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맹주 독대 (4)
내내 경직되어 있었던 단유소의 표정이 드디어 편안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한 소저를 호위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무림맹 절강지부 측의 인원들이 있었습니다. 혹시 그들의 생사에 관해 보고를 받은 게 있으신지요. 또한 현월곡 측의 생존자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귀환자가 두 명 있었지.”
단유소의 눈동자가 커질 때 백리우가 말을 이었다.
“현월곡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두 사람 다 무림맹 절강지부 소속이었다.”
“누, 누굽니까?”
“일전에 사천지부에서 대면했기에 기억하고 있지. 절강지부 천망단 제이 타격대주 최익, 그리고 절강지부 비마대원 오필이라 했다.”
“아아아……!”
단유소가 격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지만 최익과 오필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당시에 그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적의 시선을 끌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 두 사람이 살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친한 사람들이었더냐?”
“예. 꼭 살아남길 바랐던 사람들입니다. 다친 덴……, 없었습니까?”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무사하다. 지금쯤이면 절강지부로 복귀 중일 게야.”
“하아…….”
단유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때 백리우가 말했다.
“이제 아우도 돌아가 봐야겠지? 목 장문인을 비롯한 청성의 문도들과 인사도 나눠야 할 테니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아, 한 소저에게서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렇게 형제 사이가 된 김에, 형으로서 당부 하나만 해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아까 그 위험한 무공, 사용 제한이 있다고 했었지. 그 제한……, 꼭 지켜.”
“대부분은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단유소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말했다.
“난 꼭 지키라는 말이었다.”
의외로 이번에는 단유소도 백리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묵묵히 백리우의 시선을 마주하던 단유소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꼭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형님에게도 있으시겠지요.”
백리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설령 내가 다치더라도, 어쩌면 내가 죽을 수 있어도,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 단유소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단유소를 바라보던 백리우가 결국 포기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우. 네 말이 맞구나.”
“형님께서 저를 걱정하셔서 하신 말씀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 명심하겠습니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그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알았으니 허리 펴. 그 귀한 허리 부러지겠다.”
백리우가 농담을 섞어 말하자 단유소가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럼 소제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단유소가 신형을 돌려 문 쪽으로 다가갔다.
단유소가 막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내가 볼 때…….”
뒤에서 들려온 백리우의 목소리에 단유소가 다시 돌아섰다.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녀는 아우를 마음에 둔 것 같더구나. 아우도 그 정도 눈치는 챘겠지?”
단유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지금 백리우가 말하는 그녀가 누군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단유소가 살짝 커진 눈으로 대꾸 없이 바라보기만 할 때, 백리우가 말을 이었다.
“동성 간에든 이성 간에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나를 소중하게 여겨준다는 것. 얼핏 쉬운 일 같지만, 살다 보면 그게 참 쉽지가 않거든. 아우도 그녀를 마음에 둔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우형(愚兄)이 아우의 속내까지 너무 넘겨짚었나?”
은근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백리우를 향해 단유소가 대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녀가 제게 호감을 가지는 문제는 호위 임무 중에 왕왕 발생하는 현상이긴 해서…….”
“그러니 현재 그녀가 품은 마음이 정상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백리우가 씩 웃더니 물었다.
“하면 아우의 마음은?”
“그,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번처럼 장기간 동안 호위 대상과 단둘이서만 지낸 경우는 저도 처음인지라…….”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그 또한 정상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예, 뭐…….”
묘하게 비틀어진 백리우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우. 그런 부분에서는 너무 스스로를 억제하고 조심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간의 상황이 어떠했든 간에 중요한 건 지금의 마음이야. 결국은 잡아야 할 사람을 못 잡은 것보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게 더 후회스러워지는 법이거든.”
잠시 백리우를 바라보던 단유소가 대꾸했다.
“예…….”
“그래. 알았으니 나가봐.”
“예, 그럼…….”
이윽고 단유소가 문을 열더니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백리우가 웃었다.
“푸흐흐! 푸흐하하하하하!”
백리우가 신나게 웃을 때였다.
“너무 재밌어라 하시는 것 아닙니까?”
방의 구석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음성이 들리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익이었다.
“자넨 안 웃겨? 그 녀석, 너무 숙맥이잖아.”
“푸흐흐. 조금 의외긴 했습니다.”
“딱 봐도 서로 좋아하는 사이던데 무슨, 상황이 어쩌고저쩌고 타령은. 푸하하!”
“……귀여우시더군요.”
동감이라는 듯 표익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백리우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 해도 그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강하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나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건가? 무공은 초절정 고수인데 연애 쪽은 삼류 무사 수준이라니. 푸흐!”
잠시 실소를 짓던 백리우가 물었다.
“형이라고 부르게 한 것 말이야. 조금 억지스럽기는 했지만 괜찮았지?”
“맹주님께서 도련님에게 형님 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어 하시는지 절절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미리 그렇게 하는 편이 어느 날의 그 녀석을 위해서라도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겠지요.”
표익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백리우가 말했다.
“그나저나 두 사람 잘되었으면 좋겠는데.”
단유소와 한설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단유소는 호위 임무가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인연이기도 한 것이다.
두 사람 다 능력도 출중하지만 외모도 출중하다.
한설연의 빼어난 용모야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피면구를 벗은 단유소의 실제 용모 또한 빼어나다.
평소 다른 얼굴로 살아가는 신룡대원들이라도 맹주전에 들어올 때는 예외 없이 인피면구를 벗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봐서 알고 있다.
단유소는 남성적인 미남은 아니나, 그 모친을 닮아 선이 고운 미남이다.
