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폐허 속의 새벽 (2)
한설연 또한 이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단유소는 한설연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도망쳐야 하는데도 그녀가 저러고 있는 건, 진평을 버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녀 자신이 도망쳐버리면 진평이 거학에게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진평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결국 저런 식으로 버티다가 거학과 협상을 하든지 할 것이다. 본인의 희생을 담보로, 진평을 살리는 조건을 걸면서.
이를 악물고 있는 단유소를 향해 한설연의 앙칼진 전음이 빠르게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저를 구하시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그러니 빨리!]
단유소의 양팔이 부르르 떨렸다.
마지막 순간쯤에 계속해서 거학이 보였던 비릿한 미소의 의미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이거였나, 거학?
포원 등의 조력자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린 이유도, 떨어지는 벽력탄에 대처하지 못했을 경우, 한꺼번에 더 큰 피해를 입히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학은 이 순간에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단유소가 이를 악물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 순간, 단유소의 신형이 흔들렸다.
곧 그의 신형이 청성의 문도들 사이를 스치며 빠르게 중진을 향해 나아갔다.
그 즈음 청성의 문도들도 여기저기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위! 위에서 뭔가가 떨어진다!”
“뭐, 뭐얏!”
청성 문도들의 고개가 일제히 위쪽으로 향하기 시작한 가운데, 어느새 중진 부근에 도착한 단유소가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물론 혼원태극공을 가득 끌어올린 채였다.
떨어져 내리던 벽력탄들의 속도가 일제히 줄어들었다.
“헉!”
“뭐, 뭐야!”
청성 문도들 사이에서 놀람 가득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올 때, 허공에서 떨어지던 벽력탄들이 서서히 궤도를 따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회전 속도가 빨라지며 벽력탄들이 허공의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소용돌이가 주변의 물을 끌어들이듯, 넓은 범위에 퍼져서 떨어져 내리던 벽력탄들이 계속해서 허공의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광경에 청성 문도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대체……, 누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걸까.
곧 청성 문도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수십 개, 아니 백 개도 넘어 보이는 벽력탄들이 모여드는 허공의 바로 아래에, 팔을 뻗은 채로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단유소였다.
“아아……!”
“무, 무, 묵룡……!”
이윽고 벽력탄들이 거의 모여들었다 싶은 탈나, 단유소가 뻗고 있던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벽력탄들이 일제히 후미의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청성의 문도들이 일제히 양손으로 귀를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쾅!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후미의 먼 곳에서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들렸다.
“와아아아아!”
청성의 문도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할 때였다.
“지금이 감탄만 하고 있을 때이냐!”
불현듯 들려온 중후한 음성은 장문인 목종림의 것이었다.
휘이익―
그가 바람처럼 다가오며 홍학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낯선 몇 명의 무인들이 목종림의 뒤를 쫓아왔는데, 그들도 일제히 홍학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
홍학을 보니 이상했다.
여태껏 홍학을 상대하던 청년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목종림을 따라온 무인들이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눈이 좋은 문도들이 그들의 의복 가슴께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다.
“천……, 무……?”
“천무라면……, 천무단?”
“천무단이라니……!”
문도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신룡대가 맹주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드러나지 않은 최정예 작전조라면, 천무단은 무림맹의 드러난 최정예 무력 집단이었다.
그들이 청성을 도우러 온 것이다.
청성 문도들의 눈동자에 희열이 담길 때 장문인 목종림의 고함이 다시 울려 퍼졌다.
“언제 또 위쪽에서 벽력탄이 떨어질지 모른다! 두 번의 행운은 없다! 모든 문도들은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며 추가 벽력탄의 투하에 대비하라!”
목종림의 명이 떨어지자 청성의 문도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의 곁에 있던 단유소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퍼어억!
거학의 발차기에 맞은 진평의 몸이 반으로 접히며 쭈욱 뒤로 날아갔다.
“커허헉……!”
“진 공자님……!”
날아가는 진평의 입에서 괴로움 가득한 신음이 터져 나오고, 한설연이 그런 진평을 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이내 산 아래쪽에서 들린 폭음에 의해 묻혀버렸다.
띠이이이잉―
진평이 당하던 찰나였기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고, 그랬던 탓에 고막이 폭음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고막뿐만 아니라 뇌리도 멍해진 상태였지만, 한설연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크게 다친 것 같기는 하지만, 검에 베인 게 아닌 이상 진평은 괜찮아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한설연이 자신의 심장 바로 위에 대고 있던 비수에 힘을 가했다.
거학과의 거리를 따졌을 때 시간은 충분했다.
그가 단유소와 백학처럼 내면의 힘을 폭발시키는 무공을 사용한다고 전제해도, 이 정도면 자진할 시간은 충분했다.
단유소와 함께하면서 죽을 각오는 수도 없이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죽어주는 것이 곧 모두를 도와주는 길임을, 한설연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한마디 말은 끝내 전하지 못했지만…….’
비수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내게 이 아름다운 감정을 심어준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여, 안녕히…….’
마지막 순간에 한설연은 눈을 감은 채로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나중에 그가 확인하게 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행복에 겨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기를.
