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폐허 속의 새벽 (4)
한설연이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하, 하오나 은인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 우선일 듯하여…….”
“감사 인사는 되었네.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게.”
“그, 그래도…….”
백의 사내가 한설연을 이끌어 본인이 서 있던 작은 바위 위에 억지로 앉혔다.
백의 사내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저는…….”
“소저가 누구신지 알고 있으니 소개는 되었네. 감사 인사도 되었고.”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은공께서는…… 누구신지…….”
그러자 백의 사내가 눈으로 웃더니 말했다.
“그보다도 먼저…….”
말을 줄인 백의 사내가 고개를 돌려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비탈 끝부분의 음영이 드리운 곳이었다. 백의 사내가 계속해서 그곳을 주시했다.
갑자기 백의 사내가 왜 그러는 건지 한설연이 의아해할 때쯤, 여전히 비탈의 끝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백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나와도 되네. 보시다시피 나는 그대의 적이 아닐세. 자네, 오래 쭈그려 앉아 있었지 않았나.”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할 때, 단유소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은신술은 대라유유선공을 이용하여 조화의 묘를 최대한 살리는 방식이기에, 작정하고 은신하면 어지간해서 들킬 일이 없다. 무리한 탓에 비록 몸이 천근만근 무겁기는 하나, 그렇다 해도 자신이 펼친 은신술 자체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의 사내는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은신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상대가 그 정도의 고수라면 이곳에서 아닌 척 버티고 있어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
단유소가 몸을 일으키자 한설연이 외쳤다.
“고, 공자님……!”
한설연의 표정과 어조에는 놀람과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그러던 그녀의 눈동자에 점차 염려가 담기기 시작했다.
확인해보니 단유소의 안색이 매우 창백했던 것이다.
왜 저렇게 창백해졌을지는 굳이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무수히 떨어져 내리던 벽력탄을 처리한 사람이 단유소임을 알고 있다. 그 위험한 무공을 또 썼을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거학에게 붙잡힌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또다시 무리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모습이라니.
마음이 아프다.
그의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늘 마음이 아프다.
저벅, 저벅.
단유소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백의 사내와 한설연 쪽으로 다가왔다.
백의 사내는 단유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조용히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윽고 백의 사내의 앞에 선 단유소가 포권하며 말했다.
“대협께서 저희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무림맹 소속의 무인으로…….”
그러자 단유소의 말을 끊으며 백의 사내가 대꾸했다.
“안색이 창백하군. 괜찮은가?”
단유소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기색을 보이며 짧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그러자 백의 사내가 단유소의 다리 쪽을 일별하더니 말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내 눈은 못 속이네. 지금 자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참고 있지 않은가. 내가 무섭기 때문은 아닐 테니, 현재 서 있는 것도 힘든 지경이라는 뜻이겠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백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백의 사내의 웃음을 보며 한설연이 미세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비웃는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왠지 못 말린다는 투로 단유소를 대하는 느낌, 즉 백의 사내가 이미 단유소를 알고 있다는 느낌의 웃음이었던 탓이다.
“그보다도 은인께서는…….”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자 백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말했다.
“앉게.”
“그럴 수는…….”
“앉으라면 앉게.”
약간은 고압적이다 싶은 말투에 단유소가 조용히 백의 사내의 눈을 응시했다. 백의 사내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뜻이었다.
그러자 백의 사내가 또다시 웃으며 말했다.
“명령일세.”
그 말과 함께 백의 사내가 복면을 턱 아래로 끌어내리니, 곧바로 단유소가 두 눈을 부릅떴다. 단유소에 이어서 한설연의 눈동자도 찢어질 듯 커졌다.
“매, 맹……!”
단유소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백의 사내가 한 손 검지를 입술에 대어 두 사람의 언성을 낮추게 했다.
“매, 맹주님을 뵈옵…….”
“맹주님을…….”
단유소와 한설연이 작은 목소리로 예를 취하려 할 때 백의 사내, 무림맹주 백리우가 활짝 편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러더니 단유소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방금 자네에게 명령을 하나 내렸던 것 같은데.”
“하, 하오나……, 제가 어찌…….”
그러나 백리우가 턱짓을 해보이자 결국 단유소가 바위에 앉았다. 그러자 한설연도 앉았다.
앉자마자 단유소가 음성을 낮추어 서둘러 물었다.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그러자 백리우도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내가 안 반가운가?”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오라…….”
