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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94화 (94/200)

94화. 생사 대립 (2)

한설연이 옆옆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갔을 때 진평과 연소운은 다리를 뻗은 채로 쉬고 있었다.

진평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 소저.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전투 전에는 그저 푹 쉬어두는 게 좋습니다.”

한설연도 빙그레 웃었다.

다른 모든 곳이 시끄럽고 분주한데 이곳만 조용한 시골 같다.

아무런 긴장감도 없고 동요도 없다.

억지로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여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이 나타난 순간,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검이 될 것이다.

한설연이 나란히 앉자 진평이 말했다.

“화시를 날린 순간들이 기가 막히더군요.”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부조장님. 그 정도는 다른 분들도 하실 수 있는 일이잖아요.”

“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확신만 있다면요. 문제는 결과에 대한 확신을 찾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그게, 누구나 그러지는 못하거든요. 그 확신이 있어야 아까처럼 모두가 인정하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지요. 가뜩이나 갑자기 불려가서 해낸 일이 아니십니까.”

연소운도 진평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설연이 민망한 미소를 보이다가 말했다.

“다른 공자님들은요?”

그러자 진평이 팔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한설연이 안력을 돋워서 보니 담장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서백풍과 곽승추의 뒷모습이 보였다. 물론 그들에게서도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 공자님은…….”

“주변을 정찰한다고 몰래 나가셨습니다만, 아마도 몸을 풀러 가셨겠지요.”

“그, 그래도 이 위험한 시기에 어찌 혼자서…….”

한설연이 도중에 갑자기 말을 줄였다.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단유소라면 혼자가 가장 안전하고 편할 테니까.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없는 한, 어디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니까.

진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조장님이 근래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넘치시는 모양이거든요. 갑자기 왜 그렇게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니 진평도 단유소가 영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눈치챘거나,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혼자 가지는 않으셨습니다. 포 대협이 알아채고는 따라나서셨거든요. 아마 오래지 않아 돌아오실 겁니다.”

* * *

“그저 가볍게 정찰하러 나온 것뿐인데 굳이 따라오실 필요까지 있었겠습니까?”

달리는 와중에 단유소가 고개를 돌려 묻자 포원이 대꾸했다.

“왜? 못마땅하냐?”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화마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청성산은 온통 탄내로 가득했다.

아직 작은 불씨들이 남아 있는 가운데, 다행히 불길을 피한 녹음도 간혹 보였다.

한가한 듯 대화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실상 단유소와 포원은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지형들 사이로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청성파가 위치한 본산의 북쪽 산지 쪽이었다.

포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못마땅한 눈친데.”

“아닙니다, 어르신.”

“거추장스럽게 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거라.”

“오히려 제가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단유소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두 사람만 있게 되니 대화도 편안해졌다.

낮에 함께 돌아다니면서 친근감이 쌓인 탓이기도 했고 서로가 서로를 깊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단유소는 포원이 따라나선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두 가지 이유일 텐데, 일단 하나는 자신의 실력을 직접 보고자 함일 것이다.

적의 숫자를 미리 줄이려 하는 게 다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최대한 적의 숫자를 줄여놓으면 그만큼 위쪽에 있는 청성의 문도들이 부담을 덜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단유소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다. 물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흥. 그리고 정찰은 무슨. 내가 너 혼자만 재미 보게끔 그냥 놔둘 성싶었더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고수와 적으로 만난 일은 왕왕 있었어도 동료로 함께하기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싸우면서 신경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될 테니 마음이 편안했다.

단유소가 말했다.

“어르신은 투신이라 불리는 권장지각의 살아 있는 전설이신데, 그 검은 대체 왜 들고 계십니까?”

“박투술은 내가 추구하는 무도(武道)일 뿐이지. 청성에 위해를 가하려는 적도들에게까지 굳이 내 무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겠느냐? 처절한 응징이 있을 뿐이지.”

말을 마친 포원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포원은 굳이 무기에 구애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고수이긴 했다. 맨손으로 싸우든 기다란 창을 들고 싸우든 큰 차이가 없는 고수인 것이다.

그런 포원이 일부러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확실한 살상을 하겠다는 각오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게 잠시 달리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에서 이동하는 적도들의 움직임을 감지한 탓이었다.

휙― 휙―

단유소와 포원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두 사람의 신형이 어두운 허공을 날더니 높은 나무의 상단에 있는 가지를 딛고 섰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저 아래로 이동 중인 수백 명의 흑의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시작하는 게 좋겠구나. 먼저 가겠느냐?]

포원의 전음에 단유소가 대꾸했다.

[장유유서라 했지요. 어른이 먼저인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보면 볼수록 맹랑한 녀석이로구나.]