그렇듯 비수가 파고들며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을 때였다.
‘응?’
갑자기 몸이 전체가 무거워진다는 느낌에 한설연이 두 눈을 빠르게 떴다.
한설연이 보니 어느 정도 살갗을 파고든 비수가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있었다.
‘이잇……!’
한설연이 역수로 잡은 비수를 강하게 눌렀지만 허사였다. 아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둘러 정면을 바라보니 거학이 검을 쥐지 않은 한 손을 뻗은 채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허공을 격한 채로 자신의 움직임을 제압하려고 힘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저, 저자가……!’
한설연이 체내의 모든 진기를 끌어올려 봤지만 허사였다. 비수는 더 이상 살갗을 파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거학이 검을 쥔 손의 검지를 폈다.
슈슈슉―
그의 검지에서 잇달아 두 차례의 지풍이 발출되었다.
날아온 지풍이 한설연의 혈도를 정확히 가격했다.
마혈과 아혈이었다.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설연의 몸에 힘이 빠졌다. 축 쳐져서 바닥에 쓰러지는 그녀의 신형을 거학이 한 팔로 붙들었다.
“지독한 년……!”
거학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안 돼! 안 돼……!’
한설연은 간절히 외쳤지만 아혈을 제압당한 탓에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진평이 거학의 발차기에 맞아 날아간 후로 폭음이 들리고 자신이 이렇듯 제압당하기까지, 그 모든 일이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졌다.
거학의 한 팔에 끼워진 채 축 처진 몸으로 이동하게 된 한설연은 절망스러웠다.
결코 방심했던 게 아니었다.
이미 계획했던 일이었고 각오했던 일이었다.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단호하게 비수를 꽂아 넣었었다.
진평의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자진(自盡)을 시도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진평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진평은 그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동료다. 동료를 넘어 인생의 벗이며, 형제 같은 관계다. 그렇기에 꼭 그를 살리고 싶었다.
자신이 먼저 목숨을 끊었다면, 거학이 홧김에라도 진평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아아……!’
청성의 문도들은 온통 혼란스러워하거나 놀랄 뿐, 거학의 이동을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탓은 아니었다. 집중을 한다 해도 거학의 빠르기를 쫓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하물며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임에야.
거학은 선봉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오르막길로 향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마도 거학은 오르막 방향으로 멀어진 뒤, 빙 돌아서 비탈 위로 향하려는 듯했다.
물론 그 방향에 아군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끝이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제대로 죽지 못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빠르게 나아가던 거학의 신형이 한순간 멈칫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응?’
절대 이곳에서 멈칫할 일이 없는데 거학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혈이 제압당한 상태이니 기척도 파악이 안 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고개를 돌려 상황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한설연이 답답해할 때였다.
쉬익―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며 거학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가오는 느낌상, 거학의 동료는 아닌 듯했다.
‘누군가가 거학을 공격하려 하고 있어!’
슈악―
한설연의 예상대로였다. 다가오는 자를 향해 거학이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카앙!
검과 검이 마주쳤다고 생각된 순간, 거학이 상대를 향해 빠르게 검을 쑤셔 넣었다. 볼 수는 없었지만 한설연이 느끼기에 거학은 한순간에 최소한 서너 번은 검을 찌른 듯했다. 강기를 발출한 것이다.
그리고 머리 위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을 생각할 때 그 모든 공격이 무시무시한 살초인 듯했다. 거학으로서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입장이니, 상대를 서둘러 처치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슈슈슈슉―
기운을 발출해내자마자 거학이 신형을 틀며 또다시 달려 나가려 했다. 결과를 볼 것도 없다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향하려던 방향으로 뭔가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거학의 발걸음이 또다시 멈칫했다. 그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는 뜻이다.
상대는 대체 누굴까.
애초에 거학의 살초를 막아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상대가 피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는 와중에 거학에게 공격까지 가하여 그를 멈추게 하다니.
휙휙휙―
거학이 막지 않고 그 공격을 피했다. 한설연의 몸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윽고 움직임을 멈춘 거학이 상대가 있는 쪽을 향해 다시금 신형을 돌렸다.
이윽고 거학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오. 애송이인 줄 알았더니.”
상대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그러자 거학이 바로 말을 이었다.
“하긴, 아까 홍학을 상대할 때의 모습도 제법이긴 했지.”
그 순간 한설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연 공자님!’
놀라웠다.
거학을 막아선 사람이 설마 연소운이었을 줄이야.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뜩이나 홍학을 상대하던 와중에도 거학의 움직임을 눈치챘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눈빛을 보니 필사적이군? 그래, 그렇다면 내 입장에서도 확실하게 끝내주는 게 좋겠지. 나도 갈 길이 바빠서 말이야.”
“잘 생각했소. 나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그분을 데려갈 수 없을 테니까.”
의지가 가득한 한마디.
“후……!”
피식 웃은 거학이 곧바로 검을 떨쳐내었다.
샥샥―
거학의 검에서 발출된 강기가 겹쳐지며 가위 모양으로 연소운을 향해 쏘아졌다. 연소운의 쌍검에 짙은 빛무리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