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임무 종료 (1)
알고 있다.
맹주는 부하로서의 자신, 즉 묵룡의 능력과 수완을 매우 높게 사고 있다.
그 비싼 대환단을 먹이고 직접 약기운을 녹여주며 기연 아닌 기연을 만들어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는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너무 과분하다 생각되긴 하지만, 자신이 맹주의 입장이었어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런데 한설연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그녀의 말이 맞다고 봐야 했다. 평소 눈썰미도 좋고 관찰력도 좋은 그녀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했다고?
본인의 아들이라도 저렇게까지 할까 싶을 정도로?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맹주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방금 전에 맹주와 독대하던 시간에도 이상한 부분들은 많았다.
대환단보다 자신의 목숨이 백 배, 천 배는 값지다고 말할 때의 맹주는 분명히 이상했다. 뇌리에 각인이 될 정도로 진지했으니까. 진심처럼 느껴졌으니까.
수하인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고는 해도, 남의 스승에 대해 함부로 말한 것도 이상했다.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런 게 큰 실례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그 또한 결국, 자신에 대한 과분한 걱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갑자기 형이라 부르게 한 것도 그랬다. 자신이 알기로 신룡대의 다른 조장들 중에 그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룡대원들 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만 왜 그랬을까?
단지 자신이 신룡대 최고의 요원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입장을 바꾸어서 자신이 맹주였다면, 상대가 가장 실력이 좋은 수하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서로 편한 사이가 되었다면 모를까.
단유소가 내심으로 고개를 갸웃할 때 한설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요. 이번에 맹주님에게 여러모로 감동했어요. 부하를 그렇게 아끼시는 모습을 보니, 과연 인품마저도 백도의 지도자답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온 백도가 맹주님을 추앙하는 이유도 역시, 맹주님이 단지 천하제일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나란히,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한설연이 그렇게 말했다. 단유소가 말했다.
“당신을 구해주신 것도 감동이었을 테고.”
“물론 그렇죠. 너무 감사한 일이고요. 하지만 그런 종류의 감동은 단 공자님을 통해서 느낀 게 더 커요. 물론 단 공자님의 경우에는 감동을 넘어서 마음이 아플 정도였지만.”
단유소가 희미하게 웃었다.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단 공자님이 깨어나지 못했을 때 저도 맹주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다들 그렇겠지만 제게도 맹주님은 마냥 높고, 멀고, 어려운 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부담감도 컸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마음이 편해졌어요. 자상하시더라구요.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고.”
“당신은 무슨 얘기를 나눴는데?”
“그냥…….”
한설연은 이번에도 말을 얼버무렸다.
단유소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야? 오늘따라 당신답지 않게 왜 자꾸 말을 하다가 말아?”
“벼, 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냥 그간 겪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어요. 궁금해하시더라구요.”
“흠……. 오늘따라 당신 수상해. 나한테는 궁금한 거 있으면 끝까지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정작 본인은 감추고 말이야.”
“감추긴요. 진짜 별 얘기 없었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꼬치꼬치 캐물었던 거, 처음에만 그랬지 나중에는 안 그랬잖아요.”
“하긴. 그건 그랬지.”
단유소도 그 후로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한설연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맹주와 대화를 나눌 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던 건 맞다. 주로 자신이 이야기하고 맹주는 듣는 쪽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이야기하는 와중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인물은 단유소였다. 그동안 자신은 주로 보호만 받았을 뿐, 단유소가 모든 걸 다 했으니까.
정말이지 신나게 얘기했었다. 그의 활약, 그가 보였던 배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갖고 있는 고마움까지.
그렇게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 맹주는 눈동자를 빛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맹주가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소저는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군.”
맹주의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모른다.
당황한 이유는 맹주가 자신의 속내를 단번에,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 상황에서는 무던한 사람이라도 알아챘을 것이다. 하물며 맹주임에야.
‘임무 중에 있었던 일들을 제외하면 그 이야기가 다인데, 어떻게 그 말을 단 공자님에게 해…….’
* * *
미로 같은 통로를 빠져나와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들른 곳은 연소운의 방이었다.
“조, 조장님!”
