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23화 (123/200)

123화. 맹주 독대 (3)

말을 마친 백리우가 다시 돌아섰다.

단유소가 멍하니 백리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맹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기특할 것이다.

자신은 신룡대원으로서 모든 임무들을 성공시켰고, 그중에는 다른 조라면 절대 완수하지 못했을 임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맹주는 자신이 믿음직하고 대견스러울 것이다.

그렇기에 신뢰를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또한 이렇듯 독대하는 자리는 흔치 않으니, 뭐든 해줄 것처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환단 따위보다 자신의 목숨 값이 백 배, 천 배는 값지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본인이 표현했듯, 신룡대 최고의 요원에게 무슨 말인들 못 해주겠는가.

그러한 사항들을 빤히 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에 그 말을 할 때의 맹주에게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진심.

거기까지 생각하던 단유소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다.

착각일 것이다.

겉은 점잖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속은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백도의 정치판이며, 무림맹의 정치판이다.

정파는 지존이 군림하는 단일 세력이 아닌 수많은 세력들의 연합체인 탓에, 그 어떤 정치판보다 수 싸움이 많고 피곤한 곳이다.

그러한 정치 구도의 핵심부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바로 맹주다. 그렇기에 한순간의 표정 관리나 어조 관리만으로도 상대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또한 맹주이기도 하다.

너무 앞서갈 필요 없다.

맹주가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니,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정도에서 끝내는 게 옳다.

“자네, 가족은 있나?”

백리우가 뒤돌아선 상태에서 그렇게 물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을 여의었습니다.”

단유소의 대꾸에 백리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하던 백리우가 다시 물었다.

“모친 외의 다른 가족은?”

이번에도 이상했다.

왠지 백리우의 음성이 떨린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가정사가 약간 복잡하여 더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런가.”

백리우가 그렇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모친께서 작고하신 후에는……, 의탁할 곳은 있었는가?”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긴 했는데, 당시에 스승님께서 저를 거두어주셨습니다.”

“스승님이라……. 하긴 그렇게 위험한 무공을 혼자서 익혔을 리는 없지. 아무리 그래도 제자로 하여금 그런 무공을 익히게 하다니, 자네의 스승님 참 잔인한 분이시로군.”

단유소에게서 대꾸가 없자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례되는 말이었나?”

“스승님의 강요로 익힌 무공이 아니었습니다. 제 의지로 익혔습니다.”

“본격적으로 익히기 전에, 그런 무공의 위험성에 대해서 충분히 주지는 시켜주시던가? 진원진기가 손상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까지도?”

“예. 충분하고 남을 정도로 주지시켜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제게 재고를 권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익히겠다고 한 겁니다.”

단유소가 바로 말을 이었다.

“어린 시절에 저를 거두어주신 은혜를 제외하더라도 스승님은 그 자체로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스승님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씀하시는 건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사용 제한을 제대로 지켰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결국 제 탓입니다.”

“자네가 익힌 무공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말했군. 미안하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모친 이외의 다른 가족에 대해 물었을 때, 단유소가 다른 가족은 없다고 대꾸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가정사가 복잡하다는 식으로 돌려 말했다. 즉, 아버지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솔직히 단유소의 입장에서는 다른 가족이 없다고 말했어도 무방할 일이었다.

그의 스승, 즉 조부가 데리고 떠나버린 탓에 그 후로는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을 테니까. 게다가 이복형인 자신과 함께 했던 기억도 그 시절의 잠깐이 전부였으니까.

‘고맙구나.’

또 고마운 건 단유소가 본인의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맹주의 앞에서도 저렇게 당당하게 바른 말을 할 정도면 그 누구의 앞에서도 할아버지에 대한 저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고마운 한편으로 단유소가 더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투명한 창밖을 바라보던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원들을 아주 괴물들로 만들어놨더군. 나머지 조 전체의 전력을 다 합해도 묵룡조 하나의 전력보다 약하겠어.”

정확한 파악이었다. 맹주의 말마따나 지금의 묵룡조는 신룡대 내에서도 최정예 전력이라고 봐야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근래 신룡대에 결원들이 많이 생겼잖나. 이런 식이라면 자네 부하들을 다른 조의 조장 자리에 앉혀놔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물론 지금의 인원들이 다 함께 있을 때의 상승 효과라는 게 있을 테니 실제로 그러진 않을 생각이네만.”

“감사합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가? 어떻게 하나같이 저렇게 대단하게 성장을 한 게야?”

“그 친구들은 알아서 큰 겁니다. 기본적인 자질 자체가 원래 뛰어난 친구들이었습니다.”

“허허. 그 비결은 맹주인 나한테도 못 가르쳐주겠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허헛. 농일세.”

백리우의 말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잠시 침묵하다가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한 소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네. 자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더군. 어려운 임무 수행하느라 수고했네.”

“아, 아닙니다.”

“한 소저에 대한 호위 건 말인데, 처음부터 우리도 막연하게나마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예측하고 있었네. 그렇기에 자네에게 따로 부가 조항도 전달했었지.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되면 임무를 포기하고 자네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말일세.”

잠시 머뭇거리던 단유소가 대꾸했다.

