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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104화 (104/200)

104화. 백리가의 비밀 (2)

잠시 침묵이 이어질 때 제갈윤이 말했다.

“미인이었겠군요.”

“후.”

백리우가 피식 웃었다.

소주는 예로부터 운하로 유명한 도시였다. 그 외에도 소주는 아름다운 정원, 정교하고 질 좋은 비단 그리고 미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제갈윤이 미인 얘기를 꺼낸 것이고, 백리우가 그걸 알아듣고 웃은 것이다.

“맞아. 그녀를 미워하는 내 감정을 떠나서, 건강했다면 정말 미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초췌한 모습인데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제갈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 백리우가 말했다.

“아버지 뒤에 있는 나를 향해 힘겹게 인사를 건네는 와중에도 표정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더라. 내가 누군지 금방 알아본 거지. 그녀의 인사를 받지는 않았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차마 그럴 수는 없더구나. 표정 없이 그녀를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던 중에,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셨다. 밖에서 누군가 아버지를 찾았거든. 그러다 보니 방 안에는 그녀와 나만 남았는데 정말, 너무나도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었다. 나는 말없이 딴청을 피우고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그녀가 힘겨운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뱉어내더구나. 미안하다고.”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지. 쭉 들어보니 그녀는 아버지가 무림인이라는 정도만 알 뿐, 맹주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더라. 아버지가 스스로를 그저 작은 장원의 장주쯤으로 소개했던 모양이야. 장주님이라고 부르더라고.”

“백부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스스로를 감출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내내 불편했지만 거기까지는 어찌어찌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잠시 후면 안 볼 사람이니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갑자기 표익이 방으로 들어와서 보고하더구나. 아버지가 급한 일 때문에 잠시 무림맹 강소지부에 다녀오신다고 나가셨다는 거야. 그런데 마침 그때, 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설마…….”

“표익이 전음으로 그러더라. 병세가 너무 악화돼서 이미 모든 의원들이 포기한 상태라고. 편하게 보내주는 것 외에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고. 네 짐작처럼 그녀는 그로부터 일각 후에 죽었다.”

“아…….”

그 즈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백리우가 신형을 돌려 제갈윤을 바라보았다. 백리우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운명을 달리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표익이 사내아이를 한 명 데리고 오더라. 일곱 살 난 꼬마였다. 그녀의 아들이었지. 그녀는 그 아이의 손을 붙들고 울며 죽었다.”

“하면 그 꼬마가 혹시…….”

“응. 지금의 묵룡이지. 그녀의 아들이자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니, 내게는 이복동생이고.”

“허어……!”

제갈윤이 놀람 가득한 음성을 내뱉자 백리우가 말했다.

“뭘 더 따져보고 말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아이가 백리가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보는 순간 알았다. 우리 아버지와 많이 닮았거든. 어쩌면 나보다 더…….”

“그랬군요…….”

묵룡 단유소가 전 맹주의 숨겨진 아들이자 현 맹주의 이복동생이었다니.

묵룡이 백리가의 핏줄이었다니.

그간 백리우와 묵룡이 서로 어떤 관계일지에 대해 혼자서 수많은 예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예상들 중에서 맞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건 완전히 의외였다.

그리고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백리우가 왜 유독 묵룡의 일에 그토록 지대한 관심을 보였었는지. 왜 오룡 중에서 묵룡만을 그토록 편애하다시피 아꼈는지. 묵룡이 위험해질 만한 상황이면 왜 어떻게 해서든 도우려 하거나 직접 나서려 했는지.

물론 신룡대가 철저하게 맹주 직속의 기밀 임무 수행 단체다 보니 백리우의 그러한 편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조에 속한 신룡대원들 중에는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로 파악한 자들도 간혹 있겠지만 그조차도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묵룡은 언제나 최고였으니까.

그는 실력 하나만으로도 모든 잡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존재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제갈윤은 이어질 백리우의 이야기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백리우가 다시 신형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창문으로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와 백리우의 가슴께를 비추는 가운데 그가 입을 열었다.

“죽기 직전에,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울면서 그녀가 그러더라. 아이는 죄가 없으니 미워하지 말아달라나.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참고 있던 화가 치솟는 거야. 그래서 처음으로 그녀 앞에서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착각하지 말라고 했다. 당신의 위치를 생각하라고 했지. 어디서 감히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했다. 여전히 내 분노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으니 이 시간 이후로 내가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동안 으르렁거렸지. 협박하듯이.”

