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생사 대립 (1)
곽승추가 말했다.
“철혼의 용도는 장치를 조절하기에 따라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비약적으로 사거리가 증가하는 형태가 하나고, 수많은 화살을 연속으로 빠르게 날릴 수 있는 형태가 다른 하나입니다.”
놀라고 있는 한설연을 향해 곽승추가 말을 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거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대신 화살을 한 발씩밖에 날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인 저격용으로 쓰입니다.”
“아아.”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곽승추가 말을 이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빠른 연사 속도를 이용한 대량 살상용입니다. 그 경우에는 또 다른 도구가 쓰이는데, 부사수가 그곳에 화살을 쟁이면 사수가 그것을 받아서 이 아래에 장착하여 사용합니다. 아래에서 용수철을 이용해 화살을 밀어 올려주는 도구입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철혼이라는 쇠뇌가 더욱 놀라웠다.
진평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범용으로 쓰이는 화살을 이용할 수 있으니 지금과 같이 진을 치고 지키는 경우에 상당히 유용하지요. 청성의 창고에도 화살은 남아돌 테니까요.”
진평이 그렇게 말한 후에 연소운에게 턱짓하자, 연소운이 철혼을 챙겨 들었다.
단유소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풍과 승추는 나와 함께 움직이며 싸운다. 청성의 문도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적들 위주로 상대한다.”
“예!”
서백풍과 곽승추가 동시에 대답하자 단유소가 이번에는 진평과 연소운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진평과 소운은 철혼을 챙기고 한 소저의 호위를 맡는다.”
“간만에 철혼 한번 신나게 쏴보겠군요.”
진평이 대꾸하자 단유소가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즉시 신호 보내고.”
“알겠습니다, 조장님.”
그러자 단유소가 다시 일행들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처음부터 너무 신내지 말고 기력 관리들 잘해. 무엇보다도 특히…….”
단유소가 눈동자에 힘을 실어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청성 내부의 적을 조심해.”
* * *
온 산이 연기로 자욱했다.
여기저기에서 야생 동물들과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본산 아래의 봉우리들을 거대한 화마가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광경은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더 이상의 고민이 필요 없었다. 저 정도의 화마라면 경내가 잿더미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일 테니까.
“실시하라!”
장문인 목종림의 명령이 금세 전해져, 경내의 외곽에서도 일제히 불길이 타올랐다. 산 위에서 시작된 불길이 서서히 아래쪽으로 번져갔다.
청성에 있는 모든 이들이 불길을 주시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래에서 빠르게 올라오던 거대한 불길과 청성에서 내려가던 맞불이 마주쳤다.
화르르르―
금방이라도 본산을 집어삼킬 듯했던 화마가 오래지 않아 힘을 잃어갔다. 맞불 작전은 성공이었다.
“청성의 모든 제자들은 들으라!”
내공이 가득 실린 장문인 목종림의 목소리가 경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선조들께서는 이 아름답고 정기 가득한 산을 굳게 지켜내어 우리에게 물려주셨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결국, 이 아름다운 산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경내가 엄숙해졌다. 목종림의 웅대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선조들께서 우리에게 물려주려 하셨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 산의 수려한 경치이냐? 아니면 굳건한 청성의 혼이냐! 모든 제자들은 본 장문의 물음에 답하라!”
“혼입니다!”
“청성의 혼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답하는 소리들이 쩌렁쩌렁 경내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목종림이 다시 외쳤다.
“본 장문의 뜻도 모든 제자들의 뜻과 같다! 잿더미가 된 이 산은 세월이 흐르면 또다시 꽃과 나무가 우거지며 그 아름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무엇이 남느냐? 제자들은 답하라!”
“혼입니다!”
그 대답이 일제히 들리며 온 산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그렇다! 혼이다! 청성의 혼이다! 나아가서는 백도의 혼이다! 그렇기에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잿더미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우리의 혼을 칭송할 것이다! 청성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위대한 혼이었다며 칭송하고 또 칭송할 것이다! 이 강호의 어디에 가서도, 그 위대한 혼을 이어받은 청성의 제자라는 사실을 뿌듯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우와아아아아!”
고막을 울리는 문도들의 함성이 잦아들 때쯤 목종림이 다시 외쳤다.
“턱을 들고, 어깨를 펴고, 오연하게 적도들을 마주하라! 오늘 본 장문과 청성의 모든 제자들은, 설령 육신이 무너져도 혼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 무도한 무리들 앞에 당당하게 보여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이 길게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쳤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이 본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 * *
새까맣게 타버린 산을 더 새까맣게 메우며 흑의인들이 산을 타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 저렇게나 많단 말인가?”
목종림의 말이었다.
그는 현재 청성파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왼쪽에는 한설연이, 오른쪽에는 청성의 수뇌부 서너 명이 서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기에 앞서서 한설연은 적이 초반에 인원수로 밀어붙일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었다.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솔직히 많아봐야 얼마나 많겠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산 위로 올라오는 적들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보니 한설연의 조언을 받아들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여러 단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소저, 이쯤 되었으면 슬슬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소?”
장로 한 명이 한설연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자 한설연이 대꾸했다.
“아직 아니에요.”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 다른 장로가 말했다.
“이제 적이 거의 당도했잖소!”
