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계기와 성장 (3)
창을 쥐고 앞으로 나서던 서백풍이 고민하던 점을 결국 연소운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소운.]
[예, 선배님.]
[가장 서백풍다운 건 뭐라고 생각하나?]
[예?]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연소운이 멈칫했다. 특유의 난처함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연소운을 보며 서백풍이 피식 웃었다.
[아니다. 어쨌거나 수고 많았다. 발전한 거 축하하고, 어서 가봐.]
말을 마친 서백풍이 몸을 풀 듯 창을 두세 차례 휘둘렀다.
쉭― 쉬익―
어느 정도 쉬어서인지 몸도 가볍고 창도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도 산다고 했다.
연소운이 없을지언정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 묵룡조에서 안 된다는 건 통하지 않는다. 되게 해야 한다.
살짝 뒤돌아보니 연소운이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가봐, 인마. 조장님한테 혼나지 말고.]
그러자 연소운이 대꾸했다.
[선배님다운 모습이라면 거침없는 시원시원함인 것 같습니다. 매사를 대하는 태도든 무공을 대하는 태도든, 저는 선배님의 그런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모습이 늘 부럽거든요. 물론 어쭙잖은 제 대답일 뿐이지만…….]
[이 자식은 형이라고 하라니까 꼭 선배, 선배…….]
거기까지 말하던 서백풍의 눈매가 갑자기 좁아졌다.
[아, 예……. 혀, 형님…….]
연소운의 대꾸조차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원시원함?
생각해보면 단유소도 그렇고 조원들도 종종 자신에게 그런 말들을 했었다.
적어도 그게 바로 내 소중한 사람들이 보는 나다운 모습이라 그건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무심코 찔러간 서백풍의 창이 청강시의 어깨를 때렸다.
퍼걱!
역시나 베지 못했지만, 서백풍은 생각에 잠긴 표정일 뿐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스윽―
청강시가 검을 이용하여 곧바로 서백풍의 목을 베어왔다. 그러나 어느새 서백풍의 창은 회수된 후였다.
카앙!
강시의 검과 서백풍의 창대가 부딪쳤다.
제법 강력한 충격이 있었지만 서백풍은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슈슈슉―
서백풍이 연달아 세 차례 창을 찔렀다.
청강시의 한쪽 어깨와 양쪽 무릎을 노린 그의 창이 연달아 청강시의 신체를 찔러갔다.
카가각!
세 번 모두 강시의 몸을 찌르지 못했다.
그 즈음에는 이미 사선으로 휘둘러진 청강시의 검이 서백풍의 목 언저리에 닿고 있었다.
쉭―
청강시의 검이 하도 빠르고 강력하여 당장에라도 서백풍의 상체가 사선으로 갈라질 듯했다.
아무리 봐도 서백풍의 상태가 이상했기에 목종림과 곽승추가 막 뭐라고 외치려던 찰나.
휙―
서백풍이 딱 반걸음 옆으로 이동하여 청강시의 검세에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또다시 청강시를 향해 창을 쑤셔 넣었다.
슈슈슈슉―
빠르게 네 차례 찔러간 검이 각각 청강시의 사지 관절을 노렸다.
카각! 가각!
서백풍의 창은 이번에도 청강시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그 시점에 목종림과 곽승추는 놀란 눈으로 서백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촉은 여전히 청강시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있고, 당사자인 서백풍은 아직까지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움직임만큼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회수된 창을 서백풍이 빠르게 휘둘렀다.
슈아악―
그 어느 때보다도 강맹한 기세를 담은 서백풍의 창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청강시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야말로 작정한 한 수 같아서, 이번에야말로 창날이 청강시의 무릎을 절단할 듯했다.
퍼걱!
그러나 이번에도 서백풍의 창은 강시의 무릎에 약간의 생채기를 냈을 뿐이었다.
‘으음…….’
