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청성 괴사 (5)
“대협께서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소생이 드린 말씀을 믿기 힘들다는 말씀이겠지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생이 드린 말씀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어쩌다 보니 적도들에 대해 저희들이 먼저 알게 된 것 뿐입니다.”
고중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자네들이 공동파가 당할 때 직접 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들과 조우한 적은 있습니다. 몇 번이나 조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에게서 쫓기다가 청성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 말에 고중보가 피식 웃었다.
“풋! 참으로 이상하군. 공동파 전체를 그렇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자들이 자네들을 놓쳤다고? 그것도 몇 번씩이나 마주쳤는데도?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소린가?”
그러자 진평이 말했다.
“저희들은 요행으로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도움을 청할 곳 중에 청성이 가장 가까워서 이곳으로 왔는데,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청성이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을 드리는…….”
“그쯤하지.”
고중보가 또다시 진평의 말을 끊었다. 그가 냉랭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원래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는 작자가 있다 하여 혼쭐을 내주려고 왔었네. 와서 보니 그래도 무림맹의 손님들이 확실한 듯하고 나름 곤란한 사연도 있었던 듯하니 바로 축객령을 내리지는 않겠네. 다만 내일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바로 떠나주게.”
그러자 진평이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주인이 가라시면 객은 떠날 수밖에 없지요. 다만 저희들이 떠나기 전에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주로 밤에 움직입니다.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말에 고중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어허! 이 작자가 그래도……! 어디서 감히 일개 비마대원 따위가 본 파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인가?”
묵룡조원들의 입장에서는 저러는 고중보의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모두가 담담한 표정이었다.
진평이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소생이 드린 말씀이 맞는다면 대비를 한 것이니 이롭고, 설령 소생의 말씀이 틀렸다 해도 훈련이라 생각하면 되니 청성에 손해가 가는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속는 셈 치고라도 한번 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고중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닥쳐라!”
고중보가 노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게 대해주고 넘어가려 했더니 결국 선을 넘는군.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할 수 없지.”
그러더니 고중보가 뒤쪽에 대고 외쳤다.
“다들 나오너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고중보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 또한 청의 도복을 입은 무인들이었다.
고중보가 돌아보며 말했다.
“무림맹의 손님들께서 굳이 본산에 머물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네. 그러니 지금 바로 정중히 밖으로 모시게.”
“예!”
그들이 일제히 대꾸하자 고중보가 진평에게 말했다.
“내, 오늘의 일에 대해서는 무림맹에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네.”
“저희들이 잘못했으면 맹에서 응당 벌을 내리겠지요. 다만, 나가는 건 저희들의 발로 알아서 걸어 나갈 것이니, 이렇게까지 많은 분들을 고생시킬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밤중에 소란을 끼쳐 송구했습니다.”
진평이 포권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그가 돌아서서 마루로 걸어갔다. 짐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조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한설연이 보니 그 와중에도 단유소는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래 봐왔기에 안다.
그 미소에 담긴 의미는 여유였다.
의아했다.
상황이 썩 좋게 흘러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걸까. 보통 이런 땐 표정이 거의 없는 그인데.
생각해보니 그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왜일까.
한설연이 그런 생각을 하며 묵룡조원들을 따라 마당을 가로지를 때였다.
“이런 망할……!”
갑자기 어디선가 한 줄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초가의 울타리 밖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의 위쪽이었고, 노인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그곳에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기에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누, 누, 누구신지요……?”
고중보가 더듬으며 물었다.
누군가가 소나무 위에 있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 상대가 고수라는 뜻이고, 들린 음성이 노인이니 일단은 정중하게 물은 것이다.
그러자 소나무 위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 이놈아! 어른 얘기하시는데. 한 번만 더 노부가 말하는 데 방해하면 아주 내려가서 귀싸대기를 날려줄 테다.”
고중보가 움찔하는 가운데 소나무 위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이 산에 처음 제자로 들어왔을 때, 나는 이방인이었다. 이 산의 모두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 심지어는 사형제들마저도, 내 사부님마저도 그랬다.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누구도 노인이 말하는 데 끼어드는 사람이 없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이 초가에 방치되어 거의 혼자 지냈었다.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사나흘에 한 번쯤, 누군가가 몰래 식량만 놓고 갔다. 바깥 먼 곳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리는데 내가 볼 수 있는 사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치도록 외로웠지. 매일 울다가 지쳐 잠들곤 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노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보는 노인이 이곳에 찾아왔어. 그날부터 노인은 이곳에 숨어 지냈다. 그는 내가 누군지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본인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았지. 참으로 불친절하고 제멋대로인 노인이었다. 다짜고짜 나를 혼내기 일쑤였고 틈만 나면 때렸지. 그래도 나는 노인이 좋았다.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니까.”
상황이 갑작스럽기는 하나 노인은 이곳에서 지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청성과 연관이 있는 사람일 터. 이제는 많은 이들이 내심 노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정도였다.
