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맹주 독대 (2)
단유소가 고개를 돌려 서백풍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 들어서서 인사를 나눈 후, 그는 여태껏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백풍, 넌 어때?”
“예?”
“기분이나 느낌이 어떠냔 말이야. 너도 지금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다 보여.”
단유소의 말에 서백풍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기분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지요. 세상이 달라졌으니까요.”
서백풍의 말이 맞다.
초절정에 오르는 순간 세상이 달라진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달라지니 결국 세상이 달라지는 셈이 되는 것이다.
단유소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쉽네. 소운이와 네가 초절정에 오르는 순간의 모습을 놓치다니.”
“당시에 조장님이 계셨다면 저는 아마 지금처럼 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시잖아요, 조장님이 함께 계시면 의지하고 싶어진다는 거. 결국 그때는 묘하게 상황이 맞아떨어졌던 거죠. 저로서는 무조건 해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기도 했고…….”
단유소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듯 다른 길이 없는 절박한 상황들이 때때로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곤 하는 법이니까.
서백풍이 입을 열었다.
“줄곧 조장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때, 소운이가 목 장문인과 함께 후미를 지원하러 왔을 때까지만 해도 녀석은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랬지.”
“당시 후미의 상황은 청강시를 처리할 전력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목 장문인은 몰라도 소운이라는 전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습니다. 실제로 소운이는 후미에 와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조장님은 굳이 소운이를 후미로 보내셨고, 녀석은 그곳에서 벽을 깼습니다. 설마 그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신 겁니까?”
그러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너희들은 몰랐겠지만 근래 소운이가 눈을 떠가고 있다는 걸 나는 느끼고 있었거든.”
황 노파의 동굴에 있었을 때 심소옥에게서 받은 가차 없는 훈련은 연소운에게 일종의 기연이었다.
연소운의 태도와 분위기가 바뀌어가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더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녀석이 달라졌다는 확신이 든 건 청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 직후부터였다. 보통 전투가 벌어지면 녀석은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긴장부터 하잖아. 그게 움직임에서도 드러날 정도지. 일전의 전투들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녀석은 긴장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었고.”
“그랬죠.”
“그런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더구나. 멀리서 얼핏 녀석의 모습을 봤는데 더없이 차분한 모습이었다. 물론 나도 녀석이 딱 그 시점에 벽을 깰 것이라고 예상했던 건 아니야. 다만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고 운이 따라준다면 녀석이 조만간 완전히 눈을 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 가능성을 높게 점쳤던 것은 아니었고.”
“녀석이 갑자기 청강시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한 순간,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종종 조장님이 녀석의 천재성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솔직히 속으로는 반신반의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제야 알 것 같더군요. 조장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서백풍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 소운이의 모습이 제게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장님이 소운이를 다시 호출했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저도 절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는 차갑게 식더군요. 동시에, 지금껏 조장님이 제게 해주셨던 몇 가지 조언들이 각인되듯 떠올랐습니다. 그제야 그 조언들이 제대로 이해가 되더군요. 그때부터 이렇게 된 겁니다, 저는.”
그 말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나 연소운의 발전은 조원들에게 큰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애초에 겁 많고 소심한 연소운을 묵룡조에 받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연소운의 천재성에 경험이 더해진다면 분명히 한순간에 두각을 나타낼 것이고, 그랬을 경우에 기존의 조원들도 분발하게 될 테니까.
단유소가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너희들은 언제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무인들이야. 약간씩의 개인차가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진평과 승추는 조바심 내지 말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만 해.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앞서서 무리하면 그게 오히려 독이야.”
그러자 진평이 대꾸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백풍과 소운에게 조금의 질투심도 못 느낀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이 녀석들은 제게 있어 경쟁 상대이기 이전에 형제들입니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우선입니다. 가뜩이나 녀석들이 강해져서 저도 더 안전해질 수 있을 테니 더욱 좋은 일이지요.”
진평의 말에 곽승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조바심 내고 무리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겠지요. 조장님 말씀처럼, 하던 대로 꾸준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일 때쯤, 석실의 문이 열리더니 한설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단유소를 향해 말했다.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맹주님께서 단 공자님을 보자고 하세요.”
“알았어. 가봐야지.”
침상을 벗어난 단유소가 협탁 위에 가지런히 개어진 자신의 무복을 챙겨 입었다.
‘어차피 내 쪽에서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던 참이거든.’
한설연과 나란히 상청궁 지하의 복도를 걸었다.
상청궁의 지하 복도는 꺾어지는 길도 많고 갈림길도 많아서 흡사 미로 같았다. 꺾이는 길이나 갈림길의 모양새가 모두 비슷비슷하여, 설령 이곳이 제법 익숙한 사람이라도 헷갈리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미로 같은 복도를 한설연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나아갔다.
“지난 이틀간 많이 파악했나 보네. 헷갈릴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이 번이 딱 세 번째에요, 이 길은.”
“그런데 안 헷갈려?”
“처음 갔을 때 외웠죠.”
