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결사 항전 (6)
단유소의 신형은 쓰러져 있는 황학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어느새 양손에 두 자루의 쌍소검을 회수한 채였다.
황학이 큰 충격을 받고 쓰러져서 정신을 잃은 상태라고는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즉,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서였다. 살려둔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나서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고수가 바로 황학이니까.
그때였다.
휙―
짧고 미세한 파공음이 들린 건, 문도들이 모여 있는 곳의 허공 위에서였다.
달려가던 단유소의 고개가 그 방향으로 홱 돌아갔다.
거대한 무언가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하나의 인영이었다. 그것도 거대한 체구의 인영이었다.
그런데 그 인영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곳이 문제였다. 바로 행렬 선두의 중심부 쪽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설연과 진평이었다.
단유소는 고민이 되었다.
지금 황학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한데 문제는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거구의 인영이 고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고수간의 싸움은 찰나의 싸움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승기를 빼앗기게 되어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한다. 방금 전에 황학이 당한 것도 방심이 원인이었으나 결국 승기를 빼앗긴 탓이었다. 그래서 본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으로 시간을 오래 끌 단유소가 아니었다. 판단도, 결단도 즉시였다.
탓!
단유소가 한 발로 강하게 땅을 밟으며 나아가던 발걸음을 즉시 멈췄다. 동시에 허공을 격하고 황학을 향해 쌍소검을 내질렀다.
슈슈슈슉―
네 줄기의 검강이 황학을 향해 날아간 순간, 결과도 확인하지 않고 단유소가 그대로 돌아서서 본진을 향해 달렸다.
쿠웅!
단유소가 채 본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인영이 바닥에 착지했다. 요란한 착지였다.
역시나 그는 거구였다. 어디에 가서도 신장으로는 꿇리지 않을 사람이 서백풍인데, 사내는 그런 서백풍보다도 머리 하나 이상 더 크게 느껴졌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덩치도 우람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검이었는데, 저걸 검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검신의 두께가 두껍고 검면(劍面, 검의 날이 아닌 넓적한 면)도 매우 넓어서 검이 아니라 흡사 철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하간 모든 게 거대한 사내였다.
거구 사내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해 그 주변은 난리가 났다. 문도들이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이리저리 물러났다.
물러나지 않은 사람은 역시 두 사람, 진평과 한설연이었다.
한설연은 알고 있었다.
거구 사내가 노리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착지하자마자 그가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어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이 어느 곳으로 피하든 거구 사내는 쫓아올 터였다.
그러면 그쪽에 있는 청성의 문도들에게 피해가 갈 것은 당연지사.
그렇기에 억지로 피하지 않은 것이다.
한설연의 앞을 진평이 가로막고 있었다. 사실 그는 거구 사내가 착지하기 전부터 이미 지금의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진평의 신장은 보통인데, 거구 사내의 앞에 서니 마치 어른 앞에 선 아이 같았다.
거구 사내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한설연의 앞을 막고 있는 진평을 향해서였다.
붕―
장난처럼 휘두른 거대한 검이 엄청난 속도로 진평을 향해 날아왔다.
진평이 막지 않고 허리와 무릎을 숙여 거구 사내의 검을 피했다. 저 검에 담긴 힘이 어느 정도일지는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에, 일단은 조심하자는 차원에서였다.
쉬이익―
머리 위로 검이 지나간 후에도 엄청난 풍압이 느껴졌다. 진평의 머리카락이 풍압에 의해 한쪽으로 쓸렸을 정도였다.
진평은 피하자마자 거구 사내를 향해 검기를 날리려 했다. 회피 이후의 반격은 당연한 수순이니까.
한데 진평은 결국 그럴 수 없었다. 거구 사내를 향해 검기를 날리기는커녕, 두 눈을 부릅뜰 뿐이었다.
