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생사 대립 (9)
포원은 오른손에는 금속제의 권갑을 착용했고 왼손에는 도가 들어 있는 도집을 쥐고 있었다.
등장하면서 주먹으로 강시를 때려잡은 건 의도한 행동이었다. 날카로운 쇠붙이를 이용하지 않고도 청강시를 처리하여 일부러 위용을 보인 것이다.
포원이 말했다.
“이 순간에 너희들이 느껴야 할 것은, 투신이라 불리는 고수 포원의 강함이 아니다. 이 순간에 너희들이 느껴야 할 것은 청성 무학의 위대함이다. 권장지각에 더 능할 뿐, 나도 너희들과 같은 무공을 배웠고 같은 심법을 익혔다. 즉, 너희들이 배운, 또는 배우고 있는 그 무학도 나중에 이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모든 문도들의 귓전에 포원의 음성이 또렷이 전해졌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믿기 힘들겠지만 무공을 익힌 후로 나는 이길 때보다 질 때가 훨씬 많았다. 기쁨과 환희의 순간보다는 시련과 절망의 순간이 더 많았다.”
포원이 문도들을 조용히 둘러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것 또한, 그 패배와 시련들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것들을 딛고 일어섰을 뿐이다.”
거기까지 말하더니 포원이 도집에서 천천히 도를 뽑았다.
스르릉―
그러면서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나와 너희들의 앞에 또다시 시련의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 시련을 딛고 일어설 것이다. 자, 너희들은 어찌할 테냐?”
사실, 투신이라는 별호는 유명하지만 청성의 문도들 중에도 포원의 실력을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포원이 근래 몇 년간 강호를 유람했기 때문이었고, 설령 문파에 머무를 때에도 실력을 드러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문도는 일대 제자들 중에서도 몇 명이 다였다.
그렇기에 포원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지금, 청성 문도들의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눈동자에 다시금 힘이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포원이 의도한 바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억지로 청성의 권법을 이용하여 강시를 박살낸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효율적으로 강시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 밤의 전투가 어떻게 흘러갈지 여전히 알 수 없는 탓이다.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힘을 비축하여 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도를 뽑아 든 것이다.
포원이 뒷짐을 진 채로 말없이 문도들을 둘러볼 때, 근처에서 또다시 소란이 일었다.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포원이 그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밤 너희들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나, 포원에게 있어 청성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나 또한 보게 되겠지. 너희들이 품은 청성은 어떤 의미인지를.”
그 직후, 포원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랬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귀신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청성의 제자들이 들고 있던 도검을 고쳐 쥐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검고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유소와 포원이 부지런히 청강시들의 숫자를 줄이고 있었지만 청성파의 방어선은 계속해서 밀리는 중이었다.
청강시뿐만 아니라 몰려드는 흑강시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단유소와 포원이 외부에서 활약한 덕분에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던 흑의인들의 숫자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난 탓도 컸다.
목종림이 한설연과 함께 지붕 위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 경계 책임자인 문동립이 또다시 빠르게 다가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사부님……!”
보아하니 문동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방금 장문인이라는 호칭 대신 사부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사제지간이긴 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부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 문동립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뭐냐? 무슨 일이냐?”
그러자 문동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 사제가……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목종림이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 사제, 은겸이…… 말입니다.”
목종림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정은겸(鄭銀謙).
문동립은 자신의 둘째 제자, 정은겸은 넷째 제자였다.
정은겸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자질이나 오성이 가장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지독한 노력파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결국은 절장의 경지에 올랐다.
성실한 데다가 심성이 곧고 착하여 자신이 특히 아끼던 제자였다. 정은겸은 그의 동기인 이대 제자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터웠고, 그 아래의 삼대 제자들에게는 큰 존경을 받던 제자였다. 그는 나중에 청성에서 크게 쓰일 제자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은겸은 몇 년 전에 실종되었다. 무림맹에 협조까지 요청하여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봐도 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정은겸이 갑자기 나타났다니.
목종림이 서둘러 물었다.
“그 아이는, 은겸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무사하더냐? 사지는 멀쩡하더냐? 건강해 보이더냐?”
그런데 문동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기색을 살피던 목종림이 다시 물었다.
“왜……, 대꾸가 없느냐?”
문동립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은겸이는……, 그 아이는……, 가, 강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목종림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큰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잠시 후에 목종림이 입을 열었다.
“가, 강시라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처, 청강시입니다……. 그것도 제가 본 청강시 중에서 가장 움직임이 민첩하고 강력합니다. 그의 검이 청성의 검법을 펼쳐내고 있습니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문도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여 다치거나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정 사제이니 그래도 사부님께 보고는 드려야 할 듯하여…….”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목종림이 말했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앞장서거라.”
“예, 사부님.”
