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맹주 독대 (1)
황 노파의 동굴에서 단전에 가득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건, 한설연이 먹여줬던 약의 기운이 제대로 녹아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가 먹인 영약의 기운이 이미 체내에 녹아들어 있다.
즉,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영약의 기운을 자신의 체내에 완전히 스며들게 했다는 뜻이다.
정해진 기혈과 경맥을 따라 진기를 도인하는 일은 절정 이상의 고수라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완전히 녹아들게 하는 건 말이 쉽지 초고수들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당장 자신도 이렇게까지는 못한다.
‘그렇다는 건…….’
단유소의 눈동자가 커졌다.
온 강호를 통틀어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더더군다나 청성에 있던 사람들로 범위를 좁히면 딱 한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
‘맹주님이……?’
더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사내.
무림맹주 백리우.
그가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단유소가 갑자기 흠칫하며 베개에서 뒷머리를 떼었다.
“우으음……. 단 공자님…….”
한설연이 잠꼬대를 하며 자신의 손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단유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던 그가 천천히 검지를 펴서 그녀의 볼을 눌렀다.
이번에는 잠든 상태의 한설연이 흠칫했다.
곧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동공이 본인의 볼에 닿아 있는 단유소의 검지로 향했다.
그 상태로 몇 차례 눈을 깜빡거리던 한설연이 이윽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더니 단유소를 바라보며 외쳤다.
“다, 단 공자님!”
한설연은 반가움과 안도감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단유소는 특유의 째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 언제 깨어나셨어요?”
“방금.”
“모, 몸은 괜찮은 거예요?”
“응. 괜찮아. 그보다도 한 소저가 간호하느라 고생 많았나 보네.”
“저, 저야 뭐……. 아무튼 다행이에요, 단 공자님.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고마워.”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눴음에도 단유소는 여전히 째진 눈빛으로 한설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유소의 눈치를 살피던 한설연이 물었다.
“그, 그런데 표, 표정이 왜 그래요? 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
한설연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한 손 손등으로는 입가를 훔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양쪽 눈을 매만졌다. 자다가 일어났으니 혹시 침이라도 흘렸는지, 눈곱이라도 끼었는지 재빨리 확인한 것이다.
단유소가 째진 눈빛으로 되물었다.
“뭐였어, 방금?”
“네?”
“당신. 잠꼬대했다고.”
“자, 잠꼬대요? 제가요? 무, 무슨 잠꼬대요?”
그러자 단유소가 눈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내 손등에 볼을 마구 비벼대면서 음흉하고 헤벌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당신. 침도 흘렸고.”
“제제제제, 제가요? 으, 으, 음흉……? 헤, 헤벌쭉……?”
“무슨 꿈 꾼 거야? 그새 또 색녀 본성 나온 거야?”
“새, 색녀라니! 또 그런 천박한 말을……!”
“푸홧! 어이가 없어서 나 원 참. 천박은 당신이 방금 전에 잠꼬대하면서 지은 표정이 딱 천박했거든? 당신 표정 보면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내가 정신 잃었던 사이에 설마 나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했던 거 아냐, 이거?”
그 말에 한설연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이, 이상한 짓이라니, 말도 안 돼요!”
“그러니까, 무슨 꿈 꿨는지 사실대로 털어놔 보라니까? 떠올려보기라도 하라고.”
단유소의 말에 한설연이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의 볼 위쪽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단유소가 말했다.
“됐어. 그쯤이면.”
“뭐뭐뭐, 뭐가 돼요?”
“당신 지금 볼 빨개졌다고.”
“무무, 무슨 볼이 빨개졌…….”
단유소가 한설연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찔리는 구석이 없으면 말은 왜 더듬는데?”
“…….”
“색녀.”
“하, 하지 마요, 그 말 좀……!”
“풋.”
단유소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설연은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 이 사람 정말. 이런 부분에서는 쓸데없이 예리해.
그의 말마따나 꿈을 꾸었다.
그의 품에서 깨어나는 꿈이었다.
미쳤나 봐, 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이라니, 진짜 미쳤나 봐!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웠다.
다행히 단유소는 고개를 돌려 벽면의 일렁이는 등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소가 그 상태로 말했다.
“오랜만에 농담 좀 해본 거야. 고마워, 한 소저. 나 간호한다고 고생 많았겠지.”
“아, 아니에요. 그게 무슨 고생이라고. 그보다도 몸은 정말 괜찮아진 거예요?”
“응.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괜찮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정신을 잃은 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얘기 좀 해줄래? 진평이랑 백풍이 다가오는 걸 본 후로는 아무것도 기억에 없어.”
“그랬군요.”
한설연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쓰러지는 단 공자님을 맹주님께서 부축하셨어요. 그러고는 맹주님께서 직접 단 공자님을 업고 빠르게 비탈 아래로 내려가셨죠. 그 즈음 비탈 아래는 정리가 되어가는 상태였어요. 포 대협께서 천무단의 정예들과 사천의 강호 세력의 조력자들을 이끌고 오셨기 때문이죠.”
그때 기척으로 느꼈던 최정예 무인들의 정체가 천무단의 무인들이었던 모양이다. 포원과 천무단이라면 상황을 정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적측에서 또 다른 강자가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네. 어쨌거나 맹주님께서는 곧바로 목 장문인에게 장소를 수소문하셨어요. 그리고 목 장문께서 비밀리에 이곳을 내어주셨죠. 여기는 상청궁 지하의 비밀 석실이에요. 참고로 맹주님께서는 아직 청성에 머무르고 계시고, 그분이 이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뿐이에요. 목 장문인, 포 대협, 묵룡조 그리고 저 정도죠.”