목종림과 곽승추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서백풍이 연소운에 의해 자극을 받고 힘을 내려 한 모양새였기에 응원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는데, 또다시 실패한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곽승추가 고개를 갸웃했다.
‘웃어……?’
그랬다. 의외로 서백풍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평소 그가 보이는 특유의 시원한 미소였다.
곽승추가 볼 때 오늘의 서백풍은 뭔가 이상했다.
아까는 싸우는 도중에 평소답지 않은 실수를 하더니, 지금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빼어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까의 질문도 이상했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싸우다가 갑자기 웃는 지금의 모습도 이상하기만 하다.
지금 서백풍이 짓고 있는 미소는 그가 평소 소저들을 꾀어낼 때나 짓는 미소였다. 속으로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겉으로는 은은한 자신감만을 풍겨내는.
어쨌거나 방금 전의 움직임을 보니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한 듯했다.
‘형님도 나아가고 계시는군요.’
연소운은 이미 앞서 나갔고 서백풍도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론 내가 분발해야 할 차례겠네요.’
곽승추가 검을 더 힘차게 움켜쥐었다.
비록 청강시를 베지는 못했지만 서백풍은 내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무공도 결국 시전자의 성격을 닮게 되어 있거든. 상승 무공에는 그 사람의 가장 탁월한 모습이 담기게 되어 있으니, 그냥 뭘 하든 가장 서백풍다운 방식으로 해.”
단유소의 그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자 여태까지의 자신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무공을 펼치는 세세한 부분까지 너무 단유소를 따라 하려 했다. 자신이 옆에서 보고 겪는 유일한 초절정 고수가 단유소이다 보니, 그를 따라 하면 그의 길을 밟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단유소의 무공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큰 궤로 따지면 예리하고 정교한 쪽이다. 선이 짧은 편이다. 연소운 또한 그런 쪽이다. 두 사람은 성격도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창술은 정교하고 예리하다기보다는 찌르기와 휘두르기를 적절히 조화하는, 동작이 크고 선이 굵은 쪽이다. 찌르기에도 용이하고 베기에도 용이하도록 창날도 다른 창에 비해 긴 편이다.
그렇게나 큰 차이가 있는데도 주구장창 단유소의 무공 특성을 따라 하려 했었다. 단유소가 하면 모든 게 맞는 것 같아서, 자신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예전에 말했던 단유소의 조언이 어떤 의미였는지. 서백풍다운 방식으로 하라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자신다운 시원시원함으로 어떠한 탁월함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이 순간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창을 휘두르는 게 너무도 편안해졌다.
창술을 펼치는 게 다시 즐거워졌다.
처음에 무공을 배우던 당시에 설레는 마음으로 창을 집어 들었던 때처럼.
조장님은 알고 계셨던 거군요. 제가 결국 이런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점을.
서백풍이 이를 살짝 드러내고 웃었다.
쉭쉭쉭쉭쉭―
서백풍의 창날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며 연달아 청강시의 몸을 찔러갔다.
콰과과과곽!
이번에도 서백풍의 창은 단 하나도 청강시의 몸을 뚫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아까의 그 청강시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서백풍도 청강시를 베지 못하고, 청강시 또한 서백풍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지 못하다 보니, 둘 사이의 대결은 제법 길어지는 중이었다. 덕분에 청강시가 걸치고 있는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부우웅―
서백풍의 철제 장창이 수직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청강시의 어깨 어림으로 떨어져 내렸다.
퍼걱!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이번에도 청강시의 어깨는 멀쩡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모습이라면, 청강시의 몸이 휘청했다는 점이었다. 크게 휘두른 서백풍의 창에 담긴 힘을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그 순간, 서백풍이 창을 회수하더니 양손으로 창대의 중간쯤을 잡고 허공에서 빠르게 회전시켰다.
휙휙휙휙―
회전하면서 가속도가 붙은 서백풍의 창이 또다시 강시의 어깨 어림을 향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는 아까의 일격보다 훨씬 강력했다.
