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계기와 성장 (1)
멈추지 않으면 청성의 문도들을 향해 강기를 발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검에서 기운이 발출되는 순간, 청성의 문도들 중에서 몇 명은 무조건 죽을 것이다. 거학의 공격에 반응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그 시간 동안 단유소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든다 해도 거학은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였다. 즉, 협박인 것이다.
결국 단유소가 멈춰 섰다.
그러자 거학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묵룡은 강하군. 백학이 왜 당했는지도 충분히 납득이 가.”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단유소가 묵묵히 거학을 응시할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서로 탐색할 만큼 탐색은 했지? 이대로라면 의미 없이 시간만 흐를 거고, 당신은 절대로 감춰둔 힘을 드러내지 않을 거고. 그런데 정작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의 숨겨둔 힘이거든.”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단유소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거학이 뭔가 위험한 것을 준비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거학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 조금 더 재미있게 가보자 그거야.”
말을 마친 거학이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그러자마자 경사면의 위쪽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단유소가 보니,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은 홍의 무복을 입은 하나의 인영이었다.
쿵!
거학이 등장할 때처럼 요란한 착지.
그런데 단유소가 보니 그에게서 산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시인 것이다.
떨어져 내린 강시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단유소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즈음 단유소의 뒤쪽에서 한 줄기 작은 음성이 들렸다.
“마, 말도 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설연이었다. 단유소처럼 그녀 또한 방금 나타난 강시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거학을 제외하면 단유소와 한설연만이 아는 얼굴.
그랬다. 그 강시는 두 사람이 초창기에 만났던 적측의 고수, 홍의 사내였다.
저들에게는 홍학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자였다.
처음에 홍학과 만났던 때를 기억한다.
그를 만났던 탓에 당시의 한설연 일행 앞에서 실력을 드러내야 했었다.
홍학은 내내 짓고 있던 여유로운 미소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감탄하여 혈천맹에 합류하라고 권했었다. 물론 그때는 그가 홍학이라 불리는지도 몰랐고 그가 속한 집단이 혈천맹인지도 몰랐지만.
백학, 황학, 거학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건 사실이지만, 원래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강자였다. 충분히 강했으나 실력을 채 발휘하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당했었다.
가슴에 검을 찔려 땅바닥에 누워서도 웃던 자였다.
죽기 직전에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결론적으로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날 이후에 일행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설연과 자신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을 정도니까.
그랬던 홍의 사내, 홍학이 저렇게 강시로 나타난 것이다.
강시가 된 홍학을 가만히 바라보던 단유소의 눈동자가 한순간, 급격하게 커졌다.
홍학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하는가 싶었는데, 그 후에 갑자기 다물고 있던 홍학의 입가가 한 차례 씰룩거리는 게 아닌가.
‘뭐, 뭐야!’
단 한 차례였고, 매우 어색했지만 그건 분명히 미소였다. 홍학이라는 사내가 짓던 특유의 미소였다.
‘이지를 상실한 게……, 아니야?’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는 법이 없고, 설령 놀랐어도 표정으로는 거의 드러내는 적이 없는 단유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놀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단유소를 향해 거학이 말했다.
“놀라는 걸 보니 눈치챘나 보군? 하긴, 당신 정도 되면 당연히 홍학의 상태에 대해서 알아챘겠지.”
“어떻게 저런 상태인 거지? 그때 내가 분명히…….”
“처치했겠지. 하지만 숨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간 어쩔 수 없이 많은 무인들, 나아가서는 고수들을 죽여왔다.
사람을 죽일 때의 기분,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많은 경험이 있기에 감각만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당시에 자신의 검은 분명히 홍학의 심장을 찔렀었다. 실수는 없었다.
“그래. 당연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 학들을 키워내려고 윗선에서도 적지 않은 투자를 했거든. 그래서 최소한의 조치 같은 게 돼 있어. 투자 대비 효용은 뽑겠다는 거지.”
단유소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거학이 말을 이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어차피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잘 안 갈 테니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말고.”
“설마 백학이라는 자도 저렇게 되었나?”
“그건 나도 몰라. 나 또한 홍학이 이렇게 되었다는 걸 엊그제 알았거든.”
말하는 걸 보니 거학은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단유소가 홍학의 상태를 면밀히 살필 때, 그의 귓전으로 한설연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단 공자님도 느꼈겠지만 홍학이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여요. 믿어지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제 예상엔……, 혈강시가 아닐까 싶어요.]
아닌 게 아니라 홍학의 피부가 전체적으로 붉은 기운을 띠고 있긴 했다. 예전에 봤기에 알 수 있다.
[혈강시?]
단유소가 처음 듣는다는 투로 되묻자 한설연이 전음으로 대꾸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먼 옛날 천마신교에서 제조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강시들 중에 최강의 강시로 표현되어 있었어요. 즉, 우리가 여태껏 상대했던 청강시들보다 더 강력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에요.]