맹주의 소재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일은 없다. 적절한 대처였다.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단 공자님의 안색은 그 전부터 창백했지만 정신을 잃은 후에는 더 창백해졌어요. 그리고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렸죠. 어떤 방법을 써도 단 공자님은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아.”
“그러자 맹주님께서 직접 나서셨어요. 맹주님은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홀로 이 방에서 오랫동안 단 공자님의 상태를 살피셨어요. 꼬박 네 시진(8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방에서 나오셨어요. 뒷일을 제게 맡기시고는.”
네 시진이면 긴 시간이다.
그 정도면 맹주가 자신의 몸에 모든 조치를 취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영약의 기운이 체내에 모조리 흡수되게 하는 일까지도.
“그래서 내가 얼마나 이 안에 있었던 거지?”
“제가 단 공자님을 간호하기 시작한 후부터 따져도 꼬박 하루가 지났었어요. 제가 깜빡 잠들었기에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하 석실이라서 현재 시각을 알 수가 없으니 한설연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잘해야 아마 한두 시진쯤 더 흐르지 않았을까요?”
“세 시진은 더 흘렀겠군.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자세로든 당신이 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자잖아.”
단유소가 단정하듯 말하자 한설연이 눈을 흘기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인 단유소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현재 청성의 상황은 어때? 그날 새벽 후로 지금까지 적습은 없었나?”
“네, 없었어요. 그리고 현재 청성은 목 장문인의 지휘하에 모두가 뒤처리를 하고 있는 상태예요. 천무단의 무인들과 사천의 무인들이 돕고 있고, 인근의 무림맹 천망단원들이 모두 소집되었어요. 사천의 여러 강호 세력들이 이차적으로 조력자들을 파견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그들도 합류해 있을 거예요. 맹주님께서도 청성을 돕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셨고요.”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물었다.
“우리 애들은? 아! 참, 소운은? 많이 다쳤었는데?”
“연 공자님은 상처가 크긴 했는데 조치를 빠르게 취해서 위험한 상황까지 가진 않았어요. 상처에 비해 출혈도 비교적 적었고요. 지금은 다른 석실에서 회복 중이세요.”
“아…….”
단유소가 다행이라는 듯 탄성을 내뱉자 한설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
“다른 공자님들도 모두 조용히 지내고 계세요. 그리고 당사자들이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청성의 문도들 사이에서 공자님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해요.”
“이상하군. 아무리 승리했다 해도 결국 우리 때문에 본인들이 그 고통을 겪은 거잖아. 그들도 그 사실을 알잖아.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를 보는 시선이 호의적이지는 않을 텐데 오히려 인기라니 아무리 신룡대라고 해도 그건 좀…….”
“그분들도 아는 거죠. 우리 때문에 상황이 그렇게 되긴 했지만, 우리가 본인들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특히, 엄청난 신위로 청강시들을 상대한 서 공자님과 그 무시무시한 홍학을 상대했던 연 공자님에 대한 칭송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잠시 말을 멈췄던 한설연이 단유소와 눈을 맞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단연 최고의 인기인은 단 공자님이세요.”
“내가 비탈 위의 상황을 정리하고 거학을 제압한 것으로 아는 거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맹주님의 존재 자체가 비밀일 테니.”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벽력탄 때문이에요. 물론 당시에 포 대협도 일조하시긴 했지만, 하늘을 덮으며 떨어져 내리던 그 수많은 벽력탄의 대부분을 처리한 사람이 바로 단 공자님이시니까요. 그들도 그 광경을 똑똑히 봤으니까요. 청성 문도들은 아직도 입만 열면 대부분 그 얘기예요. 역시 묵룡, 묵룡 하면서.”
한설연의 말에 단유소가 엷은 미소를 지을 때였다.
똑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소저, 저희들입니다.”
“앗! 들어오세요.”
한설연이 일어서서 석실의 문 쪽으로 다가가며 그렇게 대꾸하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진평과 서백풍 그리고 곽승추였다.
“조장님께서는 아직인……, 헛!”
앞서서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그렇게 말하던 진평이 깨어 있는 단유소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조장님!”
“조, 조장님!”
“깨어나신 겁니까?”
세 사람이 얼른 단유소 곁으로 다가왔다.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세 사람을 맞았다.
“어서들 와.”
단유소가 멀쩡하게 깨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묵룡조원들은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한설연은 연소운의 상태를 확인하겠다며 방을 나갔다.
“저희들도 방금 전까지 소운이와 있다 오는 길입니다.”
진평의 말이었다.
“한 소저에게서 대강은 들었다. 회복 중이라지?”
단유소가 묻자 이번에는 곽승추가 입을 열었다.
“예. 녀석은 뭐, 기분이 좋아서 별로 아픔도 못 느끼는 모양입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누가 봐도 들떠 있는 표정이거든요.”
그 말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하긴 그럴 것이다.
초절정의 반열은 무인으로서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허락된 경지이다.
자질과 재능과 노력이 다 받쳐줘도 초절정에 오르지 못하는 무인들이 허다하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렇기에 갓 초절정에 오른 시절의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잘 안다. 며칠간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의 연소운도 그 희열을 흠뻑 느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