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96화 (96/200)

96화. 생사 대립 (4)

“다다다다, 다, 당신들은……!”

어제 야심한 시각에 청성을 방문한 무림맹의 손님들이었다. 저들 때문에 오늘 낮에 장문인에게 불려가 얼마나 크게 꾸지람을 들었는지 모른다.

키가 큰 미청년이 서백풍, 그리고 방금 전에 강시의 다리를 자른 청년의 이름이 아마 곽승추라 했던가?

여전히 놀란 상태에서 고중보가 두 청년의 이름을 떠올릴 때, 서백풍이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시지요?”

더없이 다정한 어조였다.

“그, 그, 그렇소.”

고중보가 서백풍의 시선을 회피하며 그렇게 대꾸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다치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청심대원들은 이차 방어선으로 퇴각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강시가 등장했을 경우에만 나서라는 상부의 지시입니다.”

“아…….”

“저희들은 다른 곳을 지원하러 가야 하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서백풍이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목례하자, 곽승추도 따라서 고중보를 향해 목례했다.

두 사람이 뒤돌아서 막 한 걸음을 떼었을 때 고중보가 서둘러 물었다.

“다, 당신들, 정체가 뭐요?”

그러자 서백풍이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당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다시피 무림맹의 일개 비마대원일 뿐입니다.”

어젯밤에 고중보가 무시하면서 썼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대꾸였다. 고중보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를 때, 서백풍이 다시 목례하며 말했다.

“농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지금은 그냥 그렇게 알고 계시는 편이 낫습니다. 그럼 보중하십시오.”

서백풍과 곽승추가 빠르게 땅을 박찼다.

달리는 와중에 서백풍이 곽승추에게 말했다.

“승추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고중보를 만나기 전에 두 사람은 이미 두 구의 강시를 처치했었다.

첫 강시를 상대할 때 곽승추의 검은 강시의 사지에 제법 깊은 상흔을 낼 뿐, 완벽하게 베지는 못했었다. 반면에 서백풍의 창날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강시의 몸을 베었다. 그게 서백풍과 곽승추의 실력 차이였다.

곽승추의 검이 강시의 한 팔을 절단한 건 두 번째 강시를 상대할 때였다. 그마저도 서백풍의 조언을 들은 후에야 해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 소모되는 진기의 양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전투가 장시간으로 이어질 것을 감안하면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진평까지는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강시의 사지를 절단할 정도가 될 것 같지만, 곽승추와 연소운에게는 아직 무리인 듯했다. 그게 서백풍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더는 무리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방금 전에 곽승추가 또다시 무리를 한 것이다.

“죄송해요, 형님.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었어요. 그 느낌을 기억해놓고 싶어서.”

결국 서백풍이 빙그레 웃었다.

조원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 드러내는 법이 없지만, 묵룡조원들은 하나하나가 그 누구보다도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타인과 비교해서든, 자기 자신을 상대로든.

“알았어. 알았으니까, 더는 무리하지 마라. 큰 힘을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벨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예, 형님. 그나저나 아까 고 당주님 표정, 볼만하던데요?”

그 말에 서백풍도 피식 웃었다.

신룡대원으로 살면서 이와 비슷한 상황은 수도 없이 겪어왔다. 신입일 때에는 이런 상황에서 매우 통쾌해했었는데 이제는 그저 이렇게 피식 웃어넘길 뿐이다.

잠시 말없이 달리다가 곽승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강시라니. 오늘 밤에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요.”

“그러게.”

“이곳 청성……, 무사할 수 있을까요?”

“글쎄…….”

달리면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서백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지. 우리가 청성에 적을 끌어들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조장님이 끝까지 청성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아마도 그렇겠죠. 그분, 빚지고는 못 사는 분이니까요. 특히 마음의 빚이면 더더욱.”

“게다가 조장님은 투신 어르신과도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고, 목 장문인도 우리를 잘 대해주셨으니까.”

“예. 그분, 특히 정에 약한 분이니까요.”

달리는 와중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윽고 서백풍이 먼저 저 멀리 보이는 강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 * *

목종림과 한설연은 지붕 위에서 청성의 상황을 주시하며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한 소저는 강시에 대해 좀 알고 있는가?”

“저도 책에서 읽은 게 다예요, 장문 어른. 백오십여 년 전, 혈교에서 강시를 대동하고 중원을 혼란에 빠트렸을 당시에 파악된 강시는 총 세 종류였어요.”

그 말에 목종림이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강호 경험깨나 있는 자신조차도 모르는 세세한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던 탓이다.

“나는 당시에 그저 혈교에서 강시를 대동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군. 한데 세 종류라?”

“당시의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강시의 피부색에 따라 각각 황강시, 흑강시, 청강시로 분류되어 있었어요. 뒤로 갈수록 더 단단하고 강력했대요. 강시의 동작도 뒤로 갈수록 더 자연스러웠고요.”

