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계기와 성장 (4)
마침 주변에 강시가 보이지 않아, 서백풍이 흑의인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말했다.
“제가 이렇게 되었으니 맡겨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장문께서는 좀 쉬셔야 할 듯합니다. 무리하신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동안 제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허허. 든든하구먼.”
“아직 저도 제 상태를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 장문께서 불현듯 나서셔야 할지 모릅니다.”
“겸손한 척하기는. 그 옛날 백만 대군 사이를 누볐다던 자룡, 조운 장군이 현신하면 방금 전의 자네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말이야. 내 눈엔 정말 그렇게 보였네.”
“조 장군께서 어이가 없다며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시겠군요.”
“푸허허허!”
목종림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뒤쪽에서 서백풍에게 말했다.
“그럼 자네만 믿고 푹 쉬네.”
“말씀드렸듯 저는 아직 얼떨떨하여 아직 제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고…….”
그러자 목종림이 마지막 말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초절정에 올랐다 해도, 기본적으로 자네와 연 공자는 다르지 않은가.”
서백풍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굳이 되묻지 않아도 목종림의 말뜻을 안다는 표정이었다.
곽승추 또한 목종림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목종림은 지금 전투 경험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백풍은 연소운에 비해 몇 배는 더 많은 실전을 겪었다. 그것도 신룡대의 난이도 높은 임무들을 수행하며 겪은 실전들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횟수 또한 몇 배는 더 많다.
그렇기에 상황 판단, 결단력, 대처, 임기응변, 판을 읽는 안목 등 모든 부분에서 서백풍이 연소운에 비해 뛰어날 수밖에 없다. 목종림도 그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게 바로 비슷한 경지라 해도 서백풍이 훨씬 강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단유소가 비슷한 초절정 고수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휙휙― 척!
창을 두어 차례 휘돌리며 피를 털어낸 서백풍이 꼬나 쥔 창을 사선으로 세워서 등 뒤에 위치시키며 반듯하게 섰다.
마침 서백풍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하여, 그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멋있어 보였다.
우왕좌왕하는 청성 문도들 사이로 연소운이 빠르게 다가올 때, 그의 귓전으로 진평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늦었구나.]
[그, 그것이……, 후미 쪽의 상황도 여의치 않아…….]
그러자 진평이 눈동자만 돌려서 무표정한 얼굴로 연소운을 바라보았다.
연소운이 걸음을 멈추고 움찔했다. 연소운이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곧바로 진평을 향해 다시 전음을 보냈다.
[후, 후미 쪽의 상황은 정말 좋지 않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이미 매우 지친 상태이시고 두 분 선배님들께서도 난처해하고 계십니다. 그곳에도 지원이 필요…….]
[백풍과 승추는.]
연소운의 말을 끊은 진평의 전음이 바로 다시 이어졌다.
[네가 염려해야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다소 위험해질 수는 있어도 쉽게 쓰러질 녀석들이 아니다. 이보다 더한 것도 이겨낸 녀석들이다. 네가 생각하는 대단함보다 훨씬 더 대단한 녀석들이다.]
연소운이 살짝 커진 눈으로 진평을 바라볼 때, 진평이 전음을 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해낼 녀석들이다. 그게…….]
잠시 말을 멈춘 진평이 아예 연소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상태에서 연소운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평이 전음을 이었다.
[묵룡조다.]
연소운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평이 연소운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한 방향을 향해 턱짓했다.
그곳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지가 상승한 연소운조차도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두 사람이 얽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조장 단유소였는데, 그와 얽히고 있는 자는 아까 보았던 황의 청년이 아니라 덩치가 거대한 자였다.
[그는 거학이라는 자로, 조장님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의 고수다.]
연소운의 입이 벌어졌다.
진평의 말마따나 거학이라는 자는 거대한 덩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하고 강력했다.
그러자 진평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턱짓했다. 흑의에 복면을 쓴 십여 명의 낯선 인물들이 강시로 보이는 인영을 상대하고 있었다.
‘어……?’
연소운이 자세히 보니 흑강시도, 청강시도 아니었다. 피부에 붉은빛이 도는, 처음 보는 종류의 강시였다.
그런데 그 몸놀림을 보니 자신이 여태 상대했던 강시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건 강시가 아니라 그냥 초절정 고수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해 보였다.
그나마도 청성 문도들이 피해를 덜 입고 있는 건, 흑의 복면인들이 사력을 다해 그 강시를 막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척 봐도 흑의 복면인들의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런 그들의 수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강시가 하도 강력하여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열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원래는 서른 명이 넘었다. 네가 빨리 왔더라면 저들 중에서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 저 강시를 막아야 할 사람은 너다. 그게 조장님의 명이다.]
연소운의 눈동자가 커졌다. 쌍검을 쥔 그의 양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향해 진평이 전음으로 물었다.
[왜, 두려우냐? 못 하겠느냐? 영 못 하겠다면 내가 조장님께 말씀드리마.]
그러자 연소운이 고개를 돌려 다시금 단유소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침을 꿀꺽 삼키며 대꾸했다.
[하,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막아내겠습니다.]
연소운이 양손의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게 바로……, 묵룡조니까요.]
