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청성 괴사 (8)
“그렇습니다. 내부 조력자가 있었다면 세작의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단유소가 대꾸하자 목종림이 말했다.
“결론적으로 가능성의 문제일 뿐, 실제로 우리 내부에 조력자가 있다고 확신할 근거는 아직 없다는 거군.”
“확신하기는 힘들지요. 그러나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당시에 안타깝게 죽은 외부 경계조의 무공 수준이 혹여 다른 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죽은 위치가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었는지도 확인해봐야 할 겁니다.”
단유소의 말에 목종림의 양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자네의 말이 맞는 것 같네.”
목종림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해가자 단유소가 말했다.
“비단 청성만의 문제가 아니니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다만 주의는 하셔야 합니다. 특히 전투가 벌어져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을 때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장문 어른의 안위가 곧 청성의 안위입니다.”
목종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포원이 말했다.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혹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너무 염려하지 말게. 내가 장문의 근처에 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숙.”
고개를 끄덕인 목종림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단유소 일행이 따라서 일어섰다.
“오기 전에 고생들이 많았을 터인데 내가 쉬지도 못하게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듯하군.”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상 방 안에서의 대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서로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일단 자네들은 쉬고 있게나. 체력이 있어야 싸우기도 하지. 무슨 일이 생기거든 즉시 알리라 하겠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목종림이 단유소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방을 나섰다.
포원이 말했다.
“너희들과 더불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나도 좀 쉬어야겠구나. 내가 맨 끝 방을 쓰겠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태상장로님.”
“감사는 무슨. 되었다. 쉬거라.”
“쉬십시오.”
포원까지 방을 나서자 단유소가 말했다.
“한 소저가 이 옆의 작은 방을 써. 그럼 우리도 일단 푹 쉬자고.”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벗어났고 묵룡조원들이 바로 방바닥에 누웠다.
방바닥에는 어느새 온기가 돌고 있어 모두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단유소 일행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날은 아침이 되도록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일이 벌어진 건, 청성산에 다시금 어둠이 찾아오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 * *
해시초(亥時初, 오후 9시) 무렵.
단유소는 초가의 마당에서 장문인 목종림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문도들의 시선은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단유소 일행은 오늘 하루 동안 청성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전투 상황에 대비하여 지형과 지리를 익히기 위함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접한 청성 문도들의 시선은 썩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단유소가 대꾸했다.
“이해합니다. 문도들의 입장에서는 저희들 때문에 괜히 애먼 고생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훈련을 겸해서, 향후 며칠간은 이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 일러두었네. 설령 적이 오지 않는다 해도 그리할 것이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믿어야지.”
지난밤에 청성파에서 무림맹 사천지부로 보냈던 전서에 대한 답신이 저녁 무렵에 왔다. 단유소 일행이 신룡대라는 사실을 확인해준 전서였다. 물론 청성파에서 단유소 일행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목종림과 포원뿐이었다.
조용히 먼 곳을 보던 단유소가 말했다.
“사실, 저도 의아하긴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 탈 없이 넘어가면 좋겠습니다만, 제가 지금껏 겪어온 적들의 성향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쪽이었던지라.”
그런데 그들이 왜 이번에는 뜸을 들이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왠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염려도 되었다.
목종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사람이 초가의 마당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어제 봤던 이(李) 장로와 몇 명의 문도였다.
“사형! 장문 사형!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부, 불입니다! 산자락부터 시작된 불길이 온 산을 감싸고 번져 올라오는 중입니다!”
“무어라……?”
목종림이 두 눈을 부릅뜰 때쯤 방 안에 있던 포원과 단유소 일행들도 모두 튀어나왔다.
“불이라니! 무슨 말인가!”
포원의 외침에 이 장로가 다급한 어조로 대꾸했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은 날인지라, 사방팔방에서 발생한 불길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단유소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목종림에게 말했다.
“방화입니다.”
“그렇다면…….”
“예. 아마도 적들일 겁니다.”
“설마 이 청성 전체를 불로 태우려 할 줄이야!”
목종림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의 안색을 살피며 단유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방에서 동시에, 이 큰 산 전체에 불을 질렀다는 건 적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빠른 대처가 필요합니다.”
“어, 어찌하면 좋겠는가?”
목종림이 서둘러 단유소에게 물었다. 대답은 뒤쪽에서 나왔다.
“일단 맞불 준비를 시키셔야 해요.”
한설연이었다.
그녀의 말에 이 장로가 대꾸했다.
“말도 안 돼……! 문파의 선조들께서 지켜온 이 청성에 우리의 손으로 직접 불을 지르란 말인가!”
“무조건 불을 지르라는 뜻이 아니에요. 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제 예상엔 아마도 결국은 맞불을 놓아야만 사람도 살리고 청성의 경내도 지킬 수 있을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모든 게 화마(火魔)로 인해 잿더미가 될 거예요.”
그러자 이 장로가 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일개 아녀자가 나설 자리가 아닐세!”
