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백리가의 비밀 (1)
“하……!”
제갈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곧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한 채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 밤에 어딜 가시겠다고요?”
“청성.”
제갈윤의 물음에 대꾸한 이는 무림맹주 백리우였다.
막, 청성에서 두 번째 전서가 날아온 시점이었다.
첫 번째 전서는 지원 요청이었고, 두 번째 전서는 청성산이 불에 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금 전에 제갈윤이 두 번째 전서의 내용을 보고하자마자 백리우가 청성에 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 안 걸릴 거야. 내일 점심쯤에는 반드시 돌아올게. 그러니 허락해줘라. 왠지 느낌이 불길해서 그래.”
제갈윤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 또 이렇다.
백리우는 현재 청성에 묵룡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청성에서 날아온 전서에 묵룡조의 신원 조회 요청이 있었고, 그걸 백리우에게 보고한 게 자신이니까.
고로 지금 백리우가 불길하다고 말하는 건, 묵룡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겠다는 것이다.
제갈윤이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안 됩니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러자 백리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윤아……!”
“맹에서는 이미 청성을 돕기 위해 천무단을 투입했습니다. 천무단 중에서도 정예들을 투입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신룡대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지원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미 무리할 정도로 지원을 한 겁니다.”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형님이라 해도 이곳에서 지금 출발하면 새벽녘에나 도착할 겁니다. 표 호위도 형님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할 테니 결국 형님 혼자 그곳에 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더 안 됩니다. 결정적으로 그 시점이면 어떤 방식으로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상황이 종료되었다면 바로 다시 돌아올게. 하지만 여전히 싸우는 중이라면 내가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잖아.”
“그조차도 형님이 전력으로 달렸을 경우에나 가능한 도착 시간인데, 그러면 형님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일 겁니다. 그런 몸 상태로 큰 도움이 될 리 없습니다. 안 됩니다.”
마지막 순간에 제갈윤은 눈까지 똑바로 떠가며 확실하게 뜻을 전했다.
그런 제갈윤을 잠시 응시하던 백리우가 말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예. 알고 있습니다. 형님은 지금 청성을 구하기 위해서 가시려는 게 아니지요. ‘그’ 때문에 가시려는 거지요. 그래서 더 안 된다는 겁니다.”
“윤아……!”
“제아무리 그 대단한 묵룡이라 해도 맹에 소속된 무인 중 한 명일 뿐입니다. 그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 중요한 시점에, 맹의 주인이자 백도 무림의 구심점이 직접 움직인다고요? 그것도 혼자서 위험을 무릅쓰고서요? 안 됩니다. 형님도 제가 왜 반대하는지 아실 겁니다. 이건 상식선의 문제입니다.”
제갈윤이 그렇게 말한 후, 백리우에게서 돌아섰다.
제갈윤이 막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뒤에서 백리우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너는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도 알고.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옳은 말을 해줘서 더 고맙고. 그래서 내가 너를 믿는 거고.”
제갈윤이 동작을 멈췄다.
“너한테 그 아이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던 데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의 부끄러움 때문이었고 우리 집안의 치부이기 때문이었을 뿐……. 그러나 이제는 너를 납득시켜야 할 시점이 온 듯하구나.”
제갈윤이 뒤로 돌아섰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런 얘기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잖습니까. 형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백리우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제갈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 보인 백리우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창가로 향했다.
창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서서 등을 보인 채로 백리우가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지켜봐 왔으니 너도 한 번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을 거야. 아버지를 대하던 내 태도가 어느 순간부터 돌변했었다는 걸.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우의 부친이자 전대 무림맹주인 백리인(百里仁)은 모든 이들에게 온화했지만, 아들인 백리우에게는 상당히 엄격했었다.
아들이라고는 백리우뿐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림맹주의 아들이다 보니 백리우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면 그게 고스란히 맹주에게 욕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엄격한 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백리우도 그의 부친을 어려워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부친을 미워한다거나, 의도적으로 피하려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잘 따랐었다.
그랬던 백리우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변했다.
어지간하면 부친을 피하려 했고, 실제로 부친을 대할 때가 있어도 무뚝뚝했다. 부친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도 인상을 굳히기 일쑤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청년기의 백리우는 그랬었다.
엄격한 아버지의 아래에서 자란 아들들이 머리가 크면 종종 그런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당시에 백리우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도 답해주지 않기에 그냥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는 결정적으로…….’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 생각을 하던 제갈윤이 이윽고 대꾸했다.
“백모(伯母, 큰어머니)님께서 많이 편찮아지셨을 때부터였지요. 돌아가신 이후에는 더욱 그랬었고요.”