“그 노인이 내게 무공을 가르쳤다. 가혹했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때론 며칠간 굶기고 때론 며칠간 잠을 재우지 않았지. 때로는 오랜 시간 동안 작은 공간 안에 웅크린 자세로만 있게 하기도 했다. 미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결국은 해냈어. 그 노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 그가 내게 실망하고 떠나면 나는 또다시 외톨이가 될 테니까. 그게 더 싫었으니까.”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몇 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 세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노인이 그냥 때린 게 아니라 실은 고도의 힘 조절로 타혈을 하며 내 혈들을 강하게 했다는 것. 또 하나는 노인이 내가 잘 때마다 내 몸을 주무르며 철저히 내 몸 상태를 관리해줬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노인이 잠시 말을 멈추자 이곳저곳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인이 원래는 내 사부의 사부, 즉 내 사조님이셨다는 것이다. 말년에 오랫동안 강호 유람을 하시다가 몰래 돌아와서 우연히 나를 발견하고는 함께 계셨던 게지. 그분 덕분에 내가 있었던 것이고. 오랜만에 본산에 돌아온 김에 추억의 장소에서 조용히 감상에 젖어 있었던 것인데 이렇게 방해를 받을 줄이야.”
“그 후로 어르신의 사부와 사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갑자기 노인의 말에 끼어든 목소리가 있었다. 분명히 노인이 엄포를 놓았는데도 누가 감히 끼어들었단 말인가.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단유소였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어르신의 사조님이라면 문파의 큰 어른이셨을 테니 언제까지고 이곳에 숨어 지내지만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왠지 그 사조님이시라면 언젠가는 어르신의 사부와 사형제들을 크게 나무라셨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금방이라도 나무 위에서 노인의 꾸지람이 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들려온 건 노인의 자연스러운 대꾸였다.
“그랬지. 결국 사조께서 나서셨지. 장문 사백(師伯, 사부의 사형, 즉 사문의 백부)이 가장 먼저 맨발로 뛰어오셨다. 사조께서는 이곳에 방치되었던 내 이야기를 장문 사백 앞에서 하시더니, 이 청성의 도적에 올라 있는 사조님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지워달라고 하셨다. 이곳의 도사라는 게 부끄럽고 창피하다면서.”
“그래서 어찌 되었는지요?”
이번에 물은 사람도 역시 단유소였다. 노인도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장문 사백이 곧바로 그 마당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으셨다. 그 상태로 빌며 용서를 구하셨지. 그리고 장문 사백이 내 사부와 사형제들을 이곳으로 부르셨다. 내 사부와 사형제들은 청성의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았지. 그 후에는 이 마당 밖에서 오체투지한 상태로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용서를 구했다. 꼬박 일주일간.”
“그 사조님께서는 문파의 큰 어른임과 동시에 강호에서도 위명이 대단한 분이셨나 보군요. 온 문파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실 정도라면.”
“그렇지. 당시의 백도는 쌍신(雙神)의 시대였다. 서쪽에는 검신이 있었고 동쪽에는 무신이 있었다. 서검신은 노련했고, 동무신은 패기가 넘쳤지.”
그 말에 청성파의 인물들이 모두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그렇다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던 한설연이 황급히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소나무 위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 어여쁜 아이야. 너도 알고 있느냐? 어디 네가 아는 것을 말해보거라.”
그 말에 한설연이 주저하며 단유소의 눈치를 살폈다. 단유소가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소나무 위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시의 서검신이라면 아직까지도 역대 청성파를 통틀어 제일의 고수라고 불리는 조장양(朝莊梁) 대협이 아닐는지요.”
“허허헐. 맞다. 본 파의 문도도 아닌 어린 아이가 제법이구나. 하면 너는 당시의 동무신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느냐?”
“남사준(南獅俊) 대협이셨을 겁니다. 현 무림맹주님의 조부님의 장인어른 되시지요.”
“잘 아는구나. 하면, 어여쁜 아이야. 너는 노부가 누군지도 아느냐?”
한설연과 대화를 주고받는 노인의 어조에는 대견함과 자상함이 가득했다. 한설연이 대꾸했다.
“현 강호에서 가장 강한 무인으로 아홉 명이 꼽히고, 그중에 다섯 분이 백도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한 분은 무림맹에, 한 분은 소림에, 한 분은 무당에, 한 분은 남궁세가에 그리고 한 분은 청성에 계시지요.”
“옳거니.”
“청성에 계신 분은 유일하게 무기를 쓰지 않고 권장지각과 체술로만 그 자리에 오르셨기에 투신(鬪神)이라 불리지요. 그분이 바로 어르신, 포원(布原) 대협이실 겁니다.”
“똑똑한 아이로구나.”
노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고중보가 얼른 소나무 쪽을 향해 반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태상장로님을 뵈옵니다!”
그러자 고중보의 근처에 있던 모든 청성의 제자들이 일제히 반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태상 장로님을 뵈옵니다!”
그러자 나무 위에서 노인, 포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어른 얘기하는 데 방해하지 말라니까!”
외부인인 단유소와 한설연이 끼어들었을 때는 잘만 받아주더니 정작 문파의 제자들이 예를 취하니 소리를 버럭 지른다.
청성의 제자들 모두가 포원의 고함에 움찔할 때였다.
스읏― 툭.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단유소 일행과 청성 제자들 사이에 내려섰다.
마치 한여름 뙤약볕에 탄 듯한 검은 피부색에 이목구비도 남다른 백발노인.
그가 바로 포원이었다.
‘투신 포원은 중원인이 아니라 안남(安南, 오늘날의 베트남) 사람이라고 하더니 진짜였구나…….’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 고중보를 비롯한 청성의 제자들이 예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포원이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누가 예를 풀라 했느냐?”
이번에는 고함을 지르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지만, 그의 어조는 더할 나위 없이 서늘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