이었다.
“묵룡이 쓰러진 후, 형님의 그의 방에서 네 시진 동안이나 머물렀던 것도 그럼…….”
“그래. 엉망진창이더구나. 진원진기도 손상되었고 기혈들도 제멋대로였다. 서둘러 대환단을 먹이고 그의 상태를 치료하느라 그랬다.”
제갈윤이 눈매를 찡그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백리우가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녀석을 치료하다 보니 녀석이 익힌 심법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대단하다는 걸 알겠더라.”
제갈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때 그는 정신을 잃은 상태이지 않았습니까. 그 상태에서는 그가 익힌 심법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도가 고작일 텐데요?”
“그렇지. 그런데 내가 놀란 건 실제로 드러난 부분 때문이었다. 바로 자연 치유력이었지. 치료하는 네 시진 동안, 알아서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녀석의 몸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제갈윤의 눈동자가 커져 갈 때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지가 멀쩡하고 내장이 심각할 정도로 손상되지 않는 한, 숨만 끊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상태에서건 회복될 수 있겠더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이야. 진원진기까지도……, 말이다.”
그 말에 제갈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 놀라웠다. 그 정도면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심법이었다. 그런 엄청난 내공심법이 존재한다니.
“역시 천무검신은 천무검신이시군요. 결국 그 심법을 전수한 분도 천무검신이실 테니.”
“그래.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더라. 아마 그 심법으로 녀석의 위험한 무공을 보완하려 하셨겠지. 그러나 아무리 보완을 한다 해도 너무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야. 그래서 아직도 할아버지에 대한 억하심정이 풀리지 않은 거고.”
제갈윤이 백리우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녀석……, 제 사부에 대한 신의 하나는 대단하더구나. 그 무공을 가르친 스승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오히려 녀석한테 혼났다.”
“그래도 천무검신이신데, 게다가 제자를 넘어서서 손자를 키우신 건데, 어디 허투루 키우셨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제갈윤도 빙그레 웃었다.
잠시 후에 백리우가 말했다.
“혈천맹이라 했던가. 그들은 결국 노렸던 교월을 손에 넣는 데 실패했지. 놈들이 왜 그렇게 교월을 노리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후에도 우리는 그녀를 특별히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
“그래야겠지요. 조치하겠습니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향해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조만간 크게 한번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듭니다. 원하는 걸 여전히 손에 넣지 못했으니 시간을 질질 끌려고 하지 않겠지요. 그 전에, 어떤 식으로든 정파의 결속력을 흐트러뜨리는 작업을 할 겁니다.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의한다는 듯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 문파에 비상 대비령을 내리고 각 지역 내에서의 상호 공조 체제를 강화하게 해. 또한 앞으로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무림맹 장로 회의를 조만간 개최한다고 공문 띄워.”
“알겠습니다.”
“사천은 이번 일로 인해서 이미 공조 체제가 갖춰져 있다. 그러니 무림맹의 전진 본부도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형님도 서안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말에 백리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전선은 감숙이지만 공동파가 그렇게 되었으니 지금은 섬서가 지리적으로 가장 적절하겠지. 중원의 북부와 서부 어느 쪽이든 늦지 않게 대처할 수 있는 곳이니.”
“화산과 종남이 가까우니 여러 모로 공조하기에도 좋지요. 특히 화산은 예로부터 맹에 매우 협조적이었으니까요.”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섬서지부로 본부를 옮기고 나면 대문파나 세가들에서 정예 전력을 따로 차출할 거야. 기동성 있게 움직일 정예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공동파가 허무하게 당한 데다가 청성까지 저렇게 되었으니 다들 협조할 마음이야 갖고 있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정예들을 보내주려 하겠습니까?”
무림맹이 연합체인 만큼 늘 이런 종류의 문제들이 존재한다. 특히 전통의 명문들은 상호 경쟁 관계에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자문파의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참여를 한다 해도 눈치를 보다가 마지막 즈음에 적당한 정도만 협조하는 식이다.
백리우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눈치나 살피며 자파 이기주의 부리면 맹주직 때려치운다고 해야지. 각자도생들 하라고.”
그 말에 제갈윤이 소리 없이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백리우가 자의적으로 맹주직을 그만둘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혈천맹에 관한 일이 마무리되지 않는 한은.
제갈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혼자만 때려치우기 없깁니다.”
* * *
무림맹 사천지부가 있는 대죽현은 사천 동부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단유소 일행이 청성산에서 성도를 거쳐 사천지부에 도착하기까지는 나흘 남짓이 걸렸다. 그 정도가 세인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일행 모두가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무래도 일행의 이동 경로가 확실한 백도의 영역이기 때문인지, 그간에 적습은 없었다.
단유소 일행이 대죽현에 도착하자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맹에서 미리 준비해둔 마차였다. 한설연이 동행해야 하기에 보안을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늦어가는 오후.
묵룡조는 비마대원의 명패를 보이고 드디어 사천지부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자 두 명의 무인들이 다가와 일행들을 맹주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집무실의 문 앞에 다다르자 일행을 안내한 무인이 말했다.
“소저께서도 함께 들어오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모두 함께 집무실에 들어서니, 한 사람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서 묵룡조와 한설연을 반긴 사람은 의외로 맹주가 아닌 문상 제갈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