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생사 대립 (3)
흑의인들이 본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들과 맞서 싸우는 청성의 제자들은 더없이 용맹했다.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적들을 막으며 아직까지 가장 외곽에 있는 방어선을 사수하는 중이었다.
그 즈음, 한설연은 다시금 목종림에 의해 호출된 상태였다.
“궁금한 것이 있어 불렀네. 아까 볼 때는 몰려오는 적도들의 숫자가 매우 많아 보였는데, 막상 본산에 당도한 적도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 보여서 말일세. 물론 지금도 꾸준히 몰려오고 있긴 하네만.”
“그건 아마도…….”
한설연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줄일 때 목종림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곤란한 사안이거나 기밀을 유지해야 할 사안이면 전음으로 내게만 말해도 되네.]
그러자 한설연의 입술이 달싹였다.
[누군가가 중간에서 적도들의 수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에요.]
[수를 줄여? 대체 누가 있어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수를 줄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되물은 후 한설연의 표정을 살피던 목종림의 양미간이 금세 좁아졌다. 그가 다시 물었다.
[설마, 그가……?]
목종림이 말한 ‘그’란 단유소였다.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조원들의 말로는 잠시 인근을 정찰하고 오겠다며 몰래 나갔다고 해요. 당연하게도 정찰만이 목적은 아니겠죠. 혼자 나가려는데 태상장로님께서도 알아채고 동행하셨다고…….]
그 말을 들은 목종림이 눈을 지그시 감더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눈을 뜬 그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대강의 이유는 짐작이 되네. 문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겠지. 그렇다 해도 그 두 명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면 이곳에 닥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가 없어지는데…….]
[단 공자님도 그 사실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을 거예요. 상황 판단이 분명한 분이니 장문인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해요. 게다가 태상장로님도 함께 계시고요.]
[알겠네. 이 사실은 일단 우리만 알고 있지.]
내부의 적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모두가 아직까지는 투신 포원이 목종림의 근처에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게 들통나면 목종림의 신변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당연합니다.]
한설연이 그렇게 대꾸했을 때였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건물을 향해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는 청성파의 외곽 경계를 총괄하고 있는 문동립이었다.
“장문! 큰일 났습니다!”
문동립이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의 표정에 다급함과 놀람이 가득하니 목종림이 서둘러 물었다.
“큰일이라니? 뭔가?”
“그, 그, 그게……! 강시입니다!”
“무어라?”
목종림이 다시 물은 건, 방금 들은 내용이 현실감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시입니다! 서쪽 방어선에 진짜 강시가 나타났습니다!”
목종림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강시라니……!”
“실제로 그런 게 존재한다니……!”
여태껏 단 한 번도 동요한 적이 없었던 한설연조차 깜짝 놀란 상태였다.
적이 어젯밤에 바로 쳐들어오지 않고 뜸을 들이기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줄곧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그 뭔가가 설마 강시였을 줄이야.
목종림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말로만 듣던 그 강시란 말인가? 예전에 등장했던 그 혈교의?”
마지막으로 강시가 등장한 건 지금으로부터 백오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점의 일이었다.
그때 파악된 강시의 숫자는 백여 구 정도였는데, 단지 그 정도만으로도 중원의 삼분지 일이 초토화되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강시와 함께 밀고 내려온 혈교 때문이었다.
당시에 등장한 강시는 움직임이 좀 둔탁하지만 피부가 단단하여 일반적인 도검으로는 겨우 생채기 정도나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실제로 검을 휘둘러본 결과 도검이 박히지 않았습니다! 검기를 주입해서 베어도 겨우 생채기 정도나 낼 수 있는 수준입니다!”
“몇 구나 되던가?”
“일단 제가 있는 지점에서 본 것이 세 구였습니다! 듬성듬성 나타난 것으로 보아, 다른 방향에도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대응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격조를 일단 투입시켰습니다만, 절대 정면으로 맞붙지 말고 최대한 시간만 끄는 식으로 움직이라고 지시했습니다! 빠른 조치가 필요할 듯합니다!”
그러자 목종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했네. 자네는 가서 다른 곳에도 이 사실을 전파하게. 대처도 일단은 그런 식으로 하라 하게. 필요에 따라서 방어선을 한 단계쯤 물리라고 하게나. 우리는 빠르게 후속 조치를 상의해보겠네.”
“알겠습니다!”
문동립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마자 목종림이 장로들과 한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경악할 일이 벌어졌지만 지금은 놀라고 있을 시간도 없을 것 같구려. 방법이 있겠소?”
그러자 장로 한 사람이 대꾸했다.
“문 대주의 보고를 들어보니 그 강시를 베려면 최소한 절정 고수는 되어야 할 듯합니다. 절정 고수 중에서도 내공이 뛰어난 수준이 아니면 벨 수 없을 듯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청심대와 청의위를 적절히 분배하여 전원 투입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청심대(靑心隊)는 청성파에서도 절정 고수 이상으로만 구성된 정예 전력이었다. 청의위(靑義衛)는 겨우 열 명 남짓일 뿐이지만, 청성파 최고의 고수들로 구성된 최정예 단체였다.
“청심대와 청의위를 벌써 투입해야 한단 말인가…….”
목종림이 안타까움 가득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오늘 밤의 싸움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에 그들의 힘은 되도록 아껴두고 싶었다. 한설연의 말마따나 나중에 적측 고수들이 등장하면 그들을 상대하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는 청심대와 청의위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은 빨라야 했다.
