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14화 (114/200)

114화. 계기와 성장 (2)

‘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연소운의 위치를 확인했을 때, 그는 일곱 걸음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언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즉, 지금의 연소운이 이 공간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는 뜻.

“자네, 잠시 쉬면서 호흡을 좀 고르는 게 좋겠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목종림이 그렇게 말했다. 연소운은 이미 원래의 위치로 복귀한 후였다.

서백풍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이 상태로 싸워봐야 또 민폐만 끼칠 게 빤하니 순순히 수긍한 것이다.

뒤로 물러난 서백풍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전장을 주시했다. 사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방향은 연소운이 싸우고 있는 방향이었다.

거스름이 없이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듯,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하나의 자세들.

검을 찌르고 베는 순간의 집중력과 단호함.

설령 베지 못한 순간에도 결코 무리하지 않고 검을 회수하여 다음 수를 준비하거나, 이어지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차분함.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냉철하게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침착함.

그게 바로 서백풍의 눈에 비친 현재의 연소운이었다.

‘허어……!’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한 걸음 물러나서 보니, 싸우면서 틈틈이 확인할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적어도 지금의 연소운은 적들의 입장에서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 누구도, 어떤 강시도, 연소운이라는 벽을 넘어 전진하는 자가 없었다.

결코 과시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공간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의 존재감이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서 본인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언제든 동료들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움직임.

그리고 짧은 순간순간마다의 저 여유.

그랬다. 지금 연소운이 싸우는 방식은 조장 단유소가 싸우는 방식과 많이 닮아 있었다.

평소 연소운은 유독 단유소를 닮고 싶어 했는데, 저런 모습까지 비슷해지다니.

그런 연소운의 모습을 보는 게 새삼스럽고 신기하여, 서백풍은 모든 걸 잊고 그의 움직임 속에 빠져들었다.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후로 반각 정도가 흘렀을 때쯤, 서백풍의 시선은 더 이상 연소운의 모습을 좇고 있지 않았다. 그저 미동도 없이 그저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랄까, 당장 연소운처럼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인정을 하니, 어느 순간부턴가 마음이 편안해졌다.

생각해보면 그간 너무 조바심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에서 두 번째로 강한 자신이니만큼, 혹여 단유소의 부재 시에는 자신이 조원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며 살았다.

그렇기에 더 빨리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신의 발전이 느린 것 같아서 늘 조바심을 냈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차분히 뒤를 돌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단유소에게서 어떤 조언을 들어도, 무공의 전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늘 눈앞의 벽을 어떻게 깰 것인지에만 적용하여 생각했었다.

오만스럽게도 초절정 고수의 조언을 ‘필요한 대로만’ 해석한 것이다.

‘무인이 일류에서 절정에 오르고 절정에서 최절정에 오르는 순서는 대부분 순차적이다. 절정에 먼저 오른 무인이 대부분 최절정에도 먼저 오른다는 뜻이지. 하지만 초절정에 오르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아. 초절정의 경지가 재능과 노력, 나아가서는 경험, 경력, 연륜 등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둘만의 술자리에서 초절정의 경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단유소가 해줬던 대답이었다.

수긍은 했지만 그래도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었다. 방금 전까지도 그랬었다. 연소운을 통해 확인하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구나.

내가 오만했구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제는 인정할 때였다. 아니 이미 인정하고 있다.

자신과 달리 저 연소운은 언제나 단유소의 조언이라면 철석같이 믿었었다.

사실 단유소는 조언을 자주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간혹 해주는 조언일지언정, 연소운은 효율을 따지는 법이 없이 무조건 단유소의 조언에 맞춰서만 수련을 했고 무공을 가다듬었다. 우둔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랬다.

자신과는 달리, 연소운은 단유소의 조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마도 녀석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시간의 대부분을 그 조언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녀석이니까.

“초절정은 모방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무공에 대한,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야. 자신만의 탁월함을 갈고 닦아서 그걸 더 탁월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인위(人爲)와 무위무위(無爲)가 점점 경계를 허물면서 둘 사이에 조화가 이뤄지기 시작하지.”

이상하게도 이 순간, 그간 단유소가 해줬던 많은 말들이 또렷하게 뇌리에 되새겨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네 안의 소우주와, 우리가 살아가는 대우주가 다르지 않다는 걸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거야. 너와 네 주변의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인지되기 시작하는 거지. 그때부터 우주 속의 너를 느끼며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될 거야. 어렵지? 아직은 좀 어려울 거야. 철학적인 부분도 많이 섞여 있거든. 그래서 초절정의 경지를 깨달음의 경지라고 표현하는 거고.”

단유소의 말마따나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어려워서, 당시에는 그저 열심히 기억만 해두었던 말들이었다.

언젠가 되새겨보겠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말을 되새겨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뒤돌아보며 그 말들을 되새겨보고 있는 것이다.

“아까 탁월함에 대한 얘기를 했지? 갈고 닦아서 궁극에 이른 탁월함은 어디에서나 대단한 힘을 발휘하지. 그러나 진정한 초절정은 사실 그 탁월함을 드러내는 경지가 아니야. 오히려 그 탁월함이 자연스럽게 감춰지는 경지지.”

그때 자신이 단유소에게 대꾸했던 말도 떠올랐다.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고, 일단 지금의 자신이 뭘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었다.

그때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었다.