“첩보를 듣고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어 와봤지. 이미 공동이 그렇게 당했는데 청성까지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렇게 머리가 빠질 정도로 열심히 달려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군. 조금만 늦었어도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어.”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그가 그렇게나 숨을 헐떡거릴 정도였으면 얼마나 빨리 달렸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단유소는 이제야 백리우가 왜 그렇게 헐떡거리고 있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어쨌거나 모두가 무사하기에 정말 다행이야.”
백리우가 인자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한설연은 이 상황이 매우 놀라웠다.
백리우가 나타나서 거학을 제압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사실, 정확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자신조차 잘 모른다.
거학의 팔에 끼워진 채로 이곳에 올라선 순간, 진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즈음에 거학이 흠칫했고, 그 순간에 누군가가 마치 귀신처럼 나타나서 거학을 제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를 살아가는 별처럼 많은 무인들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자.
무림맹주, 천하제일인 백리우.
그가 이곳에 나타났을 줄이야.
자신이 무사할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이고, 청성이 궤멸되지 않은 것도 다행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단유소가 안전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다행이었다.
백리우가 인자한 미소를 보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특히 두 사람은 고생이 많았겠지. 내, 다 들어서 알고 있네.”
그러자 한설연이 대꾸했다.
“저, 저는 한 게 없습니다. 단 공자님께서 너무 많이 고생하셔서…….”
한설연의 음성이 마지막 부분에서 떨렸다.
그러자 백리우가 한설연에게 말했다.
“내, 다 들었다니까? 고맙네, 한 소저. 소저가 아니었으면 본 맹은 최고의 요원을 잃을 뻔했어.”
요원이라.
맹주는 신룡대원들을 그렇게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백리우는 현월대보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하긴 그때의 일을 연소운이 옆에서 봤으니 나중에라도 보고를 하긴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설연이 대꾸했다.
“제가 아니었으면 그런 상황이 벌어질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 마음만 더 무거워집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네. 소저가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걸로 너무 마음 쓰지 말게. 저 친구도 본인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니.”
그러자 한설연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백리우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왜, 왜 그러는가, 갑자기? 감사 인사 같은 건 되었다고 내가 아까…….”
그러자 한설연이 허리를 펴더니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도 맹주님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은혜를 입었지만, 저는 지금 다른 은혜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겁니다. 꼭 한 가지만큼은 정식으로, 깊이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본 곡에서는 일찍이 신룡대의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 공자님이 신룡대원이며, 그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백리우가 빙그레 웃자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만약 그때 맹주님께서 단 공자님과 같은 분을 보내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긴, 그건 그랬겠지.”
그 즈음, 비탈의 끝부분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 조장님!”
진평과 서백풍이 단유소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단유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그보다도 먼저 맹주님께 예를…….”
그렇게 말하던 단유소의 신형이 갑자기 휘청하더니 그대로 기울어졌다.
모두가 깜짝 놀랄 때, 쓰러져 가는 단유소의 신형을 백리우가 빠르게 부축했다. 그러더니 진평과 서백풍을 돌아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들의 예는 나중에 받지.”
하늘 저 멀리로 미미하게 동이 터오는 가운데, 청성산 정상 부근에 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 *
‘으으음…….’
단유소가 정신을 차리고 서서히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건 자그마한 석실의 천장과 벽면이었다.
고개를 가만히 돌리며 사방을 확인해보니 창이 없는 석실이었고, 사방을 은은한 등불이 비추고 있었다.
서서히 정신을 차려가던 단유소가 베개에서 뒷머리를 살짝 떼었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때문이었다.
침상의 중간쯤에 엎어져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설연이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엎어져서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든 것이다.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뒷머리를 다시 베개에 대었다.
간호한다며 얼마나 고생했을까.
한설연이 깰까 봐 억지로 손은 빼지 않았다.
그녀와 맞닿아 있는 손의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했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디일까.
아니, 이 순간만큼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자신은 어떤 상태에 있었으며, 지금의 이 상태는 또 어떻게 된 걸까.
진평과 서백풍이 다가오던 마지막 순간에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까지는 기억한다. 하지만 그 후의 일은 하나도 기억에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문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이 기운은 대체……, 뭐야……?’
처음에 깨어났을 때, 온몸에 활력이 가득하다는 사실 정도는 느꼈었다. 그땐 단지 푹 쉬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보니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활력이 넘치는 게 아니라, 전신 세맥의 구석구석에 기운이 가득 잠재되어 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정도로 가득한 기운이라면 결코 체내에서 스스로 생성된 기운이 아니었다. 영약 등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생성된 기운이었다.
신기한 건, 예전에 황 노파의 동굴에서 깨어났을 때와 달리, 지금은 단전에 기운이 차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저 평상시보다 더 많은 양의 기운들이 더 빠르고 더 자연스럽게 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이 기운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