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폐허 속의 새벽 (3)
쾅! 쾅!
연소운이 피하지 않고 거학의 공격을 억지로 막아내었다.
아까는 상황이 다급하여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지금은 격돌음을 이용해서라도 이곳의 상황을 알리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크윽……!’
연소운이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아까 검이 맞부딪쳤을 때에도 느꼈지만, 그야말로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위력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고 있을 새가 없었다.
강력하면서도 거대한 기운들이 이미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슈슈슈슉―
피하거나 막기는커녕, 저 공격을 받고도 무사할지가 의문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
카강! 휙휙휙―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두 개의 강기를 막고 세 개의 강기를 흘려낸 연소운이 고개를 홱 돌렸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학이 들고 있던 거검만큼이나 거대한 강기가 이미 등에 닿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거학이 이기어검을 발출하여 자신의 등을 노린 것이다.
깜짝 놀란 연소운이 신형을 홱 틀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
푸욱!
거학의 강기가 연소운의 한쪽 옆구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크윽!”
옆구리에서 불에 덴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연소운이 옆구리를 움켜잡을 때쯤, 거학의 신형은 이미 어둠 속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한 소저어어어어……!”
연소운의 외침이 길게 메아리쳤다.
그 직후, 쓰러져서 바위에 기대고 있는 연소운의 곁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소운……!”
낮은 음성으로 연소운을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단유소였다.
“조, 조장님……!”
단유소가 빠르게 눈으로 연소운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피를 많이 흘린 모습이었던 탓이다.
“괜찮으냐? 많이 다쳤어? 지혈은 했고?”
“저,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한 소저께서…….”
그렇게 말하며 연소운이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비탈의 위쪽이었다.
“빠, 빨리 가, 가보시지 않으시면 늦…….”
말을 하는 연소운의 입가로 피가 새어 나왔다. 단유소가 한 팔을 뻗어 그가 말하는 걸 제지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입에 넣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 삐이이이―
“청천을 불렀다. 녀석이 다른 조원들에게 이곳을 알려줄 거야. 조금만, 조금만, 버티거라.”
“어, 어서…….”
연소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단유소의 신형이 흔들렸다.
단유소의 신형이 비탈길을 쑥쑥 박차고 올라갔다.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줄기의 검은 바람이 산 위로 부는 것 같았다.
그랬다. 단유소는 현재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경공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는 또다시 혼원태극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학의 움직임을 놓쳐 연소운을 도울 때 한 번.
허공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벽력탄들을 제어할 때 또 한 번.
그러니 최대한의 속도로 경공을 펼치는 이번이 꼭 세 번째였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혼원태극공을 사용한 횟수가 벌써 세 번째인 것이다.
무리임을 알고 있다.
아무리 대라유유선공이 한 단계 발전했다 하더라도 짧은 시간에 혼원태극공을 이렇게까지 사용하는 건 분명히 무리였다. 가뜩이나 허공의 벽력탄들을 처리할 때, 이미 크게 무리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리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녀를 지키다 사라져간 모든 영혼들에게. 또한,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지만 그건 두 번째 이유에 불과했다.
자신이 이렇듯 무리하고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분명히 따로 있었다.
뭘까?
임무 때문에?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아니었다. 이쯤 되었으면 그녀를 호위하는 이번 임무는 포기해도 큰 상관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조원들을 위해서도 옳은 선택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건,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측은지심 때문도 아니었다.
측은지심 때문이었다면, 그녀가 사라졌다는 가정을 할 경우, 그저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정도여야 한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졌다는 가정을 해보는 지금, 슬프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아니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왜일까.
이 순간, 그녀와 함께 했던 모든 일들이 뇌리에 각인되듯, 또렷하게 다시 떠오르고 있는 건.
지인들을 잃은 슬픔을 꾹 눌러 참은 채, 의연한 모습으로 자신을 대하던 그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모든 걸 물어보던 말괄량이 같던 그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았던 그녀.
자신에게 늘 핀잔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던 그녀. 나아가서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본인이 죽겠다고 각오하던 그녀.
자신이 다쳐서 쓰러졌을 때, 그렇게도 많이 울었다던 그녀.
인피면구를 벗고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을 때, 너무도 아름다워서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그녀.
때때로 추운 곳에서 노숙을 할 때면, 자는 도중에 본인도 모르게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던 그녀.
그때의 따뜻했던 감촉.
그녀의 향기. 또, 그녀의 목소리.
짧은 시간 동안 그 모든 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자신이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를.
‘기다려, 한 소저.’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구해줄게.’
이 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단유소는 순식간에 비탈의 상단에 도달했다.
이제 네댓 번만 더 도약하면 비탈 정상 위에 오를 법한 위치였다.