슈악―
분명히 방금 전에 저 거대한 검을 피했는데, 곧바로 그 검이 반대로 방향을 바꾸어 다시금 허리 어림을 베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거대한 검을 그렇게 힘껏 휘둘렀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빨리 정반대로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고수라도 최소한의 관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인데도 저럴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괴력이라고밖에 이해할 방도가 없었다.
어쨌거나 진평으로서는 갑작스러운 공격.
가뜩이나 둔해 보이는 체구와는 상관없이 거구 사내의 공격은 매우 빠르기만 했으니 완전히 피할 도리는 없었다.
진평이 신형을 뒤로 빼며 검병을 양손으로 쥐고 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정면으로 막다가는 손아귀나 팔에 어떤 충격이 전해질지 모르니, 최대한 흘리는 식으로 막고자 함이었다.
카아앙!
“읍!”
결국 진평은 신음을 속으로 참아내지 못했다.
공격을 비스듬히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손아귀에 전해진 충격이 상상을 초월했던 탓이다.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았는데도 그랬다.
아직 진평의 손아귀에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거구 사내가 검을 찔러왔다.
슈슈슉―
거구 사내는 여전히 장난감 다루듯 저 거대한 검을 다루고 있었다. 빠르고 날카롭고 강력한 공격이 진평의 상체 세 곳을 거의 동시에 찔러왔다.
[뒤로!]
진평에게 방해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이미 확보해둔 상태에서 한설연이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듣자마자 진평이 신속하게 신형을 뒤로 뺐다.
그러자 여태껏 처음 착지했던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거구 사내의 신형이 흔들렸다.
쉭―
짧고 미세한 파공음이 들린 직후, 거구 사내는 불과 진평의 한 걸음 앞에서 또다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거대한 검이 진평의 목 언저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거구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날려버릴 정도로 그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 한 번의 움직임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었다.
거구 사내는 타고난 신력(身力, 신체의 힘)만으로 싸우는 자가 아니라, 초절정의 경지에 있는 고수인 것이다.
깜짝 놀란 진평이 부리나케 검을 들어 올릴 때였다.
카아아앙!
그런 소리와 함께 진평의 눈앞에서 불꽃이 일었다.
진평이 거구 사내의 검을 막아내기 직전에, 갑자기 나타난 다른 검 하나가 그 거대한 검을 막아낸 것이다.
두 사람의 측면에서 거구 사내의 검을 막아낸 주인공은 역시 단유소였다. 그는 어느새 쌍소검 대신 장검을 들고 있었다.
단유소가 곧바로 진평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생했다.]
단유소의 전음이 들리자 그제야 진평이 서서히 한설연 쪽으로 물러났다.
[조금만 늦으셨으면 돌아가신 아버지 뵈러 갈 뻔했습니다.]
농담조로 대꾸했지만 실상 진평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이었다.
거구 사내가 착지한 후로 그와 붙은 건 딱 네 합이었다. 순식간에 지나갔고 어찌어찌 버티기는 했지만,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아마…….’
거구 사내가 처음부터 작정했더라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왠지 거구 사내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죽이려는 느낌보다는 적당히 상대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단유소의 전음이 들려왔다.
[문도들을 더 멀리 물러나게 해. 상대가 혼자뿐이니 포위한답시고 달려드는 일은 없게 하고. 저자 말고도 강자들은 또 있으니까.]
[예.]
[한 소저 잘 지키고 있어.]
[예, 조장님.]
단유소와 진평이 짧게 전음을 주고받았을 때, 거구 사내가 검을 옆으로 눕혀 어깨에 살짝 걸치며 말했다.
“역시 즉각 반응이군. 그녀에게 위협이 될 것 같으면.”
단유소가 대꾸하지 않고 거구 사내의 눈동자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묵룡조 내에서 서백풍 다음으로 키가 큰 단유소임에도, 거구 사내의 앞에 있으니 왜소해 보이기만 했다.
단유소가 대꾸했다.
“여태껏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들여온 공이 아까워서 말이야.”