단유소가 들어서는 걸 보고 연소운이 침상에서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단유소가 짧게 한마디 했다.
“그대로 안 누워 있으면 혼난다.”
“아……. 예, 조장님.”
연소운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단유소가 다가가자 연소운이 물었다.
“한데 조장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응. 보다시피. 가뿐하다.”
“아아,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조장님이 쓰러지는 모습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근래 두 번이나 보게 되어서…….”
단유소가 희미하게 웃었다.
백학을 상대하다가 쓰러진 적 한 번, 이번에 한 번. 연소운은 지금 그 두 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 몸이나 잘 추슬러. 많이 나아졌다고 듣긴 했다만.”
“예.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가만히 연소운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짐짓 훈계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 이 녀석, 그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학에게 맞섰던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던 거야?”
“그, 그, 그게…….”
연소운이 주눅 든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보던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는 초절정 무인이 되었으니 좀 더 당당해져도 될 텐데, 남의 눈치를 살피는 습성은 여전했다. 역시 연소운은 연소운이었다.
저런 모습이 연소운의 매력이기도 했다. 더 이상은 싸울 때 긴장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는 저런 성격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잘못됐으면 어쩔 뻔했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다고 이 녀석아. 그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지침 몰라?”
“아, 알고 있습니다.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표식을 남기며 추적이 가능한 만큼 추적합니다. 다만 추적을 하는 경우에도 조원들에서 너무 멀어지면 안 됩니다.”
“아는 녀석이 거학 같은 초고수한테 겁도 없이 덤벼들어?”
“그때는 오직……, 한 소저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 심정이야 당연히 이해하는데, 그래도 이 녀석아.”
단유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대응 지침, 꼭 지키겠습니다, 조장님.”
그 말에 단유소가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정말 잘했다. 그리고 벽을 깬 것, 진심으로 축하한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연소운의 표정이 더없이 환해졌다.
“이 모든 게 조장님 덕분입니다. 조장님이 아니셨으면 저는…….”
단유소가 기특하다는 듯 연소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연소운이 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푹 쉬면서 몸조리 잘해. 네가 빨리 나아야 우리도 복귀할 수 있으니까.”
“예, 조장님.”
단유소가 연소운의 방을 나서려 하자 한설연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연 공자님의 상처를 돌볼 시간이네요. 저는 남아서 치료해드리고 갈게요.”
고개를 끄덕인 단유소가 방을 벗어났다.
단유소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인 목종림과 투신 포원이었다.
“오오……! 단 조장! 깨어났다는 소식 듣고 왔네. 몸은 이제 괜찮은가?”
“헐헐. 뭐, 멀쩡해 보이는구먼.”
목종림과 포원이 단유소를 반기며 차례로 말했다. 단유소가 포권하며 대꾸했다.
“소생이 걱정을 끼쳤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두 분을 찾아뵈려던 참이었는데…….”
자리에 앉고 나자 목종림이 말했다.
“몸은 정말 괜찮은 건가? 그때 쓰러져서 정신을 잃어 걱정이 많았다네.”
“예, 지금은 멀쩡합니다.”
“맹주님께서 수고가 많으셨다네.”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찾아뵙고 오는 길입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목종림이 다시 말했다.
“맹주님께서 비밀리에 이리저리 손을 써주신 덕에 청성의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고 있네. 오늘 아침에는 아미파에서도 인력을 대거 지원해 와서 더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지. 문도들 또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모양새네.”
“잘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입니다.”
“사실, 문도들이 슬픔을 이기고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자네 때문일세.”
단유소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살짝 듣긴 했습니다.”
“문도들은 아직도 입만 열면 자네 이야기라네. 떨어지던 그 수많은 벽력탄들을 처리하던 그 모습, 모두가 똑똑히 보았으니까. 게다가 맹주님이 이곳에 계신 게 비밀인 탓에 거학을 제압한 사람도 자네로 되어 있고.”
“청성이 이렇게 된 게 제 탓이기도 하니 저는 송구스러운 마음만 가득한데…….”
단유소가 난처함 가득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너, 그때 그 무공, 뭐냐?”