“네가 딱히 할 건 없어. 무공도 결국 시전자의 성격을 닮게 되어 있거든. 상승 무공에는 그 사람의 가장 탁월한 모습이 담기게 되어 있으니, 그냥 뭘 하든 가장 서백풍다운 방식으로 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 계기가 올 거고, 그러면 너는 그 경지에 오르게 되어 있어.”

서백풍다운 방식은 무엇이며, 계기란 대체 어떤 계기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적어도 지금, 둘 중에서 하나는 알 것 같다.

단유소가 말한 계기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단유소는 이따금씩 연소운의 자질에 대해 언급하곤 했었다. 연소운이 대단한 무인이 될 것이라 했다.

솔직히 나머지 조원들 중에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연소운 본인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소는 연소운에게서 그 어떠한 탁월함을 보았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단유소는 아마 묵룡조원들 중에 연소운이 가장 먼저 초절정의 경지에 진입하리라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계기라는 말을 꺼냈으리라.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고…….

이제 계기는 알겠는데, 나머지 하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가장 ‘나’다운 방식이라고?

대체 그게 뭘까.

‘나는 누구인가’와 연관되는 문제이기에 가장 어려운 화두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화두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안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서백풍다움’은 있을 것이다. 서백풍 다운 방식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단유소도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고, 자신을 가장 잘 아는 묵룡조원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던 서백풍이 눈을 뜨고 곽승추가 싸우고 있는 방향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묵룡조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곽승추였다.

[승추야, 나답다는 게 뭘까? 그러니까, 서백풍답다는 게 뭘까?]

잠시 서백풍 쪽으로 고개를 돌린 곽승추는 눈매를 찡그리고 있었다.

[거, 쉴 만큼 쉬셨으면 얼른 와서 도와주기나 하십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랑 그만하시고.]

[심각한 거야, 인마.]

[나도 지금 힘들어서 죽을 정도로 심각하거든요?]

[아, 거, 자식 진짜.]

흑의인들을 향해 몇 차례 검을 쑤셔 넣은 후, 곽승추가 전음으로 대꾸했다.

[형님다운 거라고 하면 뭐…….]

[뭐?]

[잘 놀고, 재미있고…….]

[야, 그런 거 말고, 좀 더 구체적으로.]

[구체적인 거라면 뭐……, 형님은 생각보다 훨씬 얍삽하고, 생긴 것처럼 계집질 잘하고.]

[콱, 칼 맞고 확 뒈져버려라, 그냥.]

[푸히히히!]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가지고 녀석에게 뭘 기대했단 말인가.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 같으니. 애초에 물어본 내 잘못이지.

서백풍이 눈을 감아버렸다.

그 생각을 하던 중에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조에서 두 번째로 친한 진평이었다.

진평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해줄까?

그 생각을 할 때 불쑥 곽승추의 전음이 들려왔다.

[부조장님 생각하고 계시죠? 같은 질문을 하면 부조장님은 어떻게 대꾸할까 하고.]

서백풍이 움찔하자 곽승추가 전음을 이었다.

[정곡을 찔리셨군요. 우리가 붙어 지낸 세월이 얼만데 제가 그것도 모르겠습니까. 형님이 친한 사람으로 따지면 저 다음이 바로 부조장님이니, 척하면 척이죠.]

귀, 귀신같은 놈.

그러자 곽승추가 또다시 전음을 보냈다.

[저는 부조장님이 뭐라고 대답해줄지 잘 알 것 같은데. 제가 대신 대답해드려요?]

[아냐, 아냐. 괜찮아.]

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서백풍이 극구 거절했지만 곽승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곽승추가 진평의 말투를 흉내 내어 전음을 보냈다.

[너? 너어어? 서백풍이 너로 말할 것 같으면 살면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쓰레기 같은 놈이지. 인간 말종도 너 같은 말종은 내가 살다 살다 처음 봤다는 거 아니냐. 너는 그냥 개선이 안 되는 인간 말종 쓰레기야.]

정말이지 거의 비슷하게 흉내 냈다.

[너어어, 이 자식…….]

[제가 그랬다는 게 아니잖아요. 부조장님이라면 분명히 이러셨을 거라고요. 어땠어요? 거의 비슷했죠? 푸히히히히히!]

녀석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사실 진평이라면 분명히 저렇게 말하긴 했을 것이다. 안 봐도 선하다.

서백풍이 체념한 채로 다시 눈을 감았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귓전을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서 공자, 곤란한 일이 생겼네.]

장문인 목종림의 전음이었다.

[곤란한 일이라니요?]

[단 조장이 연 공자를 호출했다는군. 선봉 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꼭 불러오라고 했다는데 이 상태에서 연 공자가 빠져버리면 우리 쪽도…….]

그 말에 서백풍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단유소라 해서 이곳의 상황을, 후미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다. 이곳이 뚫려버리면 수많은 문도들이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 전력의 핵심인 연소운을 호출했다?

조력자가 곧 도착한다는 건지, 아니면 일정한 시간 동안 버티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목종림, 곽승추 등과 함께 어떻게든 후미를 사수해야 한다는 것.

보아하니 연소운도 전달 사항을 들었는지 목종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직후, 연소운이 갑자기 평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며 눈앞에 보이는 청강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몇 구의 청강시들을 처리한 연소운이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며 짧게 목례했다.

가보겠다는 뜻.

서백풍이 창을 꼬나 쥐고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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