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청성 괴사 (3)
묵룡조의 앞을 막아서는 적들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졌다. 적이 인원수로 몰아붙이는 탓에 묵룡조의 이동 속도도 조금씩 느려졌다.
만약 다른 이들이었다면 전진은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멀쩡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과연 신룡대 중에서도 최정예라 할 만했다.
지붕과 지붕을 뛰어넘으며 전진하던 한순간.
일행이 비교적 낮은 지붕 위에 내려섰을 때 단유소가 외쳤다.
“모두 조심!”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인근의 건물에서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슈슈슈슈슈슛―!
이삼 층 건물의 창문에서도, 그 위의 지붕에서도 화살비가 무수하게 쏟아졌다.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 순간 묵룡조 모두가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단유소의 근처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물론 한설연도 함께였다. 그 와중에 그녀의 귓전에 진평의 전음이 들려왔다.
[호흡 정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설연이 호흡을 멈췄다. 이미 진평으로부터 한 차례 주의를 받았던 탓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면서 묵룡조원들을 보니 그들도 모두가 호흡을 멈춘 모습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독에 대한 대비임을 알 것 같았다. 독가루가 묻었을 수도 있고 화살촉을 독탄의 형태로 개조했을 수도 있으니까.
일행이 모여들었다 싶은 순간 단유소가 낮게 도약하며 날아오는 화살비를 막기 시작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검이 일행을 감싸며 반구형의 막을 형성해냈다.
티디디디디디디딩!
한 방향도 아니고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수백 대의 화살을 모조리 막아내는 신위라니. 한설연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가 힘들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무인인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놀라웠다.
화살이 검에 부딪치는 소리 이외에도 간간이 작은 주머니 같은 것들이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화살들 중에는 간혹 화살촉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작은 주머니가 달린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독주머니일 것이다. 화살이 날아올 때부터 진평이 이미 예상했듯이.
그 순간, 단유소의 곁에 잠시 정지해 있던 조원들이 갑자기 움직였다. 서백풍과 곽승추가 동시에 지붕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이어서 연소운이 뛰어내리면 바로 그의 뒤를 따를 겁니다.]
진평의 전음이 들린 순간 연소운이 지붕 아래의 거리로 뛰어내렸다. 그러자마자 한설연도 진평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지붕 위에서도 확인했지만 아래쪽은 흑의인들로 꽉 메워진 상태였다. 서백풍과 곽승추가 길을 뚫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나아가는 속도는 더뎠다. 특히나 지붕 위에서도 공격해오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전방에 밀집되어 있는 적들의 중앙에 떨어졌다.
콰아아앙!
굉음이 들리며 지축이 울렸다.
동시에 뭔가가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엄청난 파동이 일더니 적들이 사방으로 튕기듯 날아가며 쓰러졌다.
밀집되어 있었던 만큼 적들의 피해도 매우 컸다. 최전방에 있던 자들은 직접적인 충격을 받았고, 그 뒤에 있던 자들은 이차적, 삼차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일견하기로 그 한 수에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은 죽거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듯했다.
비어 있는 공간의 중심에 단유소가 있었다. 자세를 굽히고 바닥에 검을 꼽은 채였다.
이윽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마자 묵룡조원들이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원들이 합류하자마자 단유소가 전방을 향해 검을 그었다.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앞을 막고 있는 적들을 관통하며 계속해서 날아갔다. 전방이 쑥대밭이 되었다.
서백풍과 곽승추가 다시 선두로 나서는 찰나, 단유소가 오른쪽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위의 적들을 쓰러트리며 일행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원들은 아래에서 단유소는 위에서 싸웠다.
단유소는 일행이 돌파해 나가는 거리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의 지붕을 수시로 건너다니며 적들을 쓰러트렸다. 도약하여 반대편 지붕으로 넘어갈 때에도 그는 그냥 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일행의 앞을 막고 있는 적들을 향해 꼭 검기를 떨쳐내었다.
위쪽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단유소가 도와주고 있기도 하니 일행이 나아가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묵룡조는 최대한 빨리 저자와 민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곳에서의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민간인들의 희생도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인원만으로 그들을 지킬 수도 없는 마당이니, 그들에게 피해를 최대한 덜 끼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다행히 모두의 노력 덕분에 묵룡조는 금세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작은 현을 벗어난 묵룡조원들이 어두운 들판을 달렸다.
현을 벗어난 후로는 앞을 막아서는 적들은 거의 없었다. 다만 여전히 질릴 정도로 많은 숫자의 흑의인들이 계속해서 추격해오는 중이었다.
처음에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얼추 삼사백 명 가까운 적들을 처치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쫓아오는 흑의인들은 매우 많았다. 적게 잡아도 여전히 칠팔백 명은 될 것 같았다.
“와! 진짜 그 새끼들 징그러울 정도로 많네요.”
선두에서 달리던 곽승추가 뒤돌아보더니 질려버렸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더 무서운 건 그거야. 놈들의 눈에는 공포심이 거의 없었어. 다는 아니었지만 많은 놈들이 그런 상태더군.”
“검에 찔려도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의 눈빛이 아직도 생각나서 소름이 다 끼치네요.”
곽승추의 대꾸였다.
그러자 맨 뒤쪽에 있던 진평이 말했다.
“조장님과 한 소저는 여태 저런 자들을 상대해온 겁니까?”
단유소가 대꾸 없이 묵묵히 달리기만 하자 진평의 옆에 있던 한설연이 말했다.