[든든해서 이럽니다.]

[흰소리하기는. 일없다. 어쨌든 나부터 가겠다.]

서로 딱히 계획을 주고받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단유소가 마지막 전음을 보냈다.

[어르신, 절대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치고 빠지다가 빠르게 본진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평소와는 달리 적들은 뜸을 들이고 나타났다. 뭔가를 준비했다는 뜻인데, 그게 단지 화공뿐일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뜻을 알아들은 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이동하는 적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검에서 십여 가닥의 검기가 발출되었다.

슈슈슈슈슈슈슈슉―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적들은 전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십여 개의 검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적들의 몸에 박혔다.

포원의 검기가 박힌 곳은 주로 적의 하체였다.

굳이 숨을 끊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적들은 산을 올라야 하니 오히려 저런 방식이 힘을 덜 소모하면서 더 효율적일 수 있었다.

적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포원에게 집중되었다. 산 위쪽을 향해 달리던 그들이 방향을 틀어 포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포원의 눈매가 좁아졌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리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눈앞의 적들은 애초에 포원 정도 되는 고수를 상대할 만한 실력 자체가 없는 자들이었다. 숫자로 밀어붙인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실력들이었다.

적들에게 에워싸인 상태에서 포원의 검이 또다시 검광을 일으켰다. 십여 가닥의 검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 직후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포원이 철저하게 그들의 하체만을 노린 탓이었다.

이 정도로 격차가 크면 응당 도망쳐야 마땅할 일인데 흑의인들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포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게 오히려 포원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포원의 검이 계속해서 검광을 발산하던 어느 순간, 모여 있는 적들의 외곽을 검은 바람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단유소였다.

적들이 포원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탓에 단유소는 훨씬 쉽게 적들을 처치했다.

단유소의 존재를 알아채자 적들은 더욱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게 오히려 포원과 단유소에게는 더욱 이롭게 작용하여, 두 사람은 순식간에 수백 명의 적을 쓰러트렸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적들의 기척을 확인한 단유소가 포원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르신, 바로 이동하시죠.]

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두 사람의 신형이 바람처럼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단유소와 포원은 청성파가 위치한 본산 중턱 언저리를 돌며 적들을 처리했다.

두 사람은 결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적당히 전력을 줄였다 싶으면 바로 이동하여 또 다른 적의 무리들을 상대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이 많은 인원들을 이렇듯 별 의미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게냐?]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포원이 혀를 내둘렀다.

포원의 말마따나 처음에 투입된 적들은 소모품이었다. 단유소의 예상대로였다.

[별 의미 없이 희생시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이들의 시체 또한 폭발하며 독무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한 소저가 저지선을 최대한 많이 구분한 것도 그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섭니다.]

단유소가 청성 밖으로 나와서 미리 적의 숫자를 줄여놓으려 한 의도도 그 때문이었다. 적이 많이 몰릴수록 시체 폭발에 의한 피해도 더 늘어날 테니까.

[참으로 잔인한 자들이구나. 이들은 불쌍하고.]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적들을 줄여 나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움직임을 최대한 살폈다.

합을 맞추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서로의 무공을 엿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단유소가 느끼는 포원의 움직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일단 움직임이 잘고, 직선적이었다. 잔동작을 짧게 끊는 순간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형태였는데, 그러다 보니 정확성이 돋보였다.

그런데 그러한 움직임들이 매우 빠르게 이어지다 보니 전체적으로 직선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남 사람들의 신체는 매우 유연하고 탄력이 좋다고 들었는데 포원도 그런 것 같았다. 그 특유의 신체 조건과 중원의 무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느낌이랄까.

색다른 움직임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안계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반면 포원이 단유소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단유소의 동작은 부드러우면서도 간결했는데, 그 와중에 뿜어지는 기운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강력했다. 그러다 보니 힘을 별로 쓰지 않는 것 같은데도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가고 있었다.

‘치우침이 없는 경지라니!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무공 경지의 상승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치우침이다. 그 치우침은 비단 무공을 펼칠 때의 습관 같은 것만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가두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치우침이다.

무공이 상승의 경지로 갈수록 무공을 펼치는 실제 습관의 치우침보다는, 정신세계의 치우침이 훨씬 큰 걸림돌이 된다. 그렇기에 상승 무공의 경지를 깨달음의 경지라 일컫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에는 연륜도 상당한 작용을 한다.

초고수들 중에 청년이 드문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혈기나 패기를 넘어서서 정신이 성숙해야 자신의 소우주에도 세상만물의 이치와 조화를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한 청년이 있다.

‘지금껏 내가 저 아이를 잘못 봤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범위 이상에 있는 고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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