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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102화 (102/200)

102화. 생사 대립 (10)

목종림에게서 한참이나 대꾸가 없었지만 한설연도 더 이상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방금 전에 슬픈 일을 겪은 상황에서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목종림의 입이 열렸다.

“온 산이 불탔고 이미 많은 제자들이 죽고 다쳤네. 믿었던 사람들이 변절을 했고, 여전히 변절자들은 남아 있겠지. 수백 년 만에 강시가 등장했으며, 심지어는 내가 아끼던 제자마저도 강시가 되어 돌아왔네.”

한설연이 조용히 목종림을 바라볼 때, 그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적들이 얼마나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할 수 없지. 지금의 청성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일세.”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목종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청성의 저력을 믿네.”

목종림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그의 말인즉 청성에 남아서 방어전을 펼치겠다는 뜻.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일 때, 목종림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자네들을 믿네.”

목종림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직은 슬픔이 가시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목종림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충격을 받았고 슬픈 일을 겪었으니 감정에 휘둘릴 법도 한데, 이 순간의 그는 차분했다. 심사숙고를 한 후에 내린 결정인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험한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어쩌면 청성을 지켜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지도자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청성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는 셈이니까.

한설연도 목종림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목종림의 선택이 성공할 경우에는 청성이 얻는 이득도 더 커진다.

전투가 끝난 후에 보다 빠른 사태 수습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득이지만, 가장 큰 이득은 청성의 이름을 온 강호에 드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은 청성의 문도들은 누구보다도 뿌듯한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얻어 낸 자부심은 오랫동안 청성의 큰 자산으로 남아, 청성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 것이다.

한설연이 말했다.

“낮에 청성을 둘러본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런 상황에서 지키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가 있었어요.”

“어디인가?”

한설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상청궁(上淸宮)이에요.”

상청궁은 청성산의 정상에 위치한 곳이다. 유서가 깊은 곳인 만큼 청성에서도 가장 의미가 깊은 곳이다.

산의 정상이기에 그곳이 함락되면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다. 배수의 진인 셈이다.

“상청궁이라…….”

“암석 지대를 통과해야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어요. 적의 화공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죠. 게다가 그곳은 삼면이 바위 절벽이에요. 한 방향은 경사가 가파른 절벽이고 두 방향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죠. 제가 절벽들을 자세히 보니 쉽사리 암벽을 타고 오르기는 힘들 정도의 높이였어요. 물론 고수들이야 마음만 먹으면 금세 오를 수 있겠지만…….”

한설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

“바위의 질도 단단하여 일정 수준 이하의 적들은 아예 절벽을 오르지도 못할 거예요. 정상으로 향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지키고 삼면의 절벽에 적절한 방어 인력을 배치한다면 매우 효과적으로 적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문도들도 훨씬 안전해질 수 있겠죠.”

목종림이 생각하기에도 이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현실적일 것 같았다. 이곳의 모든 것을 다 지켜낼 수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역시 교월이라는 건가?’

단유소 일행이 낮에 상청궁에 들른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연은 그 짧은 시간에 절벽의 특성과 암석의 질까지 파악한 것이다.

목종림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소저의 뜻대로 하겠네.”

그렇게 말한 목종림이 품속에서 작고 길쭉한 무언가를 꺼내었다. 한설연이 보니 그것은 옥으로 만든 예쁜 피리였다. 피리는 새끼손까락처럼 얇았고 길이는 어른 손바닥보다 작았다.

목종림이 그것을 가져다가 입에 대었다. 그러더니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 휘이이― 휘이이이― 휘이이―

음률 같기도 하고 소음 같기도 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한동안 청성에 울려 퍼졌다.

보아하니 청성의 제자들도 목종림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이런 시점에 왜 피리를 불고 있는지 의아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이윽고 목종림이 피리 불기를 멈추고 그것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한설연이 전음으로 물었다.

[혹시 장문 어른만이 쓸 수 있다는 그 힘을 불러내는 신호인지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목종림이 전음으로 한설연에게 되물었다.

[한 소저는 청성파의 태동에 대해서 아는가?]

[대강은 알고 있어요. 이 청성산의 정기가 하도 좋아, 원래는 순수한 구도자들이 산의 이곳저곳에서 수행을 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한때 살수 문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 후에야 정통 무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그들을 밀어내고 지금의 청성파가 태동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한 소저는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군.]

한설연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자 목종림이 대꾸했다.

[한 소저의 말이 맞네. 청성파가 자리 잡으면서 살수 문파는 사라지고 구도자들과 무도를 추구하는 사람들만 남았지. 그리고 지금도 청성에는 순수하게 도를 추구하며 수행하는 구도자들이 남아 있다네. 그들 또한 우리 청성의 문도지.]

[들어서 알고 있어요.]