단유소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설연의 전음이 이어졌다.
[두 분의 대화를 듣다 보니 이상해서 그러는데, 저 홍학이라는 자가 설마……, 생강시의 일종처럼 된 건가요?]
단유소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강시.
죽은 자의 신체를 이용하는 보통의 강시술과는 달리, 산 자의 신체를 이용하여 강시화시킨 존재들을 뜻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흉악한 일이다.
그런데 현재의 홍학이 그 비슷한 생태인 것이다. 이지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저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거학이 말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지금부터 벌어질 일이야. 재미가 없어졌으니 다시 재미있게 만들어야지. 알다시피 청성은 이미 포위되어 있어. 즉, 이곳의 구경꾼들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뜻이지. 비탈길 위도, 아래도 다 포위되어 있으니까.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지.”
단유소가 거학을 묵묵히 응시할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시각 이후로 홍학은 이곳의 구경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게 될 거야. 그런데 이곳에서 홍학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지. 즉, 당신이 나를 빨리 처리하고 홍학을 제압해야 한다는 뜻이야. 그러지 못했을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하기도 싫을 테니까.”
거학의 말에 청성의 문도들이 크게 동요했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벌써부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모두가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순간적인 진평의 전음이었다.
[지금은 놔둬. 청성이라면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럴 만한 저력이 있는 곳이니까. 다만,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으니 그 전에 약간의 자극은 필요하겠지. 사람을 보내서 소운을 불러오라고 해. 목 장문은 그냥 그곳에 계시고, 소운만 오라고 해.]
진평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단유소가 마치 연소운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은 보고를 받았기에 연소운의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연소운은 현재 후미 쪽에서 청강시들을 쓰러트리며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단유소에게는 자세히 알리지 않았었다. 후미 쪽을 걱정하지 말라는 정도만 얘기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단유소가 저렇게 말하고 있다는 건, 후미 쪽에 있는 연소운의 기운을 이곳에서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예전에도 조장님의 기척을 읽는 범위는 놀라울 정도로 넓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넓어지셨다는 건가.’
진평이 대꾸했다.
[하오나 소운이 빠지면 후미 쪽의 안전이…….]
[괜찮을 거야, 지금쯤이면 또 다른 해결사가 껍질을 깨고 있을 테니까.]
진평은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해결사라니,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하지만 진평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어 단유소가 지시한 바를 이행했다.
그러자 단유소의 전음이 이어졌다.
[모든 것에 우선해서 한 소저를 호위하는 것에 집중해. 적이 어떻게 나올지 여전히 알 수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조장님.]
등을 보인 상태에서 단유소가 또다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평은 단유소에게 모쪼록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누가 봐도 불리한 상항임에도 불구하고, 진평의 눈에는 왠지 단유소의 기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백풍은 답답했다.
사실, 뭔가가 보일 듯 말 듯 한 묘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건 처음 청강시를 상대한 후부터였다.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는 와중에 왠지 하나의 계단을 넘어 그 위로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까 연소운이 갑자기 신위를 보이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뭔가가 계속해서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자연스럽게 검로를 찾아가는 연소운의 검과 달리, 자신이 휘두르는 창은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고 자꾸만 어긋나거나,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안다.
이건 모두 연소운을 너무 의식한 탓이다.
알고 있기에,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부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잘만 펼쳐지던 창술이,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불편했다. 맞지 않는 작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건 무공도 무엇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님!”
문득 들려온 곽승추의 목소리에 서백풍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슈욱―
청강시가 찔러온 장창이 어느새 가슴 앞에 다다라 있었다.
서백풍이 서둘러 신형을 뒤로 빼며 자세를 급격하게 낮췄다.
그 순간 강시의 창이 길을 바꾸어 뱀처럼 서백풍을 쫓았다. 서백풍이 자신의 창을 이용해 쳐내기에 매우 애매한 방향으로 강시의 창이 날아오고 있었다.
“형님!”
“조심!”
곽승추와 목종림의 음성이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대로라면 서백풍이 창에 찔릴 게 빤했기 때문이다.
스윽―
검 한 자루가 강시의 창과 서백풍의 가슴 사이로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마치 서백풍의 가슴에 닿을 듯 끼어든 그 검은 다름 아닌 연소운의 검이었다.
카앙!
서백풍의 가슴 바로 앞에서 불꽃이 튄 찰나, 그의 정면에서 검광이 일었다.
서걱―
그리고 창을 찔러오던 청강시의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연소운이 하나의 검으로는 서백풍을 보호하고, 나머지 하나의 검으로 청강시의 팔을 잘라낸 것이다.
말로 옮기는 건 쉽지만, 찰나의 순간에 저런 수준의 쌍검술을 펼쳐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단한 경지의 쌍검술이었다. 마치 단유소가 쌍소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그보다도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