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88화 (88/200)

88화. 청성 괴사 (4)

다음 날 축시정(丑時正, 새벽 2시).

청성산 자락에는 안개가 짙었다.

단유소 일행은 이미 청성산 자락에 진입하여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오는 길에 적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는데 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무사히 도착한 김에 바로 청성파로 향하는 길이었다.

소로를 따라 산 중턱을 오르던 단유소 일행이 달리는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근처에서 여러 개의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시오.”

그 말에 단유소 일행이 멈춰섰다.

이윽고 몇 사람이 길을 막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총 다섯 명의 사내들이었다.

모두가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 한 명과 이삼십 대로 보이는 청년들 네 명이었다.

중년인은 청색 도복이었고 청년들은 남색 도복이었다. 모두가 병장기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청색 도복의 중년인이 책임자인 듯했다.

청색 도복의 중년인이 단유소 일행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시겠지만 이곳은 청성의 영역이고 우리는 청성의 제자들이오. 본산에서는 밤중에는 방문객들을 받지 않으니 여러분께서는 이 이상 올라가실 수 없소이다. 양해를 부탁드리오. 방문을 원하시거든 사시정(巳時正, 아침 10시) 이후에 오시면 가능하니 참고해주시오.”

단유소 일행이 무기를 착용하고 있기 때문인지 중년인의 표정과 어조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단유소가 진평을 돌아보았다. 이에 진평이 앞으로 나서며 중년인을 향해 포권했다.

“깊은 밤중에 이런 식으로 방문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우리는 무림맹에 속한 사람들로, 상황이 다급하여 청성파에 도움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그러자 청의 중년인의 양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무림맹이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꾸한 진평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더니 중년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꺼내 든 건 무림맹의 일원임을 중명하는 맹패였다.

중년인이 그것을 받아 들더니 세심하게 살폈다. 한참이나 동패를 살피던 중년인이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비마대라면…… 수송대였지요?”

“그렇…… 습니다.”

일단은 단유소 일행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비마대의 맹패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내민 것이다.

“미안하오만 다른 분들의 맹패도 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소. 근래에 무림맹을 사칭하고 본 파에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켰던 자들이 간혹 있었던지라.”

무엇이든 위조하려면 위조가 가능한 세상이다. 무림맹의 맹패 또한 그랬다. 아무리 위조를 방지하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방면의 기술자들은 그야말로 감쪽같으니까.

그 말에 조원들이 모두 맹패를 꺼내었다. 진평이 대표로 그것을 걷어서 중년인에게 넘기며 말했다.

“저분 소저께서는 우리의 지인이십니다. 신분은 저희들 쪽에서 보장할 수 있습니다.”

청의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명패들도 꼼꼼하게 살폈다. 그 후 명패들을 다시 진평에게 건네며 말했다.

“비마대원들께서 이 시간에 다급한 일이라니요?”

중년인의 태도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다.

“정체불명의 적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의탁하고자 왔습니다.”

그러자 중년인이 말했다.

“일단 상부에 보고하겠소. 기다려주시오.”

“예.”

이어서 중년인이 청년 중 한 명에게 뭔가를 지시했고, 그 청년이 빠르게 산을 올라갔다.

잠시 대기하는 상태에서 진평이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청년들은 대부분 이류 무인, 중년인은 일류 고수로 보입니다. 이들의 뒤쪽에서도 몇 명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단유소가 파악한 바도 같았다.

그 후로 일다경(약 20분) 정도가 흘렀을 때, 산 위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보아하니 아까 청의 중년인이 보냈던 청년이었다.

그가 중년인에게 다가가더니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이윽고 중년인이 진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부에서 전갈이 왔소. 불가하다는 내용이오.”

그 말에 단유소 일행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평이 물었다.

“아니,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들이 무림맹에 소속된 사람들임을 분명히 확인하셨잖습니까.”

그러자 중년인이 완고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거절해야 하는 내 마음도 썩 편하지는 않소. 그러나 나한테 따져봐야 소용없소. 나도 상부에서 지시한 대로 할 뿐이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신변의 위험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사정 설명까지 드렸잖습니까.”

“사정은 본 파에도 있소. 다른 분들도 아니고 무림맹의 손님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데에는 당연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소? 게다가 우리가 축객령을 내리는 것도 아니잖소.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시면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양해를 부탁드리오.”

그러자 진평이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이곳에서 대기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가서 상부에 한마디만 전해주십시오. 감숙의 공동파를 그렇게 만든 자들이 곧 청성파로 들이닥칠 가능성이 높다고.”

그 말에 청성파 측 인물들이 눈을 부릅떴다.

감숙과 사천은 인접해 있다. 청성파에서 그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 그게 정말이오?”

“발각되면 우리만 곤란해질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그러자 중년인이 서둘러 다른 청년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또 다른 청년이 얼른 산 위로 뛰어갔다.

중년인이 진평에게 물었다.

“왜 그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은 것이오?”

그러자 진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원래는 따라가서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청성에서 위험에 빠진 동도를 문전박대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해서 말입니다.”

청의 중년인은 얼굴이 붉어질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보고하러 갔던 청년이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청의 중년인이 말했다.

“올라오시랍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중년인이 청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에게 말했다.