“그 분류에 따르면 지금 청성에 나타난 것들은…….”

“예, 흑강시로 보여요.”

“황강시도 아니고 처음부터 흑강시라니. 제발 지금까지 나타난 것들 외에 더 이상은 없었으면 좋겠군.”

말을 마친 목종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제발 그러기를.”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한설연의 눈동자는 심각해져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겪어온 적들이라면, 결코 강시 이십 구 정도로 끝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극악무도한 자들이 백오십 년 전의 혈교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마교의 흉수일까? 한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나?”

“마교에서는 삼백 년 전에 이미 강시 제조술에 관한 모든 기록과 시설을 폐기했다고 했어요. 실제로 그 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정마대전 중에도 강시가 등장한 적은 없었지요. 딱히 근래에 마교 쪽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첩보가 들려온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백오십 년 전의 혈교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아직 확실한 건 없기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쪽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연관이 되었다 해도 얼마나 연관이 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설연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강시가 등장한 것을 보니 적들이 혈교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껏 겪어온 그들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식들을 종합해보면, 예전에 혈교가 했던 방식과 궤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능성을 높게 본 건 그래서였다.

그렇기에 더 우려스러웠다.

처음부터 황강시가 아닌 흑강시를 투입했다는 건, 그들이 보유한 강시들 중에서 흑강시가 질적으로 가장 떨어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청강시보다 더 발전된 형태의 강시가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백오십 년 전에 비해 무학은 더욱 발전했고 강호인들의 무공 실력도 전체적으로 상향되긴 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보유한 강시 중에 흑강시가 최하급이라면 이 강호는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백오십 년 전보다 더 고통스럽고 혹독한 시련을.

그 즈음 목종림의 전음이 들려왔다.

[포 사숙과 단 공자는 아직이지?]

[예.]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쯤,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던 장로들이 하나둘씩 목종림 곁으로 모여들었다.

마지막에 돌아온 사람은 이 장로로, 그는 한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전서였다.

“사형! 장문 사형! 지원 전력들로부터 전서가 왔습니다! 그들이 출발했답니다!”

“오오오오!”

목종림이 반색하며 전서를 받아 들었다.

그가 전서의 내용을 훑기 시작할 때쯤, 한설연은 내심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왠지 이 장로가 풍기는 느낌이 아까까지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왜일까.

왜 갑자기 이 장로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걸까.

근거를 대라고 하면 전혀 댈 수 없는, 이것은 일종의 육감 같은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도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겼을 것이다. 단유소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게 된다.

만약 이 장로가 변절자고, 그가 당장 장문인을 찔러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곁에 있는 다른 장로들도 한패라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나아가서, 만약 장문인 목종림까지 모두가 한패라서 동시에 수를 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렇듯 언젠가부터 ‘만약’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굳이 억지로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강호에 나와서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을 겪은 탓이었다. 게다가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인 단유소를 통해서 많은 걸 보고 배운 덕분이기도 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만약의 상황을 그려보고 있었지만, 한설연의 표정에는 전혀 그러한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 장로의 한 손이 조용히 움직인 것은.

스윽―

은밀하되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였다.

장문인 목종림의 시선이 여전히 전서에 머물러 있는 틈을 노린 것이다.

그 순간 한설연이 양팔로 목종림을 강하게 밀쳐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목종림이 깜짝 놀랐다.

놀란 눈으로 한설연을 바라보던 목종림의 시선이 곧바로 이 장로가 들고 있는 비수 쪽으로 향했다.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목종림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장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목종림은 더 크게 놀라야 했다.

이 장로가 더 이상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한설연을 향해 다른 팔을 뻗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그녀를 사로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함께 있었던 세 명의 장로들도 한설연을 향해 함께 손을 뻗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을 보니 결코 이 장로를 제지하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저들 모두가 변절을……!’

문파 내에 변절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주축이 되는 장로들 모두가 변절을 했을 줄이야.

정신적인 충격이 큰 와중에도 장로들의 측면 후방에서 하나의 인영이 경악할 속도로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지……?’

그리고 그게 목종림이 지붕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접한 마지막 광경이었다.

목종림이 떨어지기 전에 서 있던 곳은 삼 층 전각의 지붕 위였다. 그리고 그가 막 낙하하기 시작한 찰나, 전각의 이삼 층 창문이 박살 났다.

와자작!

동시에 그 안에서 몇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들 모두가 검을 쥐고 있었고 검기가 가득 주입되어 있었다. 모두의 검극이 목종림 자신의 요혈에 향해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창문 안에서 활시위를 겨누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이 활을 겨눈 방향 또한 자신이었다.

문제는 모두가 낯익은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모두가 청성의 제자들이었다. 그것도 문파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청성의 일이대 제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청심대 소속의 제자들도 있었다.

‘허어……!’

놀랄 일의 연속이었다.

주축이 되는 장로들이 변절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여전히 힘든데, 이렇게 많은 문도들이 변절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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