그 말에 한설연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할 때, 단유소가 말했다.
“일개 아녀자가 아니라 교월 한설연 소저의 의견이라면 어떻습니까?”
그 말에 단유소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한설연 소저라고?”
“현월곡의 그……?”
총명하기로는 제갈세가와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되는 곳이 바로 현월곡이었다. 교월 한설연은 그 현월곡에서도 내로라하는 인재였다.
그녀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인지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의외였던 것이다.
단유소가 한설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선배님들께 제대로 인사를 올려야 하겠지만, 상황이 다급하니 그러지 못하는 점, 양해를 부탁드려요. 일단 지금은 초겨울의 건조기예요. 제가 산을 오르면서 확인한바, 마른 나무와 낙엽들이 온 산에 가득했어요. 그렇다면 불길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상상 이상으로 커질 거예요. 맞불을 준비하셔야 해요.”
잠시 고민하던 목종림이 이 장로의 뒤쪽에 있는 문도에게 지시했다.
“네가 가서 서둘러 맞불을 준비하라 이르거라!”
“예!”
문도 한 명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청성문도에게 있어 청성산이 갖는 의미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이 크겠죠. 정신적인 고향이니까요. 본산이 불탔다는 생각에 모두가 충격이 클 거예요. 실상 적들이 이번 화공으로 노리는 것도 그런 부분이에요. 정신적인 타격을 입히고 시작하려는 거죠. 심리전이에요.”
이 순간 한설연의 눈동자는 마치 초저녁 샛별이 빛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약간의 뜸을 들였던 만큼,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어요. 당황한 상태에서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적들은 만만한 자들이 아니에요. 문도들에게 그 사실을 확실히 주지시키고 평정심을 유지시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온 산에 불을 지른 것보다 더한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포원의 말에 한설연이 대꾸했다.
“불을 지른 건 시작에 불과해요. 더한 뭔가가 있을 거예요, 아마도.”
그러자 목정림이 말했다.
“이 장로는 가서 모든 장로들과 지도부에게 지금 들은 내용을 전하고, 문도들이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할 수 있도록 힘써주게.”
“예!”
이 장로가 일행을 이끌고 사라지자 목정림이 한설연에게 말했다.
“한 소저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하네.”
“어인 말씀이시온지…….”
“이번 일이 끝나기까지 내 참모 역할을 좀 맡아주시게.”
“외, 외인인 제가 어찌 감히…….”
“맡아주시게.”
목종림의 뒤쪽에서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설연이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많이 부족하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유소가 목정림에게 말했다.
“이 두 친구로 하여금 지근거리에서 장문 어른과 한 소저를 호위토록 하겠습니다.”
단유소가 말한 두 사람은 진평과 연소운이었다.
목종림이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고맙네. 든든하군. 그럼 나도 일단 본 파의 준비 상황을 둘러보러 가보겠네. 조금 있다가 다시 만나지.”
“예.”
목종림이 떠나자 포원이 말했다.
“나도 적이 오기 전에 돌아다니면서 우리 아이들 좀 추슬러야겠다.”
포원까지 사라지자 초옥에는 단유소 일행만이 남았다.
서백풍과 곽승추가 각각 등에 메고 있던 길쭉한 것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함께하는 와중에 두 사람이 계속 메고 다니던 물건이었으나, 한설연은 그 내용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각각의 물건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자 드디어 내용물이 드러났다.
하나는 약간 휘어진 길쭉한 봉이었고, 또 하나는 제법 두툼한 하나의 사각 철봉이었다. 철봉의 한쪽 면에는 얇고 길쭉한 홈이 패어 있었다. 그 외에도 몇 개의 자잘한 철제 부속품들이 더 있었다.
‘저게 뭐지?’
한설연이 그런 의문을 가질 때, 두 사람이 그 두 물건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철컥!
보기에는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데 조립은 금세 끝났다. 숙련된 손놀림이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은 하나의 큼지막한 노(弩)였다.
“그게……, 쇠뇌였어요?”
한설연의 질문에 서백풍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예. 우리 조가 자랑하는 대단한 녀석이지요. 묵룡조에만 대대로 전해져 오는 녀석으로, 이름은 철혼(鐵魂)입니다.”
‘쇠 철’ 자에 ‘넋 혼’이다.
서백풍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선배들이 말하기로 최고의 목수와 대장장이가 합심하여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시위는 이무기의 힘줄을 꼬고 꼬아서 만들었다는데, 저희들이야 사실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실제로 탄성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그러자 단유소가 말을 보탰다.
“전에 청룡에게서 당신을 구할 때에도 사용되었던 물건이야. 물론 당신은 못 봤겠지만.”
단유소의 말마따나 청룡과 다리 위에서 대치했던 당시에도 철혼이 사용되었었다. 묵영시가 단유소의 뒤쪽에서 날아와서 청룡의 어깨를 관통했었는데, 바로 이 철혼을 통해서 발사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