[문도는 문도이되 그들은 문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네. 문파에 뭔가를 바라지도 않지. 따로 무리를 형성하여 인적이 드문 곳에서 조용히 수행만 할 뿐이네. 우리 청성은 그들이 수행할 여건을 최대한 보장하고 있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네. 하지만 그 안에는 비화가 있지.]

목종림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

[아까 잠시 언급되었던 살수 문파는 자연스럽게 밀려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흡수된 것이네. 수행하는 문도들 사이에 지금도 섞여 있지. 우리 제자들도 모르고, 함께 수행하고 있는 구도자들도 그 사실을 모르네. 심지어는 포 사숙도 모르시지. 청성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인 그들과 장문인인 나뿐일세.]

한설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즉, 청성파의 장문인만이 쓸 수 있는 힘이란 그 살수들의 힘이라는 뜻이었다.

목종림의 전음이 이어졌다.

[백도와 살수는 얼핏 어울리지 않지만 사실이 그러하네. 그들은 암기는 쓰되 독은 사용하지 않는 살수들이네. 나중에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흑도의 살수들과는 그 성질이 약간 다르다네.]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한설연이 바로 되물었다.

[놀랐어요. 청성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다니. 하지만 그건 문파의 극비 사항이잖아요. 그런 말씀을 저한테 하셔도 되는 건지요?]

그러자 목종림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아까도 말했잖은가. 나는 자네들을 믿는다고.]

[아, 아무리 그렇다 하셔도…….]

[이 밤에 청성의 명운이 걸려 있네. 그 상황에서 한 소저는 청성의 군사를 맡고 있지. 군사라면 응당 전력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에 한설연이 목종림을 향해 공손히 읍했다.

청성의 비밀을 듣고 난 지금,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예전에는 이것저것 많이 알기 위해 노력했었다. 아무리 비밀이라 할지라도 궁금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려 애썼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밀을 많이 안다는 것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유소와 함께하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어쨌거나 이미 알게 된 비밀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처신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들은 앞으로도 청성의 감춰진 힘으로 계속 남아야 하네. 그러니 복면을 쓰고 등장할 걸세. 물론 그들이 살수라는 건 금세 드러나겠지. 그래서 그들은 과거에 내게 은혜를 입었던 자들로 포장될 걸세. 내가 다급하여 미리 도움을 청했다고 할 것이고.]

[알겠습니다.]

바람이 더욱 차가워진 가운데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설연의 귓전으로 진평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소저! 조심하십시오. 지붕의 음영이 드리운 곳에 은신하고 있는 실력자가 있습니다. 보통이 아닌 듯하니 언제든 제가 있는 쪽으로 피할 준비를 하십시오.]

한설연이 보니 목종림이 지붕의 그늘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숨어 있는 건 아마도 살수들의 수장이거나 전령일 것이다. 진평이 파악한 실력자도 바로 그일 것이다. 목종림은 그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은신하고 있는 자가 실제로는 조력자라는 말을 진평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해줄 수는 없었다. 비밀이니까.

[주의하고 있을게요, 진 공자님.]

그렇게 대답해준 후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목종림이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전음으로 말했다.

[지금 그들의 전령이 근처에서 대기 중이네. 그들에게도 우리의 계획을 얘기해주었네.]

[예, 장문 어른.]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텐데 어떤 식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나? 문도들 모두에게 그곳으로 향하라고 지시를 내릴까? 아직도 변절자들이 있을 테니 어찌하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군.]

그러자 한설연이 곧바로 대꾸했다.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다는 투였다.

[일단은 한곳에 뭉쳐서 함께 이동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마침 이곳이 중심이니 이곳으로 모이도록 하는 게 좋겠지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장문께서 직접 명하시면 될 것 같고요. 다만, 우리가 상청궁으로 향할 계획이라는 건 모두가 모인 직후에 말씀하시는 게 좋겠어요. 모인 후에는 지체하지 말고 이동해야 하고요.]

목종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전음을 이었다.

[이 상황에서 변절자를 추려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들을 안고 가면서 상황에 맞춰서 대처를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들이 언제 어느 순간에 등 뒤에 비수를 꽂을지 모르니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할 거예요.]

[알겠네.]

[그리고 살수들은 상청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매복시키는 게 좋겠어요. 그 후에 상청궁 위로 올라가면 매복하고 있던 그들이 적을 공격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이 우리의 조력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겠죠. 그때 그들 중에서 정예 몇 명을 추려, 혹시 모를 변절자들을 처리하라고 따로 지시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리하겠네. 더 할 말이 없으면 지금 즉시 시행하지.]

[예.]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꾸하자 목종림이 다시금 지붕 한쪽의 그늘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도 살수들의 전령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내리는 듯했다.

그늘진 곳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목종림이 시선을 돌리더니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더니 외쳤다.

“청성의 모든 제자들에게 명한다! 지금 즉시 방어선을 물리고 신속하게 본 장문이 있는 곳으로 모인다! 의문을 갖지도 말고 이유를 생각하지도 마라! 시간이 촉박하니 즉시 모여야 한다!”

목종림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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