“청심대와 청의위를 투입하게.”
목종림의 말에 장로 두 명이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각각 청심대와 청의위의 책임자였다.
이어서 목종림이 이 장로에게 말했다.
“이 장로는 가서 바로 전서를 날리게. 이 사실을 인근의 세력들과 무림맹에게 최대한 빨리 알려야 하네.”
“예!”
이 장로까지 사라지자 지붕 위에는 목종림과 한설연만이 남았다.
“설마 이 청성산에 강시까지 등장할 줄이야.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이 이 시대에 또다시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목종림이 길게 탄식할 때, 여기저기에서 청성 제자들의 고함과 비명이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 * *
피부색이 시커멓게 죽은 강시 한 구를 청심대원 세 명이 상대하고 있었다.
일반 제자들은 이미 이차 방어선으로 물러난 상태였고, 여태껏 강시들의 시선을 끌던 타격조원들은 주변의 흑의인들을 막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강시와 상대하고 있는 곳은 일차 방어선과 이차 방어선의 중간 지점이었다.
캉! 카앙!
진기를 주입한 청심대원들의 검이 강시의 피부와 부딪치며 그런 소리가 났다.
계속해서 진기를 가득 주입해서 베었는데도 대부분은 생채기 정도만 낼 뿐이었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었다. 깊이 베었다고 해봐야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다.
초겨울의 서늘한 날씨임에도 청심대원들의 이마에는 작은 이슬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눈앞의 강시를 상대한 후로 잘해야 반의반각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도 그랬다.
반면에 강시는 그저 움직일 뿐이었다. 이미 죽은 자의 몸이니 지칠 일도 없었다.
강시가 휘두르는 팔다리의 위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고 강력하여, 매 순간순간 간담이 서늘했다.
동작이 뚝뚝 끊어지며 부자연스러웠지만, 일정한 형식이 없이 멋대로 팔다리를 휘두르니 그게 더 대처하기가 까다로웠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이를 악물며 그 음성을 토해낸 자는 다른 두 명의 청심대원들과 복색이 약간 달랐다.
다른 대원들의 어깨에는 검은 띠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두 개의 띠가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두 개의 띠는 청심대 내에서도 조장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그가 바로 고중보였다.
평소에는 지객당주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유사시에는 청심대에서 조장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고중보가 근처에서 흑의인들을 막고 있는 타격조원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 상황 보고 제대로 한 거 맞아? 청의위에서는 대체 왜 아직까지 지원이 안 오는 거야!”
“벌써 세 번이나 보고했습니다! 곧 지원이 올 것이라고 분명히 답을 받았는데……!”
“그래놓고 안 오면 어쩌라는 거야!”
사실 고중부는 청의위가 오지 않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한 것뿐이었다.
청의위는 열 명 남짓이다. 그리고 등장한 강시의 숫자는 스무 구 정도라 했다. 아무리 청의위라 해도 이런 괴물들을 쉽게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인원 부족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부웅―
강시의 한 팔이 기묘한 각도로 휘둘러진 순간, 불행하게도 청심대원 한 명이 역동작에 걸렸다. 결국 그의 발이 살짝 미끄러지더니 중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시의 다른 팔이 그 대원의 상체를 향해 날아갔다.
붕―
고중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조심햇!”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대원이 몸을 피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고중보와 다른 대원이 돕기에도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해서 견제가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상대는 아무리 검을 쑤셔 넣어도 꿈쩍하지 않는, 강시니까.
“아……!”
결과가 너무 빤히 예상된 탓인지 고중보의 입에서 안타까움 가득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샤악―
후방에서 어떠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중보와 청심대원이 미처 그 기척의 정체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뭔가가 강시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겅―
강시 쪽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에 드러난 현상에 의해 고중보는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휘익― 툭.
청심대원을 향해 휘둘러지던 강시의 한 팔이 갑자기 목표를 잃고 저만치 날아가서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청심대원 세 명이 아무리 칼질을 해대도 생채기 정도나 내는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강시의 한 팔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버리다니.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강시의 팔을 가른 게 예리한 쇠붙이가 아닌, 날카롭고 강력한 하나의 기운이었다는 점이었다.
고중보의 고개는 이미 기운이 날아온 방향으로 홱 돌아간 상태였다.
두 사람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의외의 인물들이었기에 고중부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커졌다. 그때 앞서서 달려오던 자가 외쳤다.
“조심……!”
그 말에 고중보가 놀라며 강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시의 남은 한 팔이 이미 그의 어깨에 다다라 있었다.
“으헉!”
고중보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몸을 숙일 때, 또다시 후방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슈악―
그 직후, 폭음이 들렸다.
콰앙!
후방에서 날아온 진기가 강시의 남은 한 팔을 강하게 때린 것이다.
강시의 몸이 크게 휘청거린 순간, 키가 큰 신형 하나가 고중보의 앞을 가로막았다.
슈악― 서걱―
이어서 그런 소리가 들렸을 때 고중보는 보았다.
강시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어 날아가더니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합!”
기합이 들렸다 싶은 순간 또다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더니 검광이 번쩍였다.
슈아악― 서겅!
후방에서 나타난 또 다른 인물 하나가 어느새 강시의 한쪽 다리를 베어버린 것이다.
쿵!
강시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로도 강시는 몸을 버둥거리며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목과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상태에서도 저런 모습이라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즈음, 고중보의 앞을 가로막았던 키 큰 인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또 뵙습니다, 고 당주님.”
그는 창을 꼬나 쥔 채로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