“송구……,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다 잘되었지. 그러니 자네에게 잘못을 묻겠다는 게 아닐세. 단지 궁금할 뿐이네. 왜 그랬나? 딱 봐서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다 싶었으면 바로 몸을 뺐어야 했질 않나. 그렇게 하지 않아서 결국 그 수많은 고난을 겪은 게 아닌가. 평소의 자네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니 의아해서 묻는 걸세.”

단유소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그 상태로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백리우가 조용히 물었다.

“한설연 소저……, 그녀 때문인가?”

또다시 묵묵부답.

하지만 이번 침묵의 의미가 무언의 긍정임을 백리우가 모를 리 없었다.

단유소의 대답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더 지나서야 나왔다.

“처음에는 당연히 유사시의 행동 지침대로 할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그리고 임무를 포기하는 게 최선임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임무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녀가 천하제일미라서?”

“천하제일미로서의 한 소저는 당시의 제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그랬다. 처음부터 한설연을 지켜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오필이나 최익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설연을 지키고자 마음먹었던 건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서였다. 그녀를 꼭 지켜달라고 부탁했던 오필, 최익, 구홍립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녀와 둘만 남게 되면서, 자의로 그녀를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호오. 왠지 지금은 의미가 있다는 말로도 들리는군.”

단유소는 백리우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리우가 다시 말했다.

“응? 지나가는 말로 물은 것인데 답이 없다? 설마 자네……?”

백리우가 상체를 뒤로 돌렸을 때 단유소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단유소가 그 답지 않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런 단유소를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백리우가 다시 상체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허허. 부정은 안 한다? 의외로군. 임무 시에 주어진 임무 외의 다른 사안에 결코 한눈을 팔지 않기로 유명한 그 묵룡이.”

“송구합니다. 맹의 주인이시자 제 주군이신 맹주님과 처음으로 독대하는 자리에서 거짓을 고하기는 싫었습니다. 아무리 속내라 할지라도…….”

백리우가 빙그레 웃었다.

맹주와의 첫 독대라도 굳이 그런 것까지 솔직하지는 않아도 될 일인데.

어쩌면 단유소는 자신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속이는 게 더 우스워질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백리우가 말했다.

“난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예……?”

“다만, 다 좋은데 그 주군이라는 호칭은 싫군. 맹주라는 호칭도 식상하고. 그러니 이렇게 하지. 자네는 앞으로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게. 나도 자네를 아우라고 부르지.”

“예에에에에? 그, 그건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소생이 감히 어찌……!”

깜짝 놀란 단유소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리우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뭐라고 감히는 무슨. 뭐, 어떤가? 자네와 나의 나이 차이는 기껏해야 열아홉 살밖에 안 되는데. 참고로 나는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분과도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낸다네.”

“지, 지금 나이 차이 문제가 아님을……, 잘 아시잖습니까.”

“나이 차이가 문제가 안 되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내가 맹주고 자네가 내 수하라서? 그런 관계면 형님, 아우 사이가 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그, 그게…….”

“형, 아우 사이가 뭐, 별거 있는가? 서로 마음만 맞으면 트는 거지. 이래도 안 되면 이유는 하나지. 자네가 생각할 때 내게 형 자격이 없는 거겠지.”

단유소가 더욱 당황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신지라…….”

백리우가 단유소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형님이라고 불러보게. 안 하면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으로 알지.”

그러자 단유소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난처함 가득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씩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리우가 다시 말했다.

“거절인가?”

그러자 단유소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대꾸했다.

“아, 아닙니다. 혀, 혀, 형님…….”

그 말에 백리우가 환하게 웃었다.

“푸핫핫! 그래. 반갑구나, 아우.”

호탕하게 웃는 백리우를 단유소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미세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백리우가 아니었다.

“아우, 왜 그러는가?”

“아, 아닙니다.”

그 말에 백리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단유소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 뜻을 알아챈 단유소가 바로 말을 보탰다.

“혀, 형님…….”

그제야 백리우가 만족한 듯 빙그레 웃더니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오늘은 간만에 기분 좋은 날이구나. 이렇게 멋진 아우를 두게 된 날이니.”

“…….”

“이대로 술판이라도 벌이고 싶지만,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그건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예…….”

단유소를 대하는 백리우의 어투는 이미 친근한 아우를 대하는 듯했다. 물론 단유소는 여전히,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쪽은 단유소였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말에 백리우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그러자 단유소가 서둘러 뒷말을 붙였다.

“형님…….”

단유소에게서 형님이라는 호칭이 나오자마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응, 말해봐, 아우! 흐핫핫핫!”

백리우가 마지막에 호탕하게 웃어 보이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단유소의 입가에도 결국 미소가 피어올랐다.

맹주의 저 모습을 보니 문득 맹주가 거학의 목을 잡은 채로 그를 제압하고 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의 맹주는 숨을 헐떡이면서 ‘빌어먹을’, ‘제기랄’ 등의, 전혀 무림맹주답지 않은 언사들을 내뱉었었다.

그 생각을 하며 지금의 모습들을 보니 왠지 맹주가 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쩌면 맹주도 자신이 편하게 대하기를 바라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무림맹주이자 천하제일인인 존재가 먼저 호형호제를 권했다.

이 강호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래, 편하게 생각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