포원이 불쑥 물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노부야말로 네 실력을 누구보다 높게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벽력탄을 한꺼번에…….”
흔들리는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포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저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원과 자신의 경지는 거의 비슷하다. 포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벽력탄이 떨어질 당시에 자신이 보였던 힘이 너무 압도적이었으니, 포원은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혼원태극공의 존재를 알 리 없으니까.
“제가 익힌 무공 중에 체내의 진기를 대거 소모하여 한순간에 큰 힘을 폭발시키는 무공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의 상황이 매우 위험하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포원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에게 혼원태극공의 존재를 밝힐 수는 없었다.
포원이 여전히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눈빛으로 단유소를 바라보는 가운데 목종림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단한 무공이군. 하면 이후에 단 공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건 그 후유증 같은 건가?”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게 이런 경우일까. 딱 필요할 때 목종림이 적절한 말을 해줬다.
“그렇습니다.”
덕분에 여전히 미심쩍어하던 포원의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포원이 말했다.
“장문 사질의 말마따나 대단한 무공이긴 하다만 위험 부담이 너무 크구나. 시전 후유증으로 인해 그렇듯 하루 이상 쓰러져야 할 정도라면.”
염려가 담긴 어조.
“예. 그래서 저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포 어르신께서 도착하셨다는 것을 느끼고는 주저하지 않고 시전했던 겁니다.”
결국 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목종림은 이번에 벌어졌던 전투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계획이라 했다. 그렇기에 세 사람의 이야기는 대부분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세세하게 정리하는 내용들이었다.
내용 정리가 끝나자 목종림이 물었다.
“맹주님이야 곧 복귀하셔야 하겠지만 자네들은 연 공자의 상세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야 떠나겠지?”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떠나기 전까지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장문 어른.”
“청성을 하루 빨리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남은 문도들이 강해져야 하네. 내가 염두에 둔 본문의 문도들이 좀 있는데, 믿을 만한 아이들일세. 자네들이 그 아이들을 좀 가르쳐주게.”
“예에? 저희들이 어찌…….”
그러자 목종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무공을 가르치라는 얘기가 아닐세. 싸우는 법을 좀 가르쳐주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게 바로 문도들의 실전 경험 부족이었네. 대련 같은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지. 그들 탓이 아니라 내 탓일세. 나 또한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으니.”
“음…….”
“어차피 청성은 주춧돌부터 새로 다져야 할 입장이네. 이왕 이렇게 된 바에 단단하게 다지고 싶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녀석들도 느낀 게 많을 걸세. 자네들이 그 일을 맡아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걸세.”
“하오나 실전을 훈련으로 가르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설픈 실전 훈련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게 바로 실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하려면 문도들이 많이 다치고 깨질 겁니다. 그 두려움이 없으면 실전 훈련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자 목종림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상관없네.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 중에서도 각오가 된 아이들만 보낼 테니까. 숫자는 많지 않을 걸세. 그러니 길지 않은 시간일망정 밀도 있게 단련시켜주게.”
목종림이 밀도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그렇게 말했다.
교관 역할이야 무림맹에서도 종종 수행했었다.
신룡대원으로서의 신분을 숨긴 채로 신입부터 일류나 절정 고수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이들을 훈련시켰었다. 그 또한 신룡대원의 임무 중 하나였다.
게다가 청성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으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목종림이 선발한 인원은 총 이십 명 남짓으로, 모두가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초반까지의 젊은 문도들이었다.
한설연이 연소운을 돌보는 가운데, 그들을 제외한 묵룡조원 전원이 교관으로 투입되었다. 포원이 전 과정을 참관했다.
단유소를 포함한 묵룡조원들은 가혹할 정도로 문도들을 몰아붙였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발된 문도들은 꾹 참으며 모든 훈련을 소화해냈다. 실로 대단한 각오였다. 얼마 전에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훈련 도중에 휴식 시간이 되면 포원이 문도들에게 다가가서 청성의 무공을 응용하여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그런 식의 훈련이 비밀리에, 일주일간 지속되었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는 연소운의 상처도 거의 회복되어, 묵룡조와 한설연은 다음 날 새벽에 청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
목종림과 포원만이 조용히 그들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