그 즈음의 단유소는 혼원태극공을 거둬들이고 대라유유선공을 일으켜 기척을 감춘 후였다. 그 상태로 조용히 한 차례 도약한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했다.
피비린내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서, 설마……!’
그들이 한설연의 목숨을 앗은 건 아닌가 하여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단유소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혈천맹에서도 한설연에게 살수를 썼었지만, 어느 순간 이후로는 그녀를 생포하려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쉽게 그녀의 목숨을 앗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 뭘까.
단유소가 그 후로 또다시 두어 차례 위쪽으로 도약했다. 도약할수록 피비린내는 짙어져만 갔다.
그러던 한순간,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일대에 피비린내가 완전히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 피비린내라면 결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몇 명 이상이 쏟은 피였다.
거학과 홍학이 등장한 것도 저 비탈 위에서였고, 일제히 벽력탄이 쏟아진 것도 저 비탈 위에서였다.
즉, 저곳은 적들의 진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적 진영에서 웬 피비린내란 말인가.
“끄어억……!”
비탈의 위쪽에서 신음이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신속하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비탈의 위쪽에 도달한 단유소가 음영 속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헛……!’
십여 구의 시체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운데 단 두 명,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얕은 바위 위에 선 그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목을 움켜잡은 채로, 팔을 들어서 상대의 신형을 들어 올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목을 잡힌 자의 양발은 땅바닥에서 떨어져 있었다.
“끄어어억…….”
신음 소리는 목을 잡힌 사내에게서 흘러나왔다. 단유소의 위치에서는 그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누군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놀랍게도 목을 잡힌 채로 숨넘어가는 소리를 흘리고 있는 쪽이 바로 거학이었던 것이다.
거학의 목을 움켜쥔 사내는 거학의 덩치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다만 펄럭이는 백의 자락만 보였다.
“헉! 헉! 허억! 허어억……!”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가쁜 숨소리는 그 백의 인영의 숨소리였다.
그 백의 인영의 옆에 한설연이 쓰러져 있었다. 몸이 작고 일정하게 들썩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녀는 호흡을 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단유소는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백의 인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허억……. 아유, 이런 빌어먹을. 허억……! 이놈의 짓거리 빨리 때려 치든지 해야지. 허어억! 힘들어 죽겠네, 제기랄. 허어어억. 후우, 후우우…….”
* * *
단유소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직접 붙어봤기에 거학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대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백의 인영은 지금, 그런 거학을 완벽하게 제압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는 한설연까지 구했다.
정황을 보아하니 이곳에 있는 적들을 도륙한 사람도 저 백의 사내인 듯했다.
대체 저 백의 사내는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어쨌거나 한설연이 무사한 듯하고 거학이 완벽히 제압을 당한 건 분명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단은 안심이 될 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단유소는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보통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들 하지만 그게 아닌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양쪽을 모두 적으로 둔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유소는 속으로 그가 적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저 정도의 강자라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혼원태극공을 벌써 세 차례나 쓴 탓에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던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저 목소리…….’
누구였더라?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인데,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딱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는 백의 사내의 생김새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끄으으으윽…….”
거학에게서 다시 한번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쯤, 백의 사내는 거의 호흡을 가다듬은 상태였다.
“후우. 후우우…….”
그 후 백의 사내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땅바닥에 박아놓더니 한 손으로 거학의 혈을 짚어갔다.
투두두두두두둑―
거학의 전신 이곳저곳을 두드리던 그가 이윽고 움켜쥐고 있던 거학의 목을 놓았다.
털썩!
거대한 거학의 신형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거학의 신형이 사라지자 단유소의 눈에 백의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입고 있는 옷 색깔과 같은 백색의 복면을 쓰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생김새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복면 위로 드러난 눈매는 왠지 낯익었다.
백의 사내가 한설연이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두세 걸음을 옮겼다.
단유소는 긴장감을 가득 유지한 채 백의 사내의 행동을 주시했다. 지금부터 백의 사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가 매우 중요했다.
만약 백의 사내가 한설연을 해하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서야 했다. 물론 그의 빈틈을 노리면서 은밀하게.
그때였다.
“소저, 괜찮은가?”
백의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가 염려 섞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한 모양이더군. 지금 내가 풀어줄 것이네.”
이윽고 한설연을 바로 눕힌 백의 사내가 그녀를 향해 빠르게 손을 내질렀다.
투두두두둑―
그러자 땅바닥에 누워 있던 한설연의 몸이 한두 차례 꼼지락거렸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더니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던 중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런……!”
백의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얼른 한설연을 부축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소저! 무리하지 마시게. 혈이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렇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