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결사 항전 (5)
서걱―
방금 뽑아 든 그의 검이 청강시의 무릎을 베었다.
쿵!
그때쯤 연소운이 앞서서 다리를 베었던 청강시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쌍검을 뽑아 든 연소운이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던 또 다른 흑강시의 장딴지를 벨 때쯤, 방금 연소운에게 수도를 휘두르던 청강시의 신형도 쓰러져 내렸다.
쿵!
그야말로 순식간에 두 구의 청강시를 처치한 것이다.
서백풍은 창을 휘두르는 것도 잊은 채 부릅뜬 눈으로 연소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 소운…….”
“연 공자…….”
서백풍의 뒤에서는 곽승추의 목소리가, 옆에서는 목종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도 놀람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서백풍은 여전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도 베지 못한 청강시의 신체를 어떻게 연소운이 벨 수 있었단 말인가.
막내인 연소운의 실력에 대해서는 조원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묵룡조에 들어왔을 때보다 많이 발전했고, 그로 인해 이제는 한 명의 당당한 신룡대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소운은 조 내에서 여전히 가장 뒤처지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연소운이 방금 두 구의 청강시를 벤 것이다. 겨우 벤 것도 아니었고 깔끔하게 베었다.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곽승추와 연소운은 모두 절정 고수였다.
경험이 많다 보니 비슷한 경지의 고수들보다 실전에서 훨씬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경지는 절정이긴 했다. 둘 다 완숙한 절정의 경지로, 곽승추는 마지막 단계쯤이었고 연소운은 그 전 단계쯤이었다.
자신과 진평은 최절정 고수로, 진평이 초중반 단계, 자신이 중후반 단계쯤이었다.
그런데 연소운이 갑자기 완숙한 최절정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소운이 여태껏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지금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이 상식선에서 도무지 납득이 되지가 않았다.
문득 예전에 단유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운이는 뛰어난 무인이 될 거야.”
단유소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자신이 볼 때 연소운은 평범한 수준이었으니까.
특히 연소운은 성격이 유약하니 뛰어난 무인이 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단유소에게 물어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녀석에게는 고유의 천재성이 있다. 그러나 특유의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 그 천재성을 단단히 감추고 있지. 사람들이 그 천재성을 못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원래대로라면 녀석의 천재성은 그저 잠재된 상태로 빛을 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우리 조에 들어온 이상, 녀석은 본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그 힘을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되겠지. 우리가 억지로 녀석의 능력을 끌어올리려 하지 않아도, 녀석의 천재성은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러나게 될 거야.’
앞에서 고개는 끄덕였었지만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단유소의 그 말을 썩 믿지는 않았었다.
그 생각을 하던 서백풍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였습니까, 조장님?
자신은 전혀 볼 수 없었던 걸 단유소는 어떻게 본 건지 참으로 신기하다. 그리고 그게 그와 자신의 격차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 순간에 연소운의 천재성이 발휘되어 매우 다행이라는 점이었다. 행렬의 후미에 생긴 전력의 공백이 연소운 덕에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놀랍고 기쁘고 대견한 한편으로 창을 쥔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근 몇 년간 무공에 관련되어 받은 자극 중에 가장 큰 자극이었으니까.
연소운은 현재 매우 생소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청강시 두 구를 완벽하게 제압한 지금도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사실, 최근 들어 계속해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에 억눌려서 모든 게 꽉 막혀 있는 느낌으로, 늘 가슴이 답답한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움직여보면 딱히 몸 상태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혹시라도 심마가 찾아온 것은 아닌가 하여 매사에 조심스러웠었다.
그렇기에 방금 전에 목종림이 위기에 처했을 때, 스스로의 의지로 나섰던 건 아니었다. 단유소의 명령 때문에 나섰던 거였다.
명령을 받은 건 목종림을 따라서 후미 쪽으로 출발할 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장문인 목종림을 지키라는 내용의 짧은 전음이었다.
그래서 나섰는데, 딱히 청강시의 팔을 베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단유소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생소한 느낌을 받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단전을 출발한 진기가 마치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검에 주입되었던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깜짝 놀랐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왠지 그 순간에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청강시의 어깨에 검이 닿는 순간, 검이 미끄러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청강시의 어깨를 벨 수 있었던 것이다.
생소한 느낌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청강시의 어깨를 베기 직전부터 체내의 진기가 단전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듯 빠르게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회전 속도가 엄청났다. 그런 식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진기가 계속해서 검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생소한 느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강시를 벨 즈음에 갑자기 시야가 환해진 느낌을 받았다. 밝아졌다고 하기보다는 범위가 넓어졌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전까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그 순간부터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 나아가서는 인지되는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집중해서 신경을 기울여야만 보이고 인식되던 것들이 이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식되었다. 미세한 소리나 바람의 흐름, 그리고 공간 안에 있는 기의 흐름 같은 모든 것들이 감각의 영역에 알아서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그렇게 연소운은 처음 접해보는 희열 속에 몸을 맡겼다.