“외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외워진다는 게 더 대단하네. 이런 미로 같은 길을 그것도 한 번에.”
“히히.”
“그랬지. 당신은 교월이었지. 평소에 하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어서 말이야.”
그 말에 한설연이 단유소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그러더니 말했다.
“으휴! 정말 떼놓고 도망쳐서 골탕이라도 주고 싶은데 워낙 고수시라 그것도 불가능하고.”
그녀의 말에 단유소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러던 두 사람의 앞에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후……!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
단유소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설연이 빠르게 움직였다.
타다다다다다다닥!
그녀가 마치 보법을 펼치듯 막다른 벽면 앞의 바닥을 이리저리 밟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르르르르르―
공간에서 미세한 진동음이 들린다 싶더니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던 벽면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열린 벽면의 뒤쪽에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감쪽같은 기관 장치였던 것이다.
단유소의 눈동자가 커져 갈 때 한설연이 돌아서서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더니 말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그때가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군요.”
단유소가 인정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 후에도 막다른 벽면과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한 번씩 더 통과한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맹주님, 한설연입니다. 단 공자님을 모시고 왔어요.”
한설연이 문밖에서 기별하자 방 안에서 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들어들 오게.”
단유소가 한설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와서 보니 의외로 널따란 석실이었다. 자신이 머물던 방에 비해 세 배 정도는 넓어 보였다.
놀라운 건, 지하 석실 안이 매우 밝다는 점이었다.
석실을 밝히고 있는 게 등불이 아니었다. 자연광이었다. 제법 널따랗고 투명한 창을 통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투명한 창 너머 저 멀리로 산 아래의 풍경이 보였다. 물론 시커멓게 불타버린 청성산의 풍경이었다.
맹주 백리우는 그 투명한 창 앞에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단유소를 맞았다.
“어서 오게.”
단유소가 주먹을 가슴에 대며 무림맹의 예법을 취했다.
“충(忠)! 맹주님을 뵈옵니다.”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말했다.
“저를 찾으셨다하여 왔습니다.”
“그랬지.”
백리우가 그렇게 대꾸하며 한설연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임을 알아들은 한설연이 예를 취하더니 석실 문을 나섰다.
그러자 백리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투명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상태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불러놓고 아무런 말도 없으니 불편하다 여길 법도 하건만, 단유소는 차분한 표정으로 백리우의 뒷모습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백리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창은 절벽에 난 창이지. 보니까 기관 장치를 가동시키면 이 창을 덮고 있던 암벽이 열리는 구조더군.”
단유소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말을 이었다.
“이 산이 이렇게 모조리 불타버리지만 않았다면 이곳에서 보는 경치가 제법 수려했을 텐데. 쯧쯧. 고얀 놈들 같으니.”
단유소가 조용히 미소를 지은 채로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백리우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물었다.
“몸은 괜찮은가?”
“괜찮다 뿐이겠습니까.”
그 말에 백리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단유소가 저렇게 대꾸하는지 안다는 투였다.
이번에는 단유소가 물었다.
“당시에 제 상태, 많이 안 좋았습니까?”
그러자 백리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단유소의 질문과는 상관없는 말을 했다.
“자네, 위험한 무공을 익혔더군.”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난이도 높은 임무들을 자네가 어떻게 그렇게 척척 완수해왔는지 이해가 가더군. 진원진기를 이용하는 무공이라니…….”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리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악화된 단유소의 상태를 돌보던 중에 그가 익힌 무공의 정체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나서 얼마나 가슴이 아렸는지 모른다.
강력하되 위험성이 높은 무공이라는 사실이야 조부를 통해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무공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위험성이 설마 진원진기를 이용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었을 줄이야.
‘제가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저 아이로 하여금 그런 무공을 익히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조부가 원망스러웠다.
그 생각을 하던 백리우가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매우 좋지 않았었네. 그때 자네의 상태.”
“제게 무엇을……, 먹이신 겁니까?”
“그냥 원기 회복에 좋다는 약.”
“그 정도 약이 아니라는 걸 저도 알고 맹주님께서도 아십니다.”
“대환단일세.”
그 말에 단유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인간이 제조한 약 중에서 그 효능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영약이 바로 소림의 대환단이었다. 죽어가는 자를 벌떡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영약이었다. 그렇기에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들마저도 구하고 싶어 안달인 약이었다.
그러나 제조되는 약의 수량이 지극히 적은 데다가 소림에서 약의 유통을 철저하게 제한하는 탓에, 천만금을 줘도 구하기 힘들다는 물건이 바로 대환단이기도 했다.
물론 소림이 유통을 그토록 철저하게 제한하는 이유는 대환단이 악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맹주는 그런 대단한 물건을 자신에게 먹인 것이다.
“제 목숨값에 비해 너무 큰 지출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틀렸네.”
운을 뗀 백리우가 고개를 돌리더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 내게는 대환단 따위보다 자네의 목숨값이 백 배, 천 배는 더 값지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