그의 말마따나 슬슬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한설연이 대꾸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아직이라니……! 이러다가 준비했던 걸 써보지도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한설연은 그 말에 아예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차분한 표정으로 몰려오는 흑의인들을 주시할 뿐이었다.
목종림이 장로들에게 말했다.
“한 소저가 알아서 잘하실 것이니 장로들은 부산 떨지들 마시구려.”
그 말에 장로들이 침묵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염려가 가득했다.
목종림은 장로들이 저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처음으로 겪는 대규모의 전투였다. 그마저도 근 몇십 년간 이런 적이 없었다. 그러니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에 놀라운 건 한설연이었다.
적이 저렇게 수도 없이 몰려오는데도 그녀는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목종림 자신마저도 상당히 긴장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저 어린 여인이 전혀 긴장하지 않은 기색인 것이다. 마치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사람처럼.
“조금 더, 조금 더. 조금만 더…….”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리던 한설연이 이윽고 눈을 번쩍 떴다. 그러더니 낮게 외쳤다.
“시위를 팔 할만 당겨서, 발사!”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목정림이 외쳤다.
“시위를 팔 할만 당겨서, 발사!”
웅대한 목소리가 퍼져 나가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복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사!”
그러자 청성 안쪽에서 불화살 수백 대가 동시에 바깥쪽으로 쏘아졌다.
퓨슈슈슈슈슈슈슈슉―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목종림이 보니 방금 날아간 불화살은 몰려오던 적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에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적의 선봉과 중진을 완벽하게 갈라놓는 효과까지 불러왔다.
한마디로 방금 전의 한설연은 가장 완벽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만약 장로들이 조바심을 참지 못했다면 절대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본산의 이곳저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화시의 사거리 안쪽에 있었던 적들이 그대로 짓쳐든 것이다.
목종림이 보니 흑의인들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뒤따르던 적들과 분리된 탓이었다. 청성의 제자들이 어렵지 않게 그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목종림이 고개를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사방을 훑고 있는 한설연의 표정이나 태도는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자연스러운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멋지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이제는 장로들도 더 이상 그녀를 보채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분히 아래쪽을 주시하던 한설연이 또다시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기를 잠시 후, 그녀가 또다시 낮게 외쳤다.
“최대한으로 시위를 당겨서, 발사!”
목종림이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그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최대한으로 시위를 당겨서, 발사!”
“발사!”
이곳저곳에서 복창이 들려온 순간, 또다시 수백 대의 불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퓨슈슈슈슈슈슈슈슛―
목종림과 장로들의 시선이 불화살의 낙하지점으로 향했다. 잠깐이지만 불빛에 비추어 그 근방의 모습들이 보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적들이 빼곡히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중진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듯했다. 당연히 적의 피해도 컸다.
한설연이 말했다.
“두 번이나 당했으니 적들도 이제는 산개해서 다가올 거예요. 결국 이제부터는 수성전 양상의 전투가 진행될 거고요. 활 쏘는 인원들은 궁술에 능숙한 자들로 삼할 정도만 남기시고, 앞으로 적들이 이곳을 에워싸거든 가장 밀집된 곳에 날리도록 하시면 될 거예요.”
“알겠네, 한 소저.”
“방금 전에 있었던 두 차례의 화시 공격에서 우리가 가장 피해를 덜 입힌 쪽은 북쪽이에요. 바람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곳이에요. 그러니 전력 지원도 북쪽 방어선에 더 많이 필요할 거예요. 미리 대비하시라는 차원에서…….”
목종림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당문 등의 인근 세력들에서는 답신이 왔나요?”
“답신이 왔네. 다른 문파나 세가의 지원 전력과 합세하면 곧바로 출발하겠다고 하네.”
오늘 밤을 버티기 위해서는 지원 전력이 꼭 필요하다는 점과, 그들이 반드시 뭉쳐서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도 바로 한설연이었다. 당연하게도 각개격파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한설연이 목종림에게 다시 물었다.
“퇴로는 생각해두셨죠?”
목종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근접전이 이어질 테니 이 정도면 제 역할도 다한 것 같아요. 이제는 장문 어른과 장로님들께서 직접 지휘하셔도 충분해요. 제가 미리 말씀드렸던 몇 가지 사안만 염두에 두시면 돼요.”
적의 시체가 폭발할 수도 있다는 점, 시체가 폭발한 자리에 독무가 펼쳐지니 바로 피해야 한다는 점, 그들이 벽력탄을 쓸 수도 있다는 점, 그들이 처음에 투입하는 자들은 대부분 소모용이기에 이후에는 고수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 등이 바로 한설연이 염두에 두라고 했던 내용들이었다.
“알겠네.”
고개를 끄덕인 목종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단순히 내 궁금증일 뿐인데, 방금 전의 한 소저를 보니 적을 매우 잘 알고 있는 기색이더군. 그저 주워들은 정도가 아니라, 마치 직접, 그것도 많이 겪어본 느낌이던데…….”
그러자 한설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 많이 겪어봤어요. 사연이 있었거든요.”
“그랬군.”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내용들 이외에도, 그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올지도 몰라요. 그러니 조심하셔야 해요.”
“알겠네.”
“저는 그럼 근처에 있겠습니다.”
한설연이 공손히 읍한 후에 지붕 위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