점점 지친 기색을 보여가던 청심대원들의 표정이 다시 생기를 찾아갔고, 청강시에게 당할 뻔했다가 가슴을 쓸어내렸던 목종림도 호흡을 고르며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캉! 카강! 펑! 콰앙!
단유소와 황학 사이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그런 소리들이 들렸다. 다시 격돌한 두 사람은 그야말로 맹렬하게 얽혔다.
초반에 기세를 잡고 상처까지 입힌 쪽은 단유소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 간의 전투는 팽팽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단유소의 빠르기와 날카로움은 여전했으나 상대인 황학 쪽이 분발한 영향이 컸다. 황학의 기세와 빠르기는 그야말로 범 같았고 움직임과 임기응변은 여우같았다.
단유소가 초반의 승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모양새이다 보니 청성 문도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염려가 담겨 있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단유소에게 걸려 있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한설연과 진평 단 두 명이었다. 어떤 의도에서든 단유소가 힘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알고 있는 탓이었다.
[짧게 보고드립니다. 후미 쪽의 상황은 당분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진평의 전음이 들렸을 때, 단유소의 쌍소검에서 각각 세 가닥씩의 검강이 발출되었다. 여섯 줄기의 검강이 황학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날아갔다.
황학의 양손에 단단한 기운이 결집되었다. 그 순간 그의 손바닥이 가장 먼저 날아오는 두 가닥의 검강을 쳐냈다.
카강!
동시에 황학이 몸을 비틀며 나머지 검강들을 피하려 했다. 두 가닥의 검강이 그를 피해 가고 마지막 두 가닥의 검강이 다다른 순간, 그의 신형이 휘청했다.
단유소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유인책이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절묘했고, 또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그럴싸했지만, 저건 황학의 실수가 아니었다. 일부러 틈을 보인 것이다.
황학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작정한 것이다. 승부를 내기 위해서.
전투가 이런 식으로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본인이라는 사실을 그도 아는 것이다. 그는 작지 않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본인의 병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단유소는 황학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표정을 한 채였다.
그렇게 거리가 가까워지던 찰나, 황학이 구부정한 자세에서 단유소가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연달아 양 주먹을 내질렀다. 그 모습이 꼭 위기에 몰려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슈슈슈슈슈슈슉―
권풍이 단유소의 요혈을 노리고 매섭게 날아왔다. 모든 권풍이 주먹만 한 강기들이었다.
퍼버버벙!
단유소가 그 공격을 더러는 흘리고 더러는 막아내며 거리를 더욱 좁혔다. 그쯤에는 이미 열 가닥의 지풍이 단유소의 정면에 다다라 있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미세한 시간 차를 두고 황학이 또다시 열 가닥의 지풍을 발출해낸 것이다.
총 스무 가닥의 지풍이 모든 방향을 점하며 단유소를 압박해왔다. 물론 그 모든 지풍이 강기였고, 여태껏 상대하던 강기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강력했다.
황학은 그야말로 대단한 공격들을 짧은 시간에 퍼부은 것이다.
단유소의 발이 빠르게 보법을 밟았다.
동시에 그의 쌍소검이 만들어낸 검광이 허공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바방!
이를 악문 채로 버거운 척하며 그 많은 공격들을 막거나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실상 단유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유인책임을 알고 들어왔다.
이 엄청난 공격의 뒤에 분명히 그가 노리는 최후의 한 수가 있을 터였다.
황학이 생각하고 있는 최후의 한 수를 어떻게 받아넘기느냐가 중요하다.
그 순간을 역으로 노려 황학을 처치해야 한다.
황학과의 전투를 빨리 끝내야 혹시 모를 또 다른 위협에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그의 유인책에 일부러 어울려주고 있는 거니까.
단유소가 공격을 거의 다 막아갈 때쯤이었다.
그의 등 뒤를 향해 뭔가가 소리도 없이 날아왔다.
그것은 황학이 가지고 있던 도(刀)였다. 어깨에 상처를 입어 결국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도였다.
실상 그게 바로 황학이 공들여 준비한 한 수였다.
황학은 끝까지 묵룡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자신이 이기어도의 수법을 이용하여 은밀하게 뒤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강력한 진기가 계속해서 폭발하게 하여 날아오는 도의 기척을 최대한 감춰야 했다.
이윽고 도가 묵룡의 등 뒤에 도달했다.
묵룡은 아직도 그 공격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학은 끝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방심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탓이다.
이윽고 도가 막 묵룡의 등에 닿는다고 생각된 순간, 묵룡의 신형이 흔들렸다.
묵룡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한 황학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마지막 순간에 본 검광의 궤적이 허공으로 향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황학은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허공에 묵룡은 없고,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드는 두 자루의 이기어검만 있었던 탓이다.
황학의 고개가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이미 묵룡의 발바닥이 자신의 복부에 닿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에 무방비였다.
퍼어억!
“커흑!”
반으로 접힌 황학의 몸이 강하게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터억! 털썩―
경사면의 바위에 부딪친 황학의 신형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며 축 늘어졌다.
“와아아아!”
청성의 문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