그 말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우리 어머니 말이야. 지병 악화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예에?”
되묻는 제갈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리우의 모친이자 백리인의 부인은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백리우와 매우 친한 자신뿐만 아니라 이 강호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물론 지병의 영향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울화였어. 그래,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지.”
제갈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화, 화병이라니…….”
“아버지 때문이었다. 강호에서는 정의를 추구하는 협객인 척하고, 지인들 사이에서는 성인군자인 척하고, 가족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 훌륭한 가장인 척하던 우리 아버지가……”
잠시 말을 멈췄던 백리우가 잠시 후에 말을 이었다.
“실제로는 불륜을 저질렀던 거야.”
제갈윤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그, 그럴 리가요. 배, 백부(伯父, 큰아버지)께서는 결코 그러실 분이……!”
제갈윤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백부라고 부르던 백리인은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온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음 깊이 따랐던 인물이었다.
백리인은 광명정대한 사람이자 훌륭한 맹주였다.
백리우의 조부인 백리극(百里剋)이 무림맹의 중흥기를 열었다면, 백리인은 강해진 무림맹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인자하게 대해주던 백부이기도 했다.
제갈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백리우가 허탈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대꾸했다.
“나도 믿을 수가 없었지. 그러나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결국 인정하셨거든.”
“허……!”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까.
워낙 존경했던 백부였던 탓에 실망감과 함께 약간의 배신감도 느껴졌다. 조카인 자신이 이럴진대, 아들인 백리우는 오죽했을까.
“아버지가 생각보다 일찍 맹주직을 내려놓고 은거에 들어간 것도 결국 그 일 때문이었다. 이 내막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최측근 몇 명뿐이다. 표익도 알고 있고, 제갈 숙부도 알고 계시지.”
제갈윤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커졌다. 자신의 아버지도 알고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하긴, 자신의 아버지 또한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상직을 일찍 내려놓았다. 전대 맹주였던 백리인과 함께였다. 그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 내가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였다. 아직은 아버지가 맹주였을 때였지. 남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때까지도 나와 아버지 사이는 냉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서 그러시더구나. 가볼 데가 있으니 따라나서라고. 나는 당연히 싫다고 했지.”
백리우가 바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평생 내 일에 이래라저래라 관여하지 않을 테니, 딱 한 번만 따라나서 달라고.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결국은 따라나섰지. 어디에 가는 건지 여쭤봐도, 가보면 안다고만 하시더라. 그렇게 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강소에 있는 소주였다. 소주 외곽에 있는, 마당이 넓고 깨끗한 집이었지.”
소주(蘇州).
절강의 항주와 함께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이다.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은 유명하다. 그만큼 소주와 항주가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이다.
“대문을 열고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지금의 표익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표익은 내 수호위가 아니었을 때였지. 어쨌거나 그를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그곳에 누가 사는지를 내게 알려주지 않았지.”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안방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탕약 냄새가 진동을 하더구나. 대체 누구기에 아버지가 직접 이렇게 문병까지 온 건지 궁금했다. 어쨌거나 안방으로 들어서니 그 안에 깡마르고 창백한 인상의 한 여인이 누워 있더구나.”
살짝 한숨을 내쉰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젊은 여인이었다. 병색이 완연하고 생기가 없어서 정확한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삼십 대 초반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방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를 보자마자, 힘이 없던 눈동자에 그나마 생기가 돌아오더구나. 그걸 보고 직감했지.”
“그 여인이 바로…….”
“응. 아버지의 그녀였던 거지.”
제갈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약간 침묵하다가 백리우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언제든지 그녀를 만나게 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된 건 아버지 탓이기도 하지만 그녀 탓이기도 하니까. 그러던 차에 직접 보게 되니 역시나 그녀가 밉더구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구나. 그런데 막상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 내 속내를 도무지 겉으로 내색할 수가 없더라.”
제갈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쯤에 내가 받았던 느낌을 그녀도 풍기고 있었다. 그래. 그녀에게 드리워진 건 죽음의 그림자였던 거야. 짧으면 하루 이틀, 길어야 사나흘 안에 생이 끝날 게 확실해 보이는 사람이 주는, 바로 그 느낌이었지. 아무리 미워도 그런 사람한테 대고 무슨 분노를 표출해. 어떻게 대가를 치르게 해. 살짝 당기기만 해도 끊어질 것만 같은 그 실낱같은 영혼에 대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백리우의 말을 들으며 제갈윤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백리우라면.
그 전까지 아무리 증오했어도, 아무리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해도, 그런 상태에 있는 상대에게까지 기어이 대가를 치르게 할 정도로 모진 사람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