“네가 저분들을 안내해드리거라.”

* * *

“비마대라고?”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오십 대 중반의 사내는 청성파의 지객당주 고중보(高重保)였다. 지객당은 외부에서 방문한 손님들을 관리하는 곳이었고, 지객당주는 그곳의 책임자였다.

고중보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눈으로 물었다.

“신분 확인 되었으면 적당한 방을 내어 주면 될 일이지, 그걸 왜 굳이 이 시간에 나한테까지 보고를 하나? 무림맹의 비마대를 접객하는 데 나까지 나서야 해?”

한창 자던 중에 중요한 보고라고 해서 일어났더니 겨우 무림맹 비마대의 방문 건이라니. 짜증스러웠다.

“일단은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본 파에 적습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답니다. 그래서 보고를 드려야 할 듯하여…….”

고중보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말한 자는 사십 대 후반의 사내로, 이름은 문동립(文動立)이었다. 그는 청안대주로, 청성파의 경계, 경비 업무를 총괄하는 자였다.

“적스으읍?”

고중보는 웬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문동립이 서둘러 대꾸했다.

“예, 당주님. 그들이 말하기를, 공동파를 그렇게 만든 적도들이 곧 청성파를 공격해올지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고중보가 다시금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적도들에 관한 사항은 무림맹에서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네. 그런데 그걸 백풍단도 아니고 비조대도 아닌 일개 비마대원들이 알고 있다고? 게다가 적도들의 계획까지 알고 있다고? 비마대가? 어떻게?”

백풍단은 무림맹의 정찰대, 비조대는 특수 정찰대였다. 그들도 모르는 사실을 수송대인 비마대가 알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도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본 파의 안위와 관련된 내용인지라 보고를 드릴 수밖에…….”

“하긴. 그렇긴 하겠군. 알겠네.”

말을 마친 고중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여전히 짜증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직접 가서 보고 내 앞에서도 허튼소리 하면 아주 혼꾸녕을 내준 후에 다 잡아 가둬버릴 거야. 가뜩이나 그놈의 무림맹패 때문에 최근에 본 파 전체가 뒤숭숭한 마당에. 에잉, 쯧쯧.”

도포를 걸친 고중보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 * *

단유소 일행이 배정받은 숙소는 본산 외곽에 있는 작고 허름한 초가였다. 방은 세 개였고 작은 마당이 딸린 곳이었다.

방이나 마루 같은 곳은 정갈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애초에 초가 자체가 매우 허름했다.

일행을 이곳까지 안내한 청년이 사라지자 곽승추와 연소운이 방에 불을 때러 아궁이로 향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 상태에서 한설연이 물었다.

“어딜 가도 늘 이런 식의 대우를 받으시는 거예요?”

남아 있는 묵룡조원들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익숙하다는 표정의 미소였다.

묵묵히 뭔가를 생각하던 한설연이 말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이 대단한 분들이 늘 이런 대우나 받아야 하다니. 정체를 밝히기만 하면 어디서든 융숭한 대접을 받을 분들인데…….”

“그게 더 불편합니다. 오히려 이게 편합니다.”

서백풍의 대꾸였다.

그러자 한설연이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반성도 많이 하게 되네요. 저도 이랬거든요. 처음에 단 공자님을 비마대원으로 알고 있었을 때 저도 솔직히 무시하는 마음……, 있었으니까. 이렇게 직접 겪어보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더 잘 알 것 같구요.”

“그렇게까지 마음 쓰실 일은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의 속성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상대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서백풍의 말에 한설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즈음 단유소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누군가 오는군.”

그 말이 떨어지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청의 도포를 걸친 오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단유소 일행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의 사내가 물었다. 표정을 살짝 찡그린 채였다.

“비마대원들이라고?”

그러자 이번에도 진평이 한 걸음 나서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청성의 지객당주, 고중보라 하네.”

그 말에 진평이 얼른 포권했다. 단유소 등도 진평을 따라 포권했다.

“고 대협을 뵙습니다. 소생은 무림맹 비마대의 진평이라 합니다.”

진평이 자세를 풀며 말을 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누를 끼쳐 송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쉴 곳을 마련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동료들로…….”

그러자 고중보가 한 팔을 내밀며 진평의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여전히 살짝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아, 소개는 되었네. 자네들이 심상치 않은 발언을 했다 하여 이렇게 급히 찾아온 길이네. 공동파를 궤멸시킨 적도들이 우리 청성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는가?”

진평이 대꾸했다.

“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훗!”

고중보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진평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 대협께서는 어이해 그리 웃으시는지요?”

“아! 자네들에게 그런 게 아니니 오해 말게. 사실, 무림맹의 수뇌부에서도 아직 적도들의 정체에 대해 밝혀내지 못한 상황이잖나. 즉, 정찰 임무를 맡고 있는 백풍단이나 비조대에서도 적들의 정체나 행보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지.”

고중보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차대한 사실을 오히려 비마대원들이 알고 있으니 과연 백풍단이나 비조대가 왜 존재하는 건지 순간적으로 의문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자네들도 웃기지 않은가?”

진평이 뭐라고 대꾸하려 할 때 고중보가 인상을 굳히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면, 무림맹에서는 비마대원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 청성파는 모르고 있다는 뜻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