신형을 바로잡는 상태에서 청강시가 검을 들어 서백풍의 창대를 막았다.
카아아앙!
강력한 격돌음이 들린 순간, 강시의 검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서백풍이 손목을 비틀었다.
휘익―
우아한 곡선으로 이어진 서백풍의 창날이 청강시의 무릎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악!
청강시의 무릎에 또다시 생채기만 났다 싶은 순간, 어느새 회수된 서백풍의 장창이 청강시의 다른 쪽 무릎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슈악―
우아한 곡선에 이은 굵고 강렬한 직선.
푸욱!
그 순간, 목종림과 곽승추가 두 눈을 부릅떴다.
파고든 것이다.
서백풍의 창촉이, 드디어, 강시의 무릎 관절을.
“형님……!”
곽승추가 탄성처럼 그 말을 내뱉었다.
방금 전에 움직임이 갑자기 달라졌을 때부터 일종의 감이 오더라니, 결국 이루어낼 줄이야.
초절정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서백풍이었다.
어차피 그는 조만간 그 경지에 오를 사람이었다. 연소운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그렇지, 서백풍이야말로 당장 오늘 초절정 고수가 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력자였다.
그렇기에 지금 서백풍의 저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저 모습 하나만으로 서백풍이 초절정에 진입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성과가 드러나긴 한 것이다.
곽승추와 목종림의 눈동자가 희열로 가득해졌고, 서백풍의 미소는 여전했다.
쿵!
서백풍이 강시의 무릎에서 창을 뽑아내자 청강시가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마자 서백풍의 귓전으로 목종림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젊은 사람은 쉬어서 그런지 기운이 펄펄 나는 모양이군. 여기에 있는 노인네는 기운 딸려 죽을 것 같다네.]
서백풍이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목종림은 막 두 구의 청강시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미소 띤 얼굴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목종림의 안색은 이미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처음 후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목종림은 지쳐 있었다. 그런 몸 상태로도 이곳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또 버텼던 것이다. 장문인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으로 무리를 한 것이다.
그나마도 중간에 연소운이 활약해주지 않았다면 목종림은 이미 쓰러져도 열 번은 쓰러졌을 터였다.
목종림을 향해 씩 웃어 보이자마자 서백풍의 신형이 흔들렸다.
슈아아아―
서백풍의 몸이 목종림이 있는 곳을 향해 질풍처럼 나아갔다.
강시와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백풍이 창을 내질렀다.
슉―
장병(長兵)인 창인 만큼, 보다 먼 거리에서도 상대를 공격하기에 용이했다.
창촉이 이미 다다르고 있음에도 청강시는 반응하지 못했다.
푸욱!
청강시의 뒷무릎에 서백풍의 창이 또다시 박혔다.
그 청강시의 신형이 무너질 때쯤, 서백풍은 이미 창을 회수하며 도약한 상태였다.
서백풍이 창을 양손으로 쥔 채 허공에서 두 바퀴를 회전하더니, 그 회전력을 이용하여 그대로 또 다른 강시의 목 언저리를 베었다.
샤악―
남은 청강시의 몸이 목부터 어깨 아래까지 사선으로 갈라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
착!
바닥에 착지한 서백풍은 어느새 목종림의 앞을 가로막은 상태였다. 그의 창이 강시의 무릎을 베어가고 있었다.
서거걱―
청강시의 양 무릎이 그대로 잘렸다.
그 즈음, 흑강시들 네댓 구가 일제히 서백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은빛 창광(槍光)이 일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흑강시들 다섯 구가 눈 깜짝할 새에 청강시들의 위에 포개어지거나 땅바닥에 쓰러졌다.
‘와아……!’
곽승추가 입을 쩍 벌린 채로 감탄했다.
여태껏 서백풍이 싸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지금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흡사 폭풍이 부는 것 같았다.
평소 서백풍의 성격처럼 화려하면서도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