문동립이 지붕을 뛰어넘으며 앞서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고 목종림이 그 뒤를 따랐다. 한설연, 진평, 연소운도 말없이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일대가 소란스러웠다.
“정 사제……!”
“아아아! 정 사형!”
“흐으윽, 사부님!”
“정 사숙…….”
모두가 정은겸을 부르는 목소리들이었다.
청성의 이대 제자인 정은겸의 사형제들과, 삼대 제자들 중에서 그의 제자였던 문도들, 또는 사질(사문의 조카)이었던 문도들이 계속해서 안타까운 음성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문도들 모두가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목종림이 등장하자 그러한 목소리들은 점차 잦아들었다.
목종림이 보니 정은겸은 한쪽 무릎을 못 쓰게 된 상황이었다. 검을 들고 있는 한쪽 팔도 어깨 어림부터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정은겸은 한쪽 무릎을 질질 끌며 악착같이 청성의 문도들을 향해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의 옆에 포원이 있었다. 정은겸을 저렇게 만든 사람은 당연하게도 포원이었다.
문도들을 보호하고 목종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저런 조치를 취해둔 것이다.
“은겸아……!”
목종림이 그렇게 외치며 포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목종림을 바라보는 포원의 표정에도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목종림이 정은겸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포원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종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정은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목종림 쪽으로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목종림이 정은겸 앞으로 다가서며 다시 외쳤다.
“은겸아! 은겸아……!”
그리움, 반가움, 안타까움 등이 가득한 음성이었지만 헛수고였다. 애초에 정은겸에게서 특별한 반응이 있을 리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이미 사자(死者)니까. 강시니까.
“아아! 어찌하여……!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정은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목종림의 앞을 포원이 가로막았다.
“장문, 더 가까이 가면 위험하네. 아직 한쪽 다리는 멀쩡해. 언제 어떻게 장문을 공격해올지 모르네.”
“하오나 사숙, 은겸이입니다. 저 아이가 몇 년 만에 제 앞에……!”
“심정은 이해하나, 그는 이미 사자네. 강시네.”
“하오나……!”
목종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포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장문의 그 마음은 저 아이의 혼이 알아줄 걸세.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세나. 이제 괴로워하는 저 육신을 편히 쉬게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저 아이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이네. 저 아이라면 더 이상 문파에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아아아아……!”
목종림이 고개를 들고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포원이 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장문, 문도들이 매우 동요한 상태네. 이 이상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네.]
눈을 감고 있는 목종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목종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원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저 아이는 장문이 직접 보내주시게. 이 상황에 알맞은 대처이기도 하고 저 아이에게도 그게 좋을 것이네.]
[그리하겠습니다……, 사숙.]
그렇게 대꾸한 목종림이 이윽고 눈을 떴다.
그러더니 청강시인 정은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네가 이런 모습이라니……, 내 마음이 미어지는구나.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네 의지가 아니었음을 나는 믿는다.”
목종림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청성의 제자였다. 나는 너를 친애하였고 앞으로도 너를 아끼던 내 마음은 결코 변치 않을 것이다. 온 청성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목소리가 격하게 일렁인다 싶더니, 결국 목종림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울먹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찢어지는 마음으로, 울며 너를 벤다. 사부가 제자를 베는 이 미안함은 저세상에 가서 사죄하마.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부디 편히 쉬거라.”
스릉―
목종림이 검을 뽑아 들었다.
한쪽 소매로 눈물을 훔친 그가 이윽고 정은겸을 향해 짓쳐들었다.
강기가 불쑥 솟아오른 그의 검이 정은겸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휘이이이이―
탄내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목종림과 한설연은 지붕 위에서 말없이 그 바람을 맞고 있었다. 정은겸을 베고 난 후, 목종림은 곧바로 이곳으로 돌아왔다. 지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으로 돌아온 목종림은 말이 없었다. 그 후로 한 마디도 없었다.
한설연도 목종림을 위해 침묵을 유지했다.
목종림에게는 힘겨움과 괴로움을 넘어선 슬픈 시간일 테니까.
한설연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후였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장문 어른, 이제는 결정을 내리셔야 해요.”
본산의 더 높은 봉우리로 이동하여 버티며 지원 전력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지원 전력이 오는 방향으로 혈로를 뚫어 청성을 벗어날 것인가.
그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상황상 이제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결정을 내린 후, 곧바로 움직여야 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전멸당할 위험성이 존재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버티지 못하면 포위되어 전멸당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혈로를 뚫지 못하면 결국 전멸당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어떤 경우에든, 실패했을 때에는 극소수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청성이라는 거대한 문파는 완전히 풍비박산이라고 봐야 했다. 살아남은 몇몇이 문파를 재건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족히 수십 년은 걸릴 테니까.
목종림이 쉽사리 한설연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순간에 자신이 내린 선택으로 인해 문파의 명운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