“녀석 그렇게 숙맥이어서 어디, 교월 같은 대어를 잡을 수나 있겠어?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맹주님께서 도련님을 아끼시는 그 심정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냥 지켜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긴. 성공하든 실패하든, 연애는 당사자들 사이의 문제여야 하겠지. 그러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니까.”
표익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잠시 후 표익이 말했다.
“이제 슬슬 복귀하셔야 합니다. 도련님이 깨어나기를 기다리신 탓에 복귀 시간이 너무 늦어졌습니다. 한 시진마다 날아오는 문상 어르신의 전서에서도 점점 적지 않은 노기(怒氣)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어허! 맹주가 시간이 필요해서 좀 늦어지기로서니, 어디서 감히 문상이 화를 내!”
백리우가 큰소리를 빵빵 쳤다.
표익은 희미하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잠시 침묵이 흘렀을 때, 백리우가 눈치를 살피듯 표익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유, 윤이 말이야. 화 많이……, 난 것 같아?”
“아직 폭발 직전까지 가지는 않은 듯합니다만, 여기에서 더 시간을 끌면 또 모르지요.”
“여, 역시 어서 출발하는 편이 낫겠지?”
“예, 아무래도.”
“거학이라는 그 덩치를 데리고 가면 녀석의 기분도 조금은 누그러지겠지?”
“그렇겠지요.”
“그래. 그럼 잠시 후 해 떨어질 무렵에 바로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표익이 고개를 숙이자 백리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아……. 난 정말 이 강호에서 윤이 그 녀석이 제일 무서워.”
단유소가 맹주의 처소를 벗어나니 한설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는 많이 나눴어요?”
“뭐야, 여태 기다리고 있었어?”
단유소가 되묻자 한설연이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돌아가는 길, 단 공자님은 모를 거 아니에요.”
“뭐, 마음 써준 건 고마워.”
그러자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길은 나도 외웠거든.”
그 말에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 정말요?”
“뭐야, 그 의외라는 반응은? 내가 똑똑하진 않아도 암기력은 괜찮거든? 못 믿겠으면 내가 앞장서?”
“그, 그래도 기관 작동시키는 법은 모르실…….”
“그것도 아까 당신이 하는 것 보고 외웠어.”
“드, 들어올 때의 기관 작동법과 나갈 때의 작동법이 다르다면요?”
그러자 단유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작동법이 다르기는 무슨. 어디서 사기를 치시려고?”
그러자 한설연의 눈동자가 또다시 커졌다.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애초에 위험에 대비해서 몸을 숨기려고 만든 은신처야. 무슨 대단한 보물을 숨겨놓은 곳이 아니라고. 어차피 미로를 뚫고 기관을 작동시켜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만이 다시 나갈 수 있는데, 뭣 하러 나가는 길까지 따로 복잡하게 만들어? 그럴 필요가 없잖아.”
한설연이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피이.”
“뭐야? 뭘 기대했던 거야?”
“피.”
한설연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미안해, 한 소저. 알다시피 내가 좀 재미없는 사람이잖아.”
“재미없어도…….”
뭔가를 말하려던 한설연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몇 걸음을 걸었는데도 말이 이어지지 않자 단유소가 물었다.
“왜 그래?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앞서서 걷는 한설연의 볼은 살짝 달아오른 상태였다.
‘재미없어도 상관없어요. 단 공자님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할 뻔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여전히 한설연이 두 걸음 정도 앞서고, 단유소가 뒤따르는 채였다.
걸음을 옮기던 중에 한설연이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씩 갸웃거리고 있었다.
한설연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물었다.
“왜 그래요?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응?”
단유소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사실 단유소는 맹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 백리우를 보니 왠지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백리우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도 잠시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다.
아까도 맹주가 누구와 닮은 건지 떠올릴 수 없었는데, 지금도 그랬다. 차분히 기억을 되짚어봐도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한설연이 단유소와 보조를 맞추어 나란히 걸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맹주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린 거예요?”
“아, 뭐, 응…….”
“무슨 얘기 나눴는데요? 비밀 아닌 건 말해줘도 되잖아요.”
“그냥 뭐, 특별한 건 없었어. 이번 임무 수행하느라 고생 많았다며 위로해주셨고, 우리 조원들 실력에 대해 칭찬해주셨고. 지금까지 여러 어려운 임무들을 잘 수행해줘서 고맙다고 하셨고, 임무 수행 중에 너무 무리하지 말라며 걱정도 해주셨고.”
사실, 한설연에게 밝힐 만한 이야기들이 별로 없었다.
맹주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도, 스승님과 무공 그리고 가족 등에 관한 이야기도, 임무를 포기하고 안전을 도모하지 않았던 이유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게 해서 이어진 그녀에 대한 이야기도.
“나는 거듭 감사하다고만 했지. 맹주님이 아니었으면 이번 임무, 결국 실패할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맹주님은 정신을 잃은 나를 치료까지 해주셨잖아.”
“잘하셨어요. 그때 단 공자님이 쓰러졌을 때, 사실 맹주님 모습 보고 많이 놀랐었거든요.”
“뭐가 놀라웠는데?”
“뭐랄까, 단순히 능력 있는 부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느낌을 넘어서, 정말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를 대하는 느낌이셨어요.”
“에이, 설마.”
“정말이에요. 맹주님은 쓰러지는 단 공자님을 붙든 이후로 침상에 눕히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그 누구에게도 단 공자님을 맡기지 않으시더라구요. 그 후에 긴 시간 동안 치료를 끝내는 순간까지도 그랬죠. 맹주님의 아들이 쓰러져도 저렇게까지 하실까 싶을 정도로.”
단유소의 양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