말을 마친 백리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말을 끝내자마자 후회가 되더구나. 곧 죽을 사람 앞에서 굳이 왜 그랬을까. 더군다나 아이가 듣는 앞에서 왜 그랬을까. 아이도 다 기억할 나이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어. 그래서 아직도 그 아이를 보면 너무 미안해. 그때 일이 생각나서.”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우 본인이 얘기했듯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백리우가 왜 그랬는지, 그 심정만큼은 충분이 이해가 갔다.

백리우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남의 혈육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자신의 혈육을 챙기려 한 꼴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을 보호하고 싶었을 여인의 심정 또한 당연히 이해한다. 그 상황에서는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할 테니까.

안타깝게도 그때는 백리우와 그녀의 관계가 모든 면에서 어긋나 있었던 탓일 뿐이다.

“장례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돌아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사람이 나와 표익, 그리고 그 아이뿐이었거든.”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때의 어린 묵룡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결국 백리우는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야말로 백리우 본연의 모습이었다.

그는 약자에게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백리우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좋아하는 것이고.

백리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셋이서 치른 조촐한……, 아니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장례식 중에도, 장례가 끝난 후에도 그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바쁘셨나 보군요. 백부님이 그런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나 몰라라 하실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그 말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무림맹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던 모양이더라. 어쨌거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표익이 내게 그러더구나. 바쁘면 가보시라고.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는 아버지에게서 다른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그 집에 머물러야 한다더군.”

“지금 형님이 묵룡을 그토록 아끼는 걸 보면 결국 형님도 그때 그 집에 남았다는 말씀일 텐데…….”

“결국 그리 되었지.”

“그 이유가 이해가 안 갑니다. 어차피 장례식까지 봐줬으면 형님도 인도적 차원에서의 역할은 다한 셈이잖아요. 게다가 당분간은 표 호위가 남기로 했고, 그 후에는 백부께서 어떤 식으로든 그 아이의 살길은 챙겨주려 하셨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형님의 입장에서는 굳이 남을 필요가 없었지요. 그럼에도 남은 걸 보면 아마도 당시의 형님에게 어떠한 다른 이유가 있었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자 백리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저도 모르게 이렇게 됐네요. 수십 년간 형님 밑에서 하도 구르다 보니까.”

“야!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다.”

“허! 마치 제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백리우가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볼 때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위치가 있다면 네 형이라는 위치일 거야.”

“허……!”

제갈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때 형님의 가장 대단한 점은 가해자면서 피해자인 척을 정말 잘한다는 거예요.”

백리우도 웃었고 제갈윤도 웃었다.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도 중간에 어떻게 해서든 이런 식으로 농담을 주고받는 게 두 사람이었다.

“네 말대로 나는 그 아이 때문에 남은 게 아니었다. 그 아이가 싫었지. 실제로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나는 그 아이를 냉대했었다.”

“그러면 왜……?”

“내가 남은 건 표익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표익도 청년이었는데, 세가의 무인들 중에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실력도 뛰어나고 수완도 좋고 성격도 좋아서, 세가 내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거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표익과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던 터라, 그와 친분을 쌓을까 하고 남았던 거였다. 그래. 처음에는 분명히 그 이유였어.”

“하지만 곧, 어린 묵룡의 무언가가 형님의 관심을 잡아끌었겠군요.”

그 말에 백리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한 아이였다.”

잠시 허공을 보며 뭔가를 회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 울지를 않더구나. 어미가 울면서 죽어가는데도 그 아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후로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에도, 어미를 묻고 난 후에도, 단 한 번도 울지를 않았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조용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제갈윤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의 묵룡은 일곱 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곁에서 지켜보던 나도 놀랐다. 사실, 처음에는 아직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이는 분명히 슬퍼하고 있었어. 울지만 않았을 뿐.”

“허어…….”

“그 후에 그 집에서 지내면서 더 놀랐다. 장례가 끝난 후에도 그 아이는 뭐든 혼자 알아서 척척 하더구나. 제 어미가 남긴 물품들도 알아서 정리하고, 청소나 빨래도 알아서 하고, 때 되면 내가 먹을 식사도 차려 오고 차도 내어 오더구나. 먹어보니 식사도 먹을 만하고 차도 마실 만했다. 청소, 빨래, 식사, 차 할 것 없이 그 어느 하나도 어설프지가 않았다. 그 어린 아이가 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만큼.”

“어미가 병상에 있을 때부터 그런 일들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렇다 해도, 어른이 봤을 때도 어설프지 않았을 정도면 보통이 아니었군요. 배워서 그렇게 한 것이면 습득이 매우 뛰어나다는 뜻이고, 배우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면 눈썰미와 감각이 남다르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 말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나도 너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내가 한동안 계속해서 그 아이를 냉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최선을 다해서 늘 예의를 갖추더구나. 이제 겨우 일곱 살인 꼬마가 말이다. 오히려 어른인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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