* * *
바위 뒤의 음영에 숨어 기척을 죽인 채로 전장을 주시하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국상필(麴翔珌)로, 청성에 은거하고 있는 살수들의 우두머리였다.
‘아아……. 우리 청살의 운명도 이렇게 끝나는가?’
청살(靑殺).
명칭조차 생소한 그들이 바로 청성에 은거하고 있던 살수 집단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현재 강시화된 홍학이라는 자를 상대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청살 소속의 살수들이었다.
원래 청살의 일원들은 은신한 채로 청성과의 연계 작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계획은 거학이라는 자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거학이 자신들의 은신을 알아채고 작전을 와해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청살이 죽었지만, 즉시 산개하여 도망친 탓에 그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이후에는 장소를 이동하여 지금의 위치에서 은신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랬다가 결국 이렇게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게 나을 뻔했다…….’
수하들이 계속해서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니 국상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원래는 청살의 모든 일원들을 데리고 청살주(靑殺主)인 자신이 직접 나서려 했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던 건 수하들의 만류 때문이었다.
수하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청살의 명맥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기에 청살주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이 옳다고 했다.
본디 살수는 영웅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키워진 자들이 아니다.
기척을 죽인 채로 냉철하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상대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나서야 하는 게 살수라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청성을 위해서라 해도, 이 정도로 전황이 불리하다면 나서지 않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들도 청성의 일원들이었다.
이대로 놔뒀다간 청성 자체가 궤멸당할 게 빤했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는 저 홍학이라는 강시의 발목을 잠시라도 붙들어둘 수 있는 전력이 자신들 외에는 딱히 없었다.
나서게 된 정황적 배경이 그러했다면, 결정적인 계기는 묵룡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없었다면 끝까지 고민하다가 나서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묵룡은 그만큼 유명한 자였다.
게다가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니, 과연 그 실력이 명불허전이었다. 청성의 운명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면, 묵룡이라는 존재가 건재한 바로 지금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실력만큼은 그 어느 살수들보다 뛰어난 자들이 바로 청살 소속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기척을 감추고 암습을 하는 등 살수로서의 기본적인 역량을 모두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었다. 도가 문파인 청성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홍학이라는 저 강시 앞에서는 모든 게 소용없었다.
홍학이라는 자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맹호처럼 빠른 그의 움직임은 모든 게 무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저런 게 과연 강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모든 동작들이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물론 강시인 건 확실했다. 수하들이 무슨 수를 써서 공격해도 그의 신체에는 칼이 조금도 박히지 않았으니까.
어찌해볼 방도도 없이 순식간에 너무 많은 수하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수하들은 계속해서 쓰러져 나가고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국상필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쯤이면 되었다…….’
묵룡은 여전히 거학을 상대로 잘 싸워주고 있었지만, 냉철하게 판단하자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청성을 위해서도, 장문인 목종림과의 의리를 위해서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이 이상은 의미 없는 희생일 뿐이다.
국상필이 막 수하들을 향해 철수를 지시하려 할 때였다.
‘응……?’
갑자기 한 사람이 홍학과 수하들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매우 앳되어 보이는 청년으로, 쌍검을 들고 있는 자였다.
‘아……!’
낯익은 청년이었다.
처음에는 이곳 선봉 쪽에 있다가 장문인 목종림과 함께 후미 쪽으로 사라졌던 청년이었다.
아마도 묵룡의 수하로 예상되는 그는 유약한 인상의 청년으로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는 자였다. 줄곧 교월을 지키고 있던 수하가 훨씬 강해 보였다.
‘흐음.’
분명히 아까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그랬는데, 지금은 왠지 기세가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철수 지시는 보류하고 잠시 지켜보자.’
결정을 내린 국상필이 수하들 중 선임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신룡대원이 나섰으니 물러서서 그를 보좌하며 상황을 보세.]
[예!]
수하가 대꾸할 때쯤, 쌍검을 든 청년이 질풍처럼 홍학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익―
부드럽게, 하지만 빠르게 휘둘러진 연소운의 검이 홍학의 어깻죽지로 떨어졌다.
카앙!
연소운의 검과 홍학의 어깨가 부딪치며 그런 소리가 났다.
그 즈음에는 이미 연소운이 다른 손에 쥔 검으로 홍학의 무릎을 베어가고 있었다.
슉― 카앙!
역시나 이번에도 같은 소리가 났다.
연소운의 검이 홍학의 신체에 전혀 손상을 주지 못한 채 튕겨 나간 것이다.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던 진평의 눈빛이 깊어졌다.
초절정에 오른 연소운이니 가능성이 보이는 성과를 기대했는데 역시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 것이다.
슈아악―
몸을 숙이고 있던 연소운의 상체를 향해 홍학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연소운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낮게 도약했다.
발바닥 아래로 홍학의 검이 스쳐 지나갈 때쯤, 연소운이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홍학의 목을 때렸다.
카앙!
그 즈음, 연소운의 신형은 이미 홍학의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검이 홍학의 뒷무릎을 베어갔다.
진평이 보기에 검광이 아까보다 더 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퍼걱!
연소운의 검이 홍학의 신체에 생채기를 냈다.
청강시에 비해서 훨씬 단단한 홍학의 신체에 드디어 약간이나마 타격을 준 것이다. 홍학이 이곳에 나타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