“네. 대부분 저런 식이었어요. 게다가 저들 중에는 몸을 폭발시켜서 일대에 독무를 퍼트리는 자들도 있었어요. 시체도 폭발하고 심지어는 살아 있는 자들마저도 폭발하고…….”
묵룡조원들이 눈을 부릅떴다.
“시체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도 폭발했다고요?”
“네. 파신폭멸공의 응용이 아닌가 싶어요. 공동파도 그 수법에 당한 것 같구요.”
“대체 사람의 몸에 무슨 짓을 했기에…….”
“허어…….”
조원들의 표정에 충격이 담겼다.
잠시 말없이 달리다가 한설연이 말했다.
“추격해오는 자들과의 거리가 계속 벌어지고는 있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러요. 아마 그들은 우리의 발목을 잡아두는 용도였을 거예요.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저건 시작에 불과할 거구요.”
그 말에 조원들이 또다시 놀랐다.
“저 정도가 시작에 불과하다고요?”
곽승추가 뒤돌아보며 묻자 한설연이 대꾸했다.
“저들은 매우 집요하고 치밀한 자들이에요. 이런 경우, 이전에는 우리가 가는 길목에 엄청난 고수가 기다리고 있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럴 가능성이 높구요.”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묵룡조원들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평이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자 한설연도 돌아보았다.
추격하던 흑의인들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져 이제는 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을 확인한 진평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지원 요청하겠습니다.”
단유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평이 손가락을 입술에 넣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휘이이이이이이―
휘파람 소리가 들린 직후 하늘 위에서 매 한 마리가 사선으로 하강하며 빠르게 내려왔다. 진평이 한 팔을 내밀자 매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 위에 앉았다.
아마도 진평 전용 전서응인 듯했다. 한설연이 보니 진평의 매는 검붉은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깃털이 멋지네요.”
한설연의 말에 진평이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청비와 설화도 보셨고 금랑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적야(赤夜)라 합니다.”
적야. 붉은 밤이라는 뜻.
“아하.”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일 즈음 진평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전서에 쓰이는 작은 쪽지였다.
진평이 그 쪽지를 펼쳤다. 쪽지에는 이미 글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진평이 딱히 감추려 하지 않았기에 한설연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긴급 지원 요청
쪽지에 적힌 글자였다. 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적어둔 전서인 모양이었다.
종이를 펼친 진평이 또다시 품속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냈다. 작고 길쭉한 그것은 필묵통이었다. 단유소가 갖고 있는 것과 같았다.
진평이 그것을 한설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개를 따서 붓에 먹 좀 적셔주십시오.”
그가 원하는 대로 한설연이 붓에 먹을 적셔서 건넸다. 그러자 진평이 종이의 아래에 두 글자를 적어 넣었다.
청성
진평이 써 넣은 것은 목적지였다.
잠시 후, 적야가 깜깜한 밤하늘 위로 훨훨 날아올랐다.
* * *
다음 날, 유시초(酉時初, 오후 5시)를 넘긴 시각.
단유소 일행이 이동 중에 발견한 죽림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그야말로 청성산에서 멀지 않은 위치였다.
적당한 자리를 잡자마자 단유소가 말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나 이동할 거야. 그러니 편하게들 쉬어.”
오늘 새벽에 적습을 받은 이후로 거의 쉬지 못했다.
쉬었다고 해봐야 중간중간에 잠시 물을 마시며 호흡을 고를 때뿐이었다. 그 각각의 시간들이 길어야 일각(15분)을 넘지 않았다.
가장 오래 쉰 것은 정오 즈음에 딱 한 번이었다. 육포와 건량 등을 씹으며 한 식경(30분가량)정도 쉬었다. 그마저도 돌아가면서 운기조식을 취하느라 제대로 쉬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모두가 적당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서백풍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휴.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 한 시진 반(3시간)쯤만 더 달리면 청성산 자락이라 그쪽에 도착한 후에야 쉬자고 하실 줄 알았거든요. 조장님이 요새 하도 기운이 펄펄하셔서.”
동감이라는 듯 곽승추와 연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가 피식 웃어 보일 때 곽승추가 말했다.
“그런데 적측의 고수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군요.”
곽승추의 말마따나 단유소와 한설연의 예상은 빗나갔다. 적측의 초고수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이동했는데, 결국 여태껏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진평이 말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충분히 쉬자고 하시는 거지.”
그러자 곽승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응당 나타나야 할 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후에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이시겠지요?”
그 말에 진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가 청성산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재의 우리들에게 청성파 이외의 대안이 딱히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아미파 쪽으로 향하면 이동 거리만 더 길어지니 그들에게만 좋을 일이니까.”
“아미파가 힘들면 우리가 당가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건 어때요? 당가까지는 다섯 시진 정도만 달리면 될 텐데.”
그러자 이번에는 한설연이 대꾸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악랄한 방식으로 소모전을 펼치는 자들이에요. 아까 새벽에도 보셨겠지만 저자나 시가지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민간인들의 희생이 너무 커져요. 당가가 위치한 성도는 대도시이니 그 여파는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거예요.”
“결국 현재로서는 청성파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곽승추의 말에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봇짐을 베고 자리에 편하게 누웠다. 한설연도 누웠다.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조장님과 한 소저께서는 여태 그런 작자들을 상대해온 겁니까. 실로 무시무시한 자들이군요.”
혼잣말 같은 곽승추의 말을 끝으로 일행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