“하긴. 다름 아닌 묵룡이 호위무사라면 너무했지. 한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우리 뜻대로 될 일이 있나.”
“혈천맹이라고 했던가? 거긴 좋겠군, 초절정 고수 많아서. 덕분에 나도 고생깨나 했거든.”
“많으면 뭐 하나. 당신처럼 초절정 고수를 잡는 초절정 고수가 있어야지.”
거구 사내가 그렇게 말하더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단유소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한 자였다.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상대해본 홍학, 백학, 황학 중에서 가장 강한 자는 역시 백학이었다. 물론 방심하다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 홍학과 황학도 강하긴 했다. 그러나 백학이라는 사내만큼은 아니었다.
이 거구 사내는 어쩌면 백학 이상의 실력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방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여유와 방심은 분명히 다르다. 아마도 황학과 자신의 전투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인 건 황학과 전투를 치르면서 혼원태극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더 강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학을 상대할 때는 대라유유선공만을 운용했던 것이다.
아마도 근래에 대라유유선공의 경지가 상승하지 않았다면, 황학을 상대할 때 이미 혼원태극공을 사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유소가 살짝 고개를 돌려 황학이 쓰러져 있던 곳을 일별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황학의 신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황학은 아마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래서 끝까지 쫓아가서 숨통을 확실히 끊어 놓으려 했던 것인데.
단유소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거구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작자들 있잖아? 별 의미 없이 추켜세워 준 것뿐인데, 실제로 자신이 정말 대단한 줄로 착각하는 작자들. 어쩔 수 없이 어울려주고 있는 것뿐인데, 자신이 정말로 우리와 비슷한 급이라고 생각하는 작자들. 그도 그런 부류였어. 실력에 비해 자존심이 너무 강한 녀석이었지. 그래도 어쩌겠어?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한심해도 살리긴 살려야지.”
단유소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거구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단유소가 물었다.
“그러면 당신도 학인가?”
거구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다시 물었다.
“학은 몇 마리나 더 있지?”
“있을 만큼은 있지.”
또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인 거구 사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당신이 백학을 처치했던 건 정말 의외였어. 사실은 백학을 투입한 시점에서 정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단유소는 왠지 그 말이, 거구 사내 본인이 백학보다 더 강하다는 느낌으로 들렸다.
거구 사내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검을 떼어 서서히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그래서 당신과 꼭 붙어보고 싶었어. 우리 일원들 중에서 내가 인정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는데, 백학이 그중 하나였거든.”
단유소도 장검을 고쳐 쥘 때쯤, 거구 사내가 마지막 말을 했다.
“참고로 나는 거학(巨鶴). 잘 부탁하지, 묵룡.”
그 직후 거구 사내, 거학의 눈빛이 변했다.
쉭―
거학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싶은 순간, 그의 장검이 어느새 단유소의 목을 향해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물론 강기가 주입된 검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몸놀림이 매우 민첩하다는 사실은 아까 진평을 상대할 때도 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휙―
단유소 또한 각오하고 있었던지라 대처가 빨랐다.
거대한 검을 피했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거학의 옆구리로 이동해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옆구리를 향해 검을 쑤셔 넣었다.
슈슈슉―
거의 동시에 세 가닥의 기운이 발출되었다. 그 모든 게 강기였다.
거학이 날렵한 동작으로 몸을 비틀며 거대한 검의 검면을 앞으로 내밀었다.
카가강!
단유소가 쏘아낸 세 줄기의 강기가 너무도 쉽게 막혔다. 검면이 넓은 저 거대한 검이 순간적으로 방패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제 겨우 한두 번의 수를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단유소는 알 것 같았다.
전에 자신이 싸웠던 백학이라는 사내보다 이 거학이라는 사내가 더 까다로운 상대임을.
거학이라는 이 사내야말로 자신이 지금껏 겪어왔던 혈천맹의 모든 